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파업 선언-185화 (185/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85.

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텁게 쌓인 눈에 푹푹 발이 빠졌지만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애먹을 덩치들은 아니라 큰 문제는 없었다. 그보다 발목을 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처음 와 보는 남산 던전. 탑의 힘에 의해 변화했을 재료들에 눈길이 가는 건 당연했다.

“미친! 이거 겨우살이의 꽃이잖아!”

“…….”

“자자잠깐만. 저거 설마 얼음늑대야? 발톱이 얼음이라 녹는다고! 신기하지 않아? 잠깐만 보다 갈까?”

“…….”

“눈듭새 군락지다!!”

“…….”

시선을 빼앗긴 모습에 성산하가 피식 웃으며 턱짓했다.

“그렇게 원하면 채집하지 그래.”

“…아니, 뭐.”

“왜, 이번에도 인벤토리가 부족해?”

당장이라도 제 인벤토리를 뒤지려는 성산하의 손을 잡아 내렸다.

알렌 무리를 습격했으니 폰투스 놈들에게도 얘기가 들어갔을 게 뻔했고 아직 펜던트의 사용법도 알지 못했다. 혹시 추격이라도 붙는다면……. 지금 태평히 재료 따위나 채집할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 나는 무력화 포션을 마셔서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거다. 괜히 채집하려다가 성좌 지도에 뜨기라도 하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내 스킬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꽤 걸려. 너무 지체될 거야.”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이 있길 바라며 애써 식물로 향하는 눈을 뗐다.

“나중에 기회 있겠지. 다른 놈들이 채집한 거 사도 되는 거고.”

“…의진이 다 컸네.”

“지랄. 빨리 앞장서기나 해.”

재수 없는 얼굴에 눈덩이를 던지며 소리쳤다.

***

“대체 어떻게 여는 거야?”

장갑을 꼈는데도 펜던트를 만지며 걷다 보니 손이 얼었다. 손이 곱아들 때면 망토 안에 넣어 잠시 녹이긴 했지만 오랜 시간 바람을 맞아 그런가 냉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손끝의 감각이 사라져 펜던트의 문양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라 짜증스럽게 투덜대는데 빨개진 손목을 본 성산하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안 되겠어. 잠깐 쉬었다 가자.”

“여기서?”

쉴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던전 초입이라 워낙 사람이 많아 조금 안락하다 싶은 곳들엔 어김없이 헌터들이 자리를 잡고 쉬는 중이었다.

성산하나 나나 정체를 들켜 좋을 게 없었기에 지금까지 모두 피했었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설원뿐이라 바람으로부터 몸을 숨길 만한 나무나 동굴도 없었다.

긴 로드 끝으로 땅을 푹푹 찔러 보는 성산하의 뒤를 서둘러 뒤쫓았다.

“야! 여기 쉴 곳도 없어! 너 힘들어서 그래? 차라리 다음 층까지 가서…….”

그때 성산하가 로드를 찔러 넣은 땅이 푹 꺼졌다. 놀란 눈으로 다가가자 둥그런 구멍 안쪽에 사선으로 굴이 나 있었다. 그를 보다 혹시나 하며 물었다.

“……스킬이야?”

“뭐? 스킬이라니. 하하하, 다른 헌터들이 사용한 굴이야. 눈이 쌓여 입구가 가려졌던 거지.”

“아아, 난 또. 별 해괴한 스킬이 다 있네 했지.”

“잠깐 몸 녹일 정도는 될 거야. 들어가자.”

성산하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가려다 금세 또 사라진 루트를 찾아 뒤를 돌아봤다. 루트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홱 고개를 돌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받아먹고 있었다.

“저 바보 개가……. 추우면 알아서 들어오겠지.”

몸을 숙여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 경사진 곳을 따라 내려가자 둥그런 공간이 나왔다. 사람 다섯은 충분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막상 굴 안으로 들어오자 사방이 눈인데도 춥지 않았다. 벽과 천장에 다져진 눈은 얼음처럼 단단해 쉽게 무너질 것 같지도 않았다.

“안 춥잖아?”

신기하게 중얼거리자 성산하가 웃으며 이리 오라는 듯 제 옆을 툭툭 쳤다. 바닥에 깔린 간이 이불이며 한쪽에 놓인 랜턴까지. 수상한 눈으로 놈을 바라봤다.

“넌 대체 인벤토리를 몇 칸이나 갖고 있는 거야?”

“세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걸.”

“그걸 왜 몰라? 기본 세 칸 아니야? 거기에 장비랑 아이템이더라도…….”

“세 칸? 아아. 그게 보편적이라고는 하더군.”

자기는 아니란 소리였다. 재수 없는 놈.

나도 원래는 재료에 한해선 인벤토리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았었다. S급 이공간 스킬이 있어 거기에 모두 처넣으면 됐으니까. 하지만 ‘선산의 주인’은 아직 되찾지 못했다. 그것만 있었어도!!

아쉬움에 한숨을 뱉었다. 이불 끝자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성산하가 내 팔을 잡아 제 망토 안으로 끌어당겼다. 처음엔 뿌리치려 했지만 성산하에게 느껴지는 온기가 마음에 들어 꿈지럭대며 더 파고들자 웃는지 잔떨림이 느껴졌다.

어떻게 다음 층까지 갈 생각을 했는지, 막상 자리를 잡고 쉬기 시작하자 한기와 피로감이 한 번에 몰려왔다. 시간으로 따져도 새벽이니 피곤할 만도 했다.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는데 성산하가 내 손을 가져가 만져 댔다. 장갑을 벗기는 손길을 귀찮게 바라봤다.

“뭐 하는데…….”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동상 걸렸잖아.”

“그래…? 아프진 않은데.”

“통각까지 얼어붙은 거야.”

성산하의 말을 듣고 보니 손끝이 시퍼런 게 이상하긴 했다. 꼭 저주 걸린 성산하 같아진 손가락 끝을 꼼지락대며 생각했다.

‘동상이면 포션을 먹어야…….’

인벤토리를 열기 위해 잡힌 손목을 빼내려 꿈틀대는데 따스한 온기가 손을 감쌌다. 동시에 굴을 밝히는 환한 빛에 잠이 확 깨 성산하를 돌아봤다.

“너……!”

“내 힐을 받고도 화내는 건 너밖에 없다니까.”

“네가 잡고 있지만 않았어도 이미 포션 먹고도 남았을 시간이라고.”

씩씩대며 손을 빼려는데 성산하가 그대로 팔을 잡아 제 몸을 두르게 했다. 졸지에 놈을 껴안은 꼴이 된 내 귓가에 성산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좀 봐줘. 나 추워.”

“뭐, 뭐?”

‘사나 추워’라고 들린 목소리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곧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코앞에 놓인 성산하의 얼굴에 한 번 더 정신이 나가는 느낌이었다.

훌쩍 가까워진 놈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가만히 응시하던 성산하의 붉은 입술이 살며시 호선을 그렸다.

“추워. 의진아.”

“포… 포, 션 있는데. ……줄까?”

“그거 말고. 그냥 이렇게 안고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어느새 내 허리를 감싼 팔이 느릿하게 몸을 끌어당겼다. 불편해 몸을 꿈틀대자 아예 안은 채 누워 버린 성산하는 내 옆에 바짝 붙어 만족스러운 한숨을 뱉었다.

“응…. 이거면 돼.”

바람 부는 바깥과 격리되어 유독 더 조용하게 느껴져서인지, 아니면 영하의 냉기에 무뎌진 감각이 성산하와 닿아 있을 때만 살아나서인지 몰라도 꼭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유는 몰랐다. 머리로는 성산하를 밀어 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른한 몸은 이 온기에서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성산하의 품에 안긴 채 시간을 한참 흘려보내 떨어질 타이밍을 놓쳐 버려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머리를 만지는 손길에 다시 일어났을 때 동시에 깨 있던 성산하와 눈이 마주쳤다.

“깊게 못 자네.”

“……집이 아니니까. 넌 좀 잤냐?”

“응. 덕분에.”

선잠이긴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긴 하품을 하는데 그걸 보고 웃던 성산하가 말했다.

“이러니까 꼭 예전 생각난다. 그렇지? 둘이서 대청호 던전에 갔을 때 말이야. 기억나?”

“당연히 기억하지. 너 죽을 뻔했는데 내가 살려 줬잖아.”

“기억 미화를 그런 식으로 시키는군.”

겨우 몇 달 전인데도 한참 지난 거처럼 느껴졌다. 그때 추억에 기억을 더듬는데 머리를 쓰다듬던 성산하가 가만히 물었다.

“성좌 지도는 어떻게 한 거야? 아직까지도 네가 공방에 있다고 보이는데.”

“아아. 그거…….”

잠깐 고민하다 말 못할 것도 없지 싶어 입을 열었다.

“무력화 포션 먹었어.”

“미쳤군.”

곧바로 튀어나오는 반응에 킥킥 웃었다. 무력화 포션은 그만큼 헌터들이 좆같아하는 최악의 포션 중 하나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어. 그래도 성공했잖아?”

“아무리 네가 만든 거라도 성좌의 힘까지 무력화시키다니…….”

“너한테 먹일까 봐 무섭냐? 걱정 마. 급하게 만드느라 제한이 존나 강해. 조건 중 하나가 무려 공복 10시간을 유지하는 거라고.”

혀를 내두르며 말하자 성산하의 미간에 파인 골이 더 깊어졌다. 안심하라고 한 말인데 외려 더 심각해진 표정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성산하가 물었다.

“……그럼 너 지금도 설마?”

꼬르르륵.

때마침 울리는 배꼽시계에 급히 배를 부여잡았다.

“미친! 잊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으윽 배고파!!”

***

성산하가 급히 차려 준 던전용 식량으로 배를 채운 뒤 벽에 기대앉아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다 놀았는지 어느새 들어온 루트는 성산하와 멀리 떨어진 곳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뭘 열어야 하나? 아니면 특수한 스킬이 필요한 건가…….’

정교한 흑철로 만들어진 펜던트. 곳곳에 붉게 빛나는 작은 보석들. 그를 유심히 보는데 곁에 있던 성산하가 물었다.

“놈들이 뭐라고 했었지?”

“폰투스 교단의 증표와 성좌의 힘이 합쳐져 길이 열린다고 했어. 그런데 왜 안 열리냐고. 나도 있고 펜던트도 있잖아.”

내 말에 성산하가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성좌의 힘이 필요하다면……. 강의진!”

“어?”

“너 지금 무력화 포션 마셨잖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이 떡 벌어진 채로 펜던트를 내려다봤다.

“미, 미친!! 맞아! 지금 성좌까지 무력화 시켰지!!”

“포션 효능 얼마나 남았어?”

서둘러 상태창에 들어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겨우 삼십 분 남아 있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8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