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80.
눈앞의 종잇조각을 노려봤다. 존나 수상하기 짝이 없는 쪽지다.
뒷장의 글자는 던전 달맞이꽃의 줄기에서 나는 즙으로 써진 것인데, 달빛에 정확히 비춰야 은은하게 빛나는 글자가 드러났다. 재료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읽지 못하는 아주 간단한 속임수였다. 물론 포션 마스터인 나는 보자마자 간파했지만!
‘내일 밤 9시, 같은 자리에서’라고? 흥. 웃기시네. 누가 나갈 줄 알고?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
“……젠장.”
지금 이곳에 나와 앉은 것은 반쯤은 충동적이었다. 원래 그딴 수상한 쪽지에는 절대 응하지 않아야 했지만…… 손에 쥔 포션 병을 만지작거렸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오늘따라 하늘은 달빛 하나 없이 흐려서 어둡기만 하다. 담벼락에 기대앉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날 부른 게 누굴까.’
오늘도 뉴스와 공방 앞 거리는 난리가 났다. 심지어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인신 공양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내 팬들까지 모여 맞불 집회가 열려 큰 싸움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공방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저리가 났다.
제물로 바쳐라, 바치면 안 된다. 탑을 없애라, 없애면 안 된다.
나는 태풍의 눈이면서도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대체 탑이 뭔지, 성좌의 정체가 뭘지. 없애야 하는 건지 보호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밖에선 날 두고 왈가왈부 말만 존나 많았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상황이 짜증 나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니 뭐라 속 시원히 말하지도 못한다는 게 답답했다. 그래서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쪽지를.
원래 같으면 지금 이 시간에도 공방 주위를 둘러싸고 집회가 열려야 하는데 오늘은 폭력 사건이 일어나 그런지 시위대가 일찍 해산했다. 아직 정문엔 극성인 몇 명이 남아 난리를 피우고 있었지만 뒷문은 깨끗했다.
‘이것도 미리 예상하고 있던 건가?’
정확히 아홉 시가 되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리 엘프목의 범위를 조정해 뒀지만 조금 부족했던지 기척이 약했다. 결국 옆의 화단을 밟고 올라가 담벼락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마자 보이는 세 개의 검은 로브에 욕이 절로 나왔다.
“아, 씨발. 사이비잖아.”
혹시나 하긴 했지만 아니길 바랐는데. 한숨을 푹 쉬며 손에 들고 있던 포션 병을 아래로 던져 버리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피해! 공격이다!!”
“큭, 이미 늦었어!”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 뒤로 심하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약해지는 소리를 가늠하며 언제 기절할지 초를 셌다.
쓰러지면 그대로 납치해서 천랑 쪽으로 보내 버려야지. 아직 잘 시간도 아니니까, 어디 보자…….
“켈록켈록, ……진!”
“크윽! 널 도우러 왔다. 우리 말을 들어!!”
듣겠냐…….
귀를 후비적대며 포션을 하나 더 던질까 고민하는데 뒤에서 다급히 들려온 목소리에 멈칫했다.
“하말을 살리게 도와주겠다!”
“너는 몰라도, 하말은!! 콜록…, 사람들이 양까지 도우려 할 것 같아?”
담벼락 밖을 내다보자 어느새 로브가 벗겨진 사이비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미 한 명은 잠들었고, 나머지 둘도 이대로 두면 조만간이었다.
고민하다 인벤토리에서 해독 포션을 꺼내 아래로 던졌다.
“……빨리 먹지 않으면 중독돼서 한 달은 스킬도 사용 못할걸”
내 말에 놈들이 허겁지겁 포션을 주워 먹었다. 그 꼴을 한심하게 내려다봤다.
‘셋이나 되니까 천랑과 센터에 사이좋게 나눠 줬으면 좋아했을 텐데.’
아무래도 아쉬웠다.
사이비 놈들이 로브를 벗은 맨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인데 모두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들이었다. 한 명이 쓰러진 사이비 입에 포션을 흘려 넣는 사이 다른 한 놈에게 물었다.
“구름이를 어떻게 살릴 수 있다는 건데.”
“…….”
“독 퍼지기 전에 빨리 대답해.”
입을 다물고 노려보던 놈이 독이란 소리에 놀라 소리쳤다.
“독이라니, 무슨 소리야!! 해독제를 준 것 아니었나?”
“독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말이야.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걸 왜 치료해 줘야 하는데?”
“이런 비겁한……!”
“웃기시네. 누가 누구보고 비겁하대.”
콧방귀 뀌며 비웃었다. 듣고 보니 웃기잖아? 제주 던전에서부터 짭의진까지 지금까지 내 뒤통수를 몇 번이나 쳐 놓고 비겁? 비이이겁?
생각할수록 열이 받아 대화고 뭐고 일단 기절시키고 시작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심문이라면 한서진이 잘한다던데…….
서서히 굳는 표정을 알아챘는지 다른 놈이 일어나 다가왔다.
“진정하세요. 저희는 의진 님을 돕고 싶어 온 겁니다.”
“사이비 주제에 무슨 개소리야.”
“저흰 사이비가 아니라 폰투스 교단의 사도들입니다.”
“폰… 뭐? 사이비 맞네.”
“…….”
놈이 짓고 있던 인자한 웃음에 금이 갔다.
“저는 폰투스 교단의 사도, 이 구역의 부지부장 알렌입니다. 탑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진 님은 탑을 없애고 싶으시지 않으신가요.”
“너희 짓들이잖아.”
“오해가 있네요. 저희 폰투스 교단 역시 탑을 없애는 것이 목적입니다.”
“뭐라고?”
“저희가 ‘그분’을 섬기는 것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선의 다름일 뿐. 저희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더-나은-세상을 바라는 것은 같습니다.”
“글쎄……. 너희가 탑을 없애길 원한다고 하니까 나는 갑자기 O4에 연락하고 싶어지는데.”
“그럼 의진 님의 안전만큼은 한동안 보장받으실 수 있겠죠.”
감히 구름이를 두고 협박하는 것을 알아채 표정을 구겼다.
“O4는 탑의 본질에 대한 이해도 없이 오직 인신 공양만을 반대합니다. 하하…. 멍청하기 짝이 없죠. 과연 O4가 하말의 정체가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보호하려 할까요?”
“탑의 본질이 뭔데.”
내 말에 알렌이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웃는 채로 나를 올려다보던 놈이 부드럽지만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너머 어딘가를 보는 듯한 눈빛이 미친 사이코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일반인들은 그분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헛소리로 현혹하려고 하지 마. 나도 탑에 가 봤어, 그리고 그 좆같은 촉수 괴물도 봤고.”
알렌은 여전히 미친 사이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뒤의 여자가 분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것을 발견했다.
‘어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분이 누군데.”
“의진 님은 그분의 뜻을 이해하실 수 없습니다.”
“그 새끼가 탑을 없애래? 왜?”
“그분께 감히 그딴 언행을!!”
여자가 울컥해 일어났지만 알렌이 손을 들자 분에 찬 표정을 하고도 한 발 뒤로 물러나 복종했다.
“탑은 없어져야만 합니다.”
“왜?”
“더-나은-세상을 위해서.”
“더 나은 세상이 뭔데.”
“탑이 없어진 세상이요.”
“……발. 똑같은 소리 반복하기는. 그럼 폰투스 교단이 섬기는 것…. 신이야, 사람이야?”
“의진 님은 그분의 뜻을 이해하실 수 없습니다.”
뭔가 더 떠보고 싶었으나 알렌은 틈을 내어 주지 않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결국 포기한 채 한숨을 뱉었다.
“이러나저러나 똑같잖아. 탑을 없애더라도 구름이는…….”
“바로 그것 때문에 저희가 찾아온 겁니다. 저희 폰투스 교단은 의진 님께 다른 길을 알려 드리려 합니다.”
“다른 길이라니.”
“의진 님이 하말을 대신해 제주 탑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구름이를 대신해서 내가?”
지금까지 폰투스 놈들이 뱉은 말치고 그나마 쓸 만한 말이다. 하지만 저게 믿어도 되는 말이냐는 거지. 존나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알렌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의진 님의 영혼을 남산 탑의 제물로, 육신을 제주 탑의 제물로 바치면 됩니다. 다른 성좌들은 할 수 없는, 의진 님께서 다름 아닌 쌍아궁의 대응자라 가능한 일이죠.”
“제물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모든 것을 바쳐 저 재앙의 쇠 말뚝을 소멸시켜야 하는 일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버틸 수 있을 리 없죠.”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 확언해 말을 뱉자 그 무게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죽어야 한단 소리네……?”
“카스토르를 타고 난 의진 님의 운명입니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멍했다. 내가 들어와 있는 공방도, 담벼락 바깥의 로브를 뒤집어쓴 사이비 녀석들도.
나를 바라보는 알렌의 눈이 일렁거렸다. 머리가 어지러워 흠칫 고개를 털어 냈다. 놈들을 더 마주하기 힘들었다.
“일단…, 일단 알겠어. 남산 탑에 대해선 내가 나중에…….”
“저희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싫어. 내가 뭘 믿고 너희랑 몇 주를 함께 해?”
“며칠이면 됩니다. 의진 님께 길이 열릴 겁니다.”
길이 열릴 거라니,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해석하는데 알렌이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하말을 대신해 의진 님을 둘로 나누는 일은 저희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결국 하말과 카스토르 모두 제물로 바치게 되겠지만 저희와 함께라면 의진 님만 희생하시면 됩니다.”
“……나만이라고?”
“네. 의진 님만 죽으시면 됩니다. 어려울 것 없지 않습니까? 특히 의진 님이라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한 번 해 보신 적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이요.”
그걸 어떻게…….
일렌의 말에 놀라 몸을 굳혔다. 놈을 노려보다 물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굳이 나를 도와줄 필요도 없지 않아? 왜 굳이 하말을 구하면서까지 나를 도우려고 하는 거야?”
“그분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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