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78.
공방 앞에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웬 놈들의 뻘짓으로 내가 성좌라는 소문이 동네방네 퍼졌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여기까지 들이닥치다니.
엘프목이 공방으로의 진입을 막고 있긴 했지만 소음이 새어 들어올 정도로 바깥 소란이 거셌다.
[강의…은 숨지 말고 지금 당장 ……을 밝혀라!]
“밝혀라! 밝혀라!”
확성기의 소음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사안이 시급해 그런지 평소와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사다리에 올라탄 기자들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쥐고 보호막에 바짝 붙어 있었고 공방 위로는 드론이 날아다녔다.
「제주 탑 소탕 관련 진상규명 촉구 1차 시위」
「탑은 국민의 것이다」
「대형 길드끼리 결탁해 탑 갈라먹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녹스의 개새끼 강의진은 당장 진실을 밝혀라.」
“녹스는 씨발……. 나온 지가 언젠데.”
격정적인 사람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현수막을 읽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나온 승연이가 나를 보더니 후다닥 창가로 달려왔다.
“의진 님! 일단 예약자들은 모두 취소 연락을 돌렸습니다.”
“수고했어. 다들 뭐라고 안 해?”
“이미 소문이 다 나서,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몇 분 빼고는 모두 이해해 주셨어요.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계신, 아…….”
가까이 다가온 승연이 내가 밖의 행렬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말끝을 흐렸다.
“……계속 보고 계셨나요?”
“응. 이런 건 처음이라.”
이런 일이 있을 때면 항상 태제헌이나 녹스가 주인공이었는데. 내 이름이 들리고 내 이름이 써진 현수막이 보이니 그건 또 신기했다. 저놈들 때문에 손님들이 못 오게 되었으니 화가 나야 맞는 일인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편에서는 후련함이 느껴졌다.
복잡한 기분에 바깥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뭐라 해석한 건지 승연이 속상한 얼굴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저런 거 보지 마세요. 다들 곧 도착한다고 하시니 저희 내려가서 기다려요.”
창 너머로 보이는 인파를 한 번 더 돌아보다 이끄는 힘을 따라 발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방 뒷문이 열리며 청이와 제로가 들어왔다.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백다인과 윤하얀도 내부로 뛰어 들어왔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지독할까.”
“너무 폭력적이에요! 막말로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청아, 제로. 누나들.”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가자 넷이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의진 님.”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청이가 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야 뭐. 멀쩡하지.”
***
일반인들은 공방 주위를 둘러싼 시위대를 뚫기 어려운 탓에 수철이나 진명이, 꼬맹이들은 엘프목이 막지 않음에도 공방에 들어올 수 없었다.
[……몸 조심하고요. 형. 밖엔 신경 쓰지 마요.]
“알았다-. 너는 그쪽 시위 진압이나 잘해. 다음에 보자.”
성산하부터 시작해 임단, 송아 누나, 한서진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전화를 겨우 끊고는 블라인드를 내린 로비로 돌아가자 언제 온 건지 이초가 나를 반겼다.
성산하에게서 이초가 올 거란 말을 미리 들었기에 인사하며 자리에 앉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의진 님. 한동안은 공방 문을 닫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싫어.”
고민도 않고 답하자 이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이틀 만에 사그라들 분위기가 아닙니다.”
“다시 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또 문을 닫는다면…….”
“의진 님. 사람들의 불만은 이제 시작입니다. 탑을 파괴하지 않길 원하는 O4는 자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의진 님을 걸고넘어질 겁니다. O4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탑 진입을 서두를 거고요. 그럴수록 우리나라 국민과 헌터들은 더 초조해 분개하겠죠. 중심에 있는 의진 님이 그 분노를 모두 받아 내게 될 거란 말입니다.”
이초의 말에 불만스레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공방 앞의 시위가 계속된다면 욕만 처먹고 손님도 들어오지 못할 게 뻔해 문을 여는 의미가 없겠지. 하지만, 하지만…! 씨이…….
‘독 풀면 안 되겠지? 아니면 루트도 있겠다, 던전 브레이크인 척 몬스터 풀어서 싹 쓸어 버리면…….’
태제헌이나 할 법한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고 있자 다들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이초 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랑 하얀 언니가 공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무섭게 달려들던데, 굉장히 난폭해요.”
“누군지도 모르는 저한테도 저 지라…. 난리를 피우는데 의진 님께는 얼마나 더하겠어요.”
“…….”
“후후후. 공방을 열더라도 앞으로는 손님을 보기 힘들어질 겁니다.”
“그건 무슨 소리야?”
퍼뜩 고개를 들어 묻자 제로가 한 화면을 보여 줬다. 헌터 간 거래·경매로 유명한 트러플마켓의 거래창이었다.
「(진행 중) 강ㅇㅈ 공방 프리패스권 구해요.」
「(진행 중) k으ㅣ진 공방 티켓팅 용병 구해요!! 사례금 아이템으로 드려요」
「(마감) 오늘 자 ㄱㅇㅈ 공방 입장권 팝니다. 선제시해주세요」
“이게 다 뭐야? 내 공방 입장권을 왜 여기서 사?”
정말 의아하게 묻자 제로가 친절하게도 웃으며 말해 줬다.
“네. 암표입니다. 앞으론 온갖 더러운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공방에 들어오기 위해 티켓팅에 참여할 거란 말입니다. 걸러 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가요. 그뿐 아닙니다. 일반적인 손님들에게도 표를 양도하라 속삭이겠지요. 겨우 백만 원만 줘도 팔겠다는 사람이 속출할걸요?”
“하지만 우리 공방은 입장권 가격을 받지 않고 있잖아!!”
“그러니까 더 좋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개념 재테크 수단이 될 텐데.”
“본인인증도 철저히 받고 있어! 그렇지 승연아?”
‘손님’을 의미를 더럽히는 제로의 말을 인정하기가 싫어 승연이를 돌아보며 묻자 승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맞습니다! 양도도 불가하게 철저히 사이트에서 본인 확인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들었지?”
“흐음, 과연 그럴까요?”
우리의 항변에도 제로는 수상한 웃음으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후후후……. 거리는 소리에 울컥 화가 치미는데 여태껏 가만히 있던 청이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로의 말이 맞습니다. 입장권을 양도받을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사장님의 포션도 물량이 일정하게 풀리는 추세고 공방에 오더라도 살 수 있는 양에 제한이 있어 성행하지 않았지만 밖의 사람들은 포션이 목적이 아니니 어떻게 해서든 의진 님을 보려고 할 겁니다.”
“그런…….”
“이런, 제 말은 믿지 않으시다니 임청 헌터의 말은 바로 수긍하시는 겁니까? 이것 참 서운한데요.”
제로의 말은 한 귀로 흘린 채 이초를 바라봤다. 저도 속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방법이 없다는 걸 확인 사살 받는 느낌이라 더욱 짜증 났다.
“그럼……. 공방 문을 열어도 손님은 못 오겠네.”
“……죄송합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만 홀짝거리는데 이초가 백다인과 윤하얀을 슬쩍 바라보더니 말했다.
“전 세계의 탑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산하 님도 그렇고, 마침 저희도 탑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던 차라 그냥 지나갈 수 없었거든요.”
“그럼 O5가 되는 건가요?”
승연이의 물음에 이초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진실을 알아내는 게 먼저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만 거부할 뿐, O4 내에서도 탑의 존치에 관해선 서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합류해 봤자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 뿐이라…. 저희는 독자적으로 움직일 계획입니다. 물론 뜻이 맞는 몇몇이 함께 해 주고 있어 다행이지만요.”
내가 성좌라는 게 밝혀진 이상 공방과 탑은 공존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싫은 약을 삼킨 것처럼 속이 썼다.
“알겠어. 그럼 우리 공방은……. 장기 휴업에 들어간다.”
옆에서 승연이가 내 손을 잡아 줬다. 손등을 감싼 작은 손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
“생각 잘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또 제안드릴 것이 있는데 혹시 거처를 옮기는 건 어떠십니까? 산하 님께서 될 수 있으면 자택으로 모셔 오라고……. 공방 주위는 계속 저렇게 시끄러울 텐데 문을 열지 않는다면 굳이 여기 머무를 필요도 없잖습니까.”
이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 공방이야. 내가 어딜 가.”
“의진 님…….”
“뭐, 그리고 공방 문은 안 열어도 따로 연구할 게 산더미야. 포션 연구하기엔 내 공방이 가장 편해.”
“엘프목이 어디까지 막아 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걱정 마. 쟤 벌크업했어. 게다가 제로랑 청이도 있는걸.”
둘을 고갯짓하며 말하자 제로가 화들짝 놀란 체하며 본인을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응. 네가 나서서 막아야지. 용병이잖아.”
“와우. 참신한 발상인데요. 저도 휴가 기간 동안 어디로 여행을 갈까 머릿속으로 행복한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요.”
“지금 공방과 사장이 위험에 처했는데 어딜 놀러 가냐? 가 봤자 탑이나 사이비나 만나겠지.”
“폐업이라기에.”
“폐업이라니! 장기 휴업이야!!”
“사장님이 그렇게 간절하게 저를 찾으시니 마음 약한 저는 이번에도 넘어가 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후후후.”
제로의 능청스러운 말투에 모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조금은 풀어진 분위기에 이초 역시 부드러워진 얼굴로 가방을 들며 말했다.
“탑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대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걸 다행이라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의진 님께 모든 관심이 쏠린 탓에 하말의 정체에 대해선 아직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말에 관한 걱정은 조금 덜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밖의 소란이나 언론들도 최대한 막아 볼 테니……. 의진 님, 건강히 버티세요.”
“응. 오늘 고마워.”
이초가 공방을 나갔다. 정문에서부터 길을 뚫는 천랑 헌터들의 엄호를 받으며 순식간에 사라진 이초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손에 쥐고 있던 푯말을 문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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