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77.
떠나는 성산하를 배웅하고 홀로 어두운 정원에 서서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손톱만 한 달 뒤로 커다란 행성들이 보였다. 처음 봤을 땐 그렇게 놀랍더니 어느샌가 익숙해져 이제는 보고도 그저 배경 정도로만 인식된다는 게 우스웠다. 익숙해질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저따위 흉물을…….
행성에서 눈을 떼고 엘프목 아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제물, 제물이라…….”
녹스에서 도망쳐 주호현의 몸으로 깨어났을 때부터 평생 목숨을 위협받고 살리란 걸 예감하고 있었지만, 태제헌에게 잡혀가 노예처럼 죽느니만도 못하게 살거나 아니면 뒤에서 칼침이나 맞을 줄 알았지 이따위 부담감으로 목을 조르는 방식일 줄이야.
지금이야 가장 먼저 탑을 없애 버린 인도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지만 사실 플릭이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제주였다. 며칠 전 찾아온 효영, 재아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쳤다.
-왜 인터뷰 안 한 거야? 천랑이랑 녹스가 협박하던?
-……역시 알고 계시네요. 일행들 모두 합의금을 받고 그날 일을 함구하기로 했어요.
-아아…. 그래서였군. 왜인지 이상하다 싶더라.
-사실 아직까지 포기 않고 연락하면서 귀찮게 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말이 새어 나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 모두 전결 서약 맺었거든요.
전결 서약이란 말에 놀라 어떤 식인지 물어 대강의 내용까지 들었는데, 어떤 놈이 만든 건지 좆같은 조건들에 빠져나갈 곳 없이 집요한 계약서라 그 지독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천랑인지 녹스인지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는데.’
의문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나 무서운 서약서인데. 당연히 녹스 쪽이겠지!
다시 공방으로 돌아와 곧바로 지하실로 내려갔다. 성산하가 일찍 자라며 엄포를 놓고 가긴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평소에는 공방에서 판매할 포션을 만들랴, 승연이와 함께 개인 연구를 하랴 정신이 없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승연이가 자고 있는 지금이 정화 연구를 하기에 적기였다.
세 번째 창고에 들어가 가장 구석에서 정화 연구를 하던 것을 꺼내와 작업대에 늘어놓았다.
“으음……. 피, 기운, 눈물에 촉매제를 융합하고….”
대강 계산을 끝내자마자 단도를 꺼내 들어 손바닥을 그었다. 필요한 만큼 피를 내어 플라스크에 담아 두곤 최루 효과가 있는 재료를 빻아 눈물까지 채취를 완료했다.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 덕에 모든 과정엔 막힘이 없었다. 처음이었다면 내가 가진 힘으로 정화시킬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 시간이 오래 걸렸겠지만 이미 가이딩 포션이라는 훌륭한 전례가 있는 상황이다. 성공이 금방이라도 손끝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
[잡담] ㄱㅇㅈ공방 다녀온 사람 없음?
슬슬 후기 올라올 때 됐는데 왜 후기가 안올라오냐??
댓글(41)
-후기를… 혹시 맡겨두셨나요?
└ ㅋㅋㅋㅋㅋㅋㅋㅋ
└ 222맡겨놨나ㅋㅋㅋ
└ 그니까ㅋ.ㅋ.ㅋ.ㅋ.ㅋ 무슨 글인가 했네
└ ㄱㅆ/그때 직접 가서 물어보고 후기 쓴다는 얘들 많았음
└ ㄷㅆ/ 그래서 맡겨놨냐고 ㅇㅅㅇ
└ 얘(x) 애(o)
└ 질문 좀 할 수 있지 댓들 존나 띠껍네
.
.
-며칠 전에 갔다왔는데 눈치 보여서 한 마디도 못 물어봄
└ ㄱㅇㅈ눈치?
└ ㄴㄴ 팬들 눈치 사장은 존나 해맑음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임
└ 연기하는 거겠지 진짜 무서운 놈인듯
└ 원래 S급들 믿는 거 아님
-초반 댓글 봐라..;;; ㄱㅇㅈ 팬들 입막음 미쳤네ㅋㅋㅋ
[잡담] 강의진 공방에 개 두마리 녹스 길드장네 개인가요? 둘이 화해함? (12)
[잡담] 애초에 그걸 왜 강의진 공방에 가서 물어보려는 건줄 모르겠음 죄지은것도아니고 (37)
[잡담] 질투지ㅋㅋ 강의진 포션 살 돈은 없고 돈 버는 거 보니 배는 아프고 (21)
[건의] 요즘 헌폴에서 특정 헌터팬들 나대는 거 보기 불편해요
특히 강의진 팬들이 헌폴 물 흐리는데 관리 안하나요
댓글(91)
-난 니가 불편해요
-별 ㅈㄹ을 다한다….
-완전 동의합니다 강의진 팬들 여기까지 몰려온 거 보면 답 나오죠
└ 완전 동의 ㅇㅈㄹㅋㅋㅋ난 완전 반대한다
└ 동의합니다 헌트로폴리스 시민들의 뜻입니다.
└ 반대합니다 :) 헌트로폴리스 시민들의 뜻입니다.
└ 동의
└ 반대
└ ㅂㄷ
└ 동의
.
.
-안녕하세요. 헌트로폴리스 운영자 마온입니다.^^ ‘건의’게시판은 헌트로폴리스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나 유용한 운영 방항들을 제시하시는 게시판으로 시민간 싸움은 ‘신고’게시판을 이용해주시길 바랍니다.
└ 혹시 ㄱㅇㅈ팬?
└ 안녕하세요. 헌트로폴리스 운영자 마온입니다. 아래로 댓글을 금지합니다.
[건의] 깨끗한 헌트로 폴리스를 위해 강의진 언급 금지를 신청합니다 (273)
[신고] 강의진 공방 바이럴 의심 글을 신고합니다 (301)
***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진명아. 왔어?”
“죄송합니다. 밖에 사람이 많아서 돌아오느라 좀 늦었어요.”
뒤를 돌아보는 진명의 모습에 나도 따라 밖을 내다봤다. 담벼락 뒤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 기자들이 보였다. 절-대 인터뷰에 응하지 말라는 이초의 경고도 있기에 모두 무시하는 중이긴 한데, 어째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더 많아지는 느낌이다.
애써 눈을 돌리며 진명이에게 물었다.
“주문한 건 다 가져왔어?”
“아직요. 이번에 주문 건이 많아서 두 번에 나눠서 가져오려고요. 이따 밤 시장 다녀와서 한 번 더 올게요.”
“그래. 미안한데 주문할 거 또 있다. 이따 승연이가 연락할 거야. 왜 재료는 사도 사도 부족할까.”
“헤헤. 다 공방이 잘 돼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일단 탱크에 정제수부터 채우겠습니다.”
50L가 넘는 물통을 번쩍 들고 가는 진명이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저 덩치에, 저 힘인데 진짜 일반인이라고? 아무리 봐도 각성자 급인데.
……운동 뭐 하냐고 물어볼까.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안쪽에서 날 부르는 수철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임청 헌터 오셨습니다!!”
“청이? …어! 갈게!!”
***
[미국, 인도에 이어 두 번째로 탑 제거 성공. 이번엔 눈동자?]
[발자국에 이어 눈 까지, 탑이 해금된 자리에 남은 족적들, 그것들의 의미는?]
[제주 탑, 몬스터 이상 현상 심해져……. 고층부 전면 통제.]
[제주 탑의 몬스터 이상. ‘플릭’된 탑에서 모두 발견되었다.]
[잡담] 헌협 뭐함? 우리는 언제 들어감? (6)
[잡담] 제주 던전 고층부 통제중이라는데 몇층까지 통제야? (4)
[잡담] 남산이라도 재진입 할 수 있었음 좋겠다……. 퀘스트 막힌지 열흘째임.
[잡담] 좆됨
좆됐다 일본 제물 구해서 들어갔대
댓글(197)
-???????
-일본 들어갔다고?
-ㅆㅂ 헌협 진심 뭐하냐
-뉴스 안떴는데? 증거좀
└ ㄱㅆ/곧 속보뜰거임 지인이 그쪽에서 일해서 먼저 연락 받았어
.
.
- 인증ㅇ ㅓㅄ으면 안믿음 ㅅㄱ
└ ㄱㅆ/ㅇㅇ
[(속보) 日, 플릭 후 탑 재진입. 6 번째.]
[日, 야마토 헌터 조합장 기자회견에서 보름 안에 탑을 해금하겠다 선언.]
[잡담] 아 ㅆㅂ (0)
[잡담] 플릭은 제일 처음 해놓고 등신들 (1)
[잡담] 이젠 천랑한테도 정떨어짐 길드 싸움에 우리만 피해보잖아 (32)
[잡담] 일단 강의진 데리고 들어가면 안됨? (22)
[잡담] 무능력 갑 황경식 (18)
[잡담] 황경식 사퇴해 (5)
[잡담] 황경식이 누구야? (2)
[잡담] ‘황경식 = 현터 협회 회장’임 물타기 몇분째냐 검색 좀 해 ㅅㅂ (11)
***
“지금까진 어쩔 수 없었대도 앞으로는 이런 류로 챙겨 먹어. 주문 제작 어려우면 상달그라스 열매…. 아 이거 비싸지, 여하튼 레드베리 계열 주로 사용한다는 포션 메이커한테 가라고.”
“지금까지 아무거나 먹었는데……. 정말 감사해요. 의진 님!”
“뭘. 그럼 구경하다 가.”
강의진 앞에 서 있던 여자가 한 발 뒤로 물러나자마자 수 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로 달려갔다.
“의진 님. 싸인 좀 해 주세요.”
“사진 찍어도 돼요?”
“의진 님! 이거 받아 주세요. 선물…….”
“어어, 잠깐만. 응. 찍어. 어? 너는…. 저번 주에 오고 또 왔네?”
“헐! 네 맞아요. 이번이 두 번짼데, 저번에 왔던 거 기억하세요?”
“응. 저번엔 여자친구랑 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냥 기억이 나.”
강의진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 모두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한없이 밝은 공방의 한구석, 홀로 서 있던 한 남자가 강의진을 빤히 바라봤다. 아까부터 틈을 찾는 중이었지만 도통 자리가 나질 않았다.
“으하하하! 맞아! 고마워!”
“형님! 멋있으십니다!”
“의진 님! 저희도 그거 보여 주시면 안 되나요? 저번 달에…….”
키도 크고 잘생긴 데다 포션 마스터이기까지 하다니!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금수저 특유의 시원한 웃음에 괜히 배알이 꼴린 남자가 주먹을 꾹 쥐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카메라의 녹음 버튼을 꾹 누르고 입을 열었다.
“…가, 강의진!”
“우하하하!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응. 나 그거 좋아해.”
“가, 가강의진!! 솔직히 대답…….”
목소리를 높여 불렀지만 배를 부여잡고 웃는 강의진은 제 목소리를 못 들은 듯했다. 일부러 무시한 것도 아니지만 괜히 느껴지는 굴욕감에 오기가 생겨 카메라를 들고 한 발 나가려는 순간, 어깨가 잡혔다.
“강의진! 뭐 물어볼 게… 있……. 누, 누구세요?”
민머리의 덩치 큰 헌터가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남자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이제 보니 제 주위 손님들의 눈빛이 모두 싸늘하게 가라앉아 변해 있었다.
“뭐야?”
“혹시 그거 아니야? 헌폴…….”
“아이 씨…….”
무기라도 꺼내려는지 금방이라도 허공을 움켜쥐는 손님도 있었고 누군가는 살기까지 띠고 있었다. 남자가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가리듯 숨기는데 대화를 끝낸 의진이 후다닥 달려왔다.
“누가 나 불렀어?”
강의진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손님들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아니요? 그런 일 없었어요.”
“저희야 다 의진 님 보려 온 건데 마음의 소리라도 들으셨나 봐요. 후후.”
“하하하!”
남자는 어느샌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공방 문 앞까지 밀려 나온 상태였다. 안경 쓴 작은 남자가 조용히 다가와 문을 열어 줬다.
“나가는 문은 이쪽입니다.”
“나, 나는……!”
“나가주세요.”
남자가 당황해 안쪽을 바라봤다. 공방 내부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
「O4, 긴급 기자회견. 제물의 정체 전격 공개. 한국의 제물 언급.」
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제로가 흥미로운 웃음을 흘렸다. 뉴스 화면에 굵은 글씨로 대서특필된 헤드라인에 안경 뒤의 눈이 번뜩였다.
[탑을 보유한 11개국 중 탑을 없애는 건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4개국이 모여 회담을 열었습니다. O4 회담에서는 탑을 그대로 두어야 하는 이유 11가지 중 가장 첫 번째로 Human sacrifice, 인신 공양을 주장했는데요. 이때 예시로 든 것이 충격적입니다. 바로 한국의 제물이 다름 아닌 포션 마스터 강의진이라고…….]
“이젠 피할 곳이 없네요. 사장님…….”
제로가 몸을 길게 늘이며 기지개를 폈다. 때마침 휴대폰에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