엑스트라 파업 선언 176.
급하게 엘프목에게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둥치에 손을 대고 상태를 살폈다. 건강 상태가 과도하게 좋아지긴 했지만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머리 위로 짙게 드리운 그림자에 위를 올려다보자 가지에 매달린 아기 주먹만 한 열매들이 보였다.
‘저 열매는 뭐지?’
엘프목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는데. 뜻밖의 수확이다. 아직 다 여물지 않은 것 같아 조금 기다렸다 따야겠단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걱정할 필요 없어. 엘프목은 건강해. 오히려 더 멋있어진 것 같기도 하…….”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멀어진 둘이 정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야?”
둘을 따라 거대한 나무줄기 너머를 빼꼼 내다봤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공방 앞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 있었다. 엘프목의 짓인 건지 밖의 사람들에겐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어라라. 첫 타임 손님들이 벌써 왔나.”
첫 번째 타임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은 데다 선착순으로 받는 것도 아니라 굳이 와서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 다들 뭐 하는 거지?
의아하게 혼잣말하자 승연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손님 같아 보이진 않습니다.”
“관광객들 아닐까요? 강의진 공방 구경 온……. 아니면 기자나 스트리머겠죠. 뭐.”
수철이가 뻔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다들 표정이 재수 없는 게 내 팬 같아 보이지도 않아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만 들어가서 오픈 준비나 하자.”
“네!”
***
-호현아! 이쪽이야. 이쪽으로….
-주호현. 똑바로 안 해?
-우리 호현이, 내 소중한…….
-있지, 호현아. 나…….
-호현아…….
-호현아…,
-호현아.
“허억……!”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직 멍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내가 꿈을 꿨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 이딴 꿈을 꾸냐…….”
주호현 꿈을 꾼 것은 오랜만이다. 문양을 받은 이후 처음인가.
나를, 주호현을 부르던 목소리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단순히 주호현이 등장한 꿈이 아니라 내가 주호현이 되어 그런지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도 한동안 묘한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한밤중이라 사위가 어두웠다. 누운 채로 손을 높이 들어 달빛에 카스토르의 문양을 비춰 봤다.
“……이상해.”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으나 한 번 달아난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뒤척이다 결국 눈을 뜬 나는 옆자리에서 잠이 든 구름이가 깨지 않게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김에 정화 연구나 해야지. 아래층에 들러서 루트가 잘 있는지도 확인하고……
살금살금 문 쪽으로 가는데 등 뒤에서 똑똑 하고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귀를 의심하며 뒤를 돌아보자 벽에 기대 손을 흔드는 성산하가 보였다. 놀라 달려가 문을 열어 줬다.
“성산하??”
“야심한 밤에 혼자 어딜 가?”
“그냥 잠 안 와서 잠깐 연구실 좀 가려고 했……. 너야말로 이 밤중에 뭐 하는 거야?”
구름이가 깰까 소곤대며 말하자 성산하가 문 쪽을 고갯짓하며 속삭였다.
“하말 깰라. 연구실로 갈까?”
내 연구실을 무슨 제집인 양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구름이뿐 아니라 지금 한창 자고 있을 루트와 수철이, 승연이를 생각하면 마음 편히 대화하기엔 연구실이 제격이었다.
성산하를 데리고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 두터운 연구실 문을 닫고서야 원래대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도둑도 아니고 왜 맨날 창문 넘어 들어 오는데? 한국엔 언제 온 거야?”
“도착하자마자 달려왔지. 오랜만인데 환영의 포옹 같은 건 없는 건가?”
양팔을 벌려 보이며 웃는 성산하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개소리할 거면 꺼져.”
“하하하, 그동안 별일은 없었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순간 드는 생각에 아, 하며 놈을 돌아봤다.
“인도 탑. 거긴 사라졌다며. 어떻게 된 거야?”
“으응. 역시 알고 있었네.”
잠시 머뭇거리던 성산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물을 바쳤더라고.”
“뭐, 뭐? 그럼 제물을 바치면 탑이 사라지는 게 맞았던 거야?”
씨발, 우리 구름이!!
경악해 되묻자 성산하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걸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면.”
“무슨 말이야? 나도 탑이 사라진 사진을 봤어. 그 자리에 탑 대신 발자국만 남았던걸.”
“하지만 던전과 그 생태는 그대로지.”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성산하가 내 눈을 보며 물었다.
“애초에 우리가 탑을 없애려 한 이유가 뭐지?”
“그야 당연히…….”
“당연히?”
“존나 수상하게 생겼잖아.”
성산하가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가장 합당한 이유를 말했을 뿐인데 어이없다는 반응이 억울해 생각나는 대로 손을 꼽으며 이유를 나열했다.
“던전 파동이랑 몬스터들도 이상했었고…. 아, 그리고 운석! 성좌들이 죽으면서 하늘에선 운석이 떨어지고 사방의 던전들이 죄다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켰잖아.”
“그 일들이 탑 때문일까? 탑이 사라진 지금도 인도의 던전 파동과 몬스터들의 이상은 그대로야.”
“당연하지! 그 모든 일 이후에 생겨난 게 탑이니까 논리적으로……. 대체 넌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탑이 사실 나쁜 게 아니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답답해 언성을 높이자 씁쓸한 웃음을 지은 성산하가 고개를 저으며 느릿하게 답했다.
“그저 의문이 들었을 뿐이야. ……아니, 어쩌면 현실을 회피하려는 건지도 모르지.”
“뭐…?”
“너를 탑으로 데려가고 싶지 않은데. 아무리 찾아도 방법이 보이질 않으니…. 꼭 함정에 걸린 기분이라.”
성산하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바라봤다. 적막이 찾아와 안 그래도 서늘한 연구실에 싸늘한 공기만 감돌았다.
너무 아무 생각이 없었나. 사실 성산하에게서 저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항상 어떻게든 해결을 해 내던 놈이라, 이번에도 어떻게든 방법을…….
그런데 만약, 아니라면? 정말 제물을 바쳐야 탑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오는 거라면. 그러기 위해선 구름이와 내가 제물이 되는 방법밖에 없다면? 그때는 어떡해야 하지? 어……씨발. 좆 된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구름이가 자고 있을 위층을 올려다봤다. 초조하게 엄지 끝을 물어뜯자 성산하가 손을 잡아 내렸다.
“의진아.”
“…….”
“강의진! 나 봐.”
내 손을 잡아당겨 품에 안은 성산하가 등을 쓸어내렸다. 커다란 손이 등을 쓸어내릴수록 조금씩 진정이 됐다. 그제야 내가 숨도 못 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던전에서 나온 지 한 달도 안 됐어. 탑 열두 개 중 겨우 하나 사라졌고. 다른 방법 분명 있을 거야. 찾아내면 돼. 찾을 수 있어.”
“…….”
“우리 멍멍이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애기네. 이런 것 가지고 겁을 먹고.”
“……겁먹긴, 지랄.”
가슴팍을 퍽 밀치는데 꿈쩍도 안 한 성산하는 내 귀를 조물락대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올 때 보니까 대견한 짓도 했던데. 엘프목.”
“…아, 그거? 멋있지.”
“응. 주인 닮아 가는지 아주 우람하고 덩치도 커졌더라. 아무도 네 공방 못 넘볼 것 같던데.”
“당연하지. 누구 공방인데.”
반쯤 조건반사로 답하다가도 목전에 닥친 위기가 떠올라 단전 깊숙이부터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깨도 축 처지려는 걸 성산하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기가 싫어 애써 힘을 줘 버티며 말했다.
“나는 하나도 겁 안나. 진짜야. 어차피…….”
“어차피?”
한 번 죽은 몸, 이란 말이 혀끝까지 나와 겨우 삼켜 냈다. 손을 내저으며 말을 돌렸다.
“그보다 구름이. 구름이가 걱정이야.”
내 품에서 구름이를 빼앗기던 그 좆같은 기분이 아직도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나만 따르는 구름이가 있어 그런지 정작 내 걱정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구름이는, 구름이는 안 돼. 혹시 누가 알아보고 노린다면 그 새끼는 죽이고 구름이 데리고 몽골로 튄다.’
너른 초원에서 구름이를 풀어 놓을 수 있다면……. 하지만 성좌 지도가 있는 이상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사생활 보호도 안 되는! 인권, 양권까지 침해하는 개 같은 성좌지도!
“구름인 씨발, 절대 못 줘. 못 보내.”
주먹을 꾹 쥐며 말하는데 성산하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허공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놈이 인벤토리에서 자그만 모자 하나를 꺼냈다.
“선물.”
“이게 뭔데?”
받으라는 듯이 흔드는 모자를 쥐었다. 펼쳐 보자 귀여운 늑대 얼굴 모양이 있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모자였다. 너무 작아 아기들이나 써야 할 것 같은데 이걸 왜 주는 거지?
혹시 사용자에 맞춰 늘어나나 싶어 머리에 가져가자 성산하가 킥킥 웃으며 내 손을 잡아 멈췄다.
“네 거 아니야. 하말 선물.”
“우리 구름이?”
“한참 전에 주려고 구해 놨던 건데 까맣게 잊고 있었네. 몬스터 용인데, 아마 하말에게도 사용 가능할 거야. 변신 효과가 걸린 모자라 씌우면 알아보는 사람 없을 거야. 이젠 문양에도 못 들어가니 꼭 필요하겠네.”
“미친! 이런 게 있으면 빨리 줬어야지!!”
안 그래도 일하는 동안에 손님들과 못 마주치게 하느라 위층에만 뒀던 게 미안했는데, 이거면 구름이도 엘프목이 보호하는 정원까지는 돌아다닐 수 있었다!
신이 나 아이템 정보를 살피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성산하가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중요한 일은 다 끝났어. ……그래. 바로 가지.”
반대편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익숙해 물었다.
“이초냐?”
“응. 내리자마자 여기로 오느라 도착했단 얘기를 안 했더니 놀라서 전화가 왔네.”
“자고 있으면 허탕이잖아. 전화를 하든가.”
성산하는 웃는 얼굴로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가려는지 성산하가 연구실을 둘러보며 마무리하듯 말했다.
“이만 가 볼게. 연구는 적당히 하고 이만 자. 내일도 일하지 않나?”
“포…….”
“포션 먹는단 소리 말고.”
할 말을 잃어 놈을 바라보자 성산하가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성산하!”
성산하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놈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온 김에 정화 하고 가라.”
“뭐? 강의진 너……, 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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