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86.
“…삼십 분 남았어.”
“삼십 분 후면 성좌 지도에도 나타나겠군.”
어느새 눈발이 잦아든 바깥을 살피던 나는 성산하의 말에 멈칫했다.
성좌 지도라……. 지도에 나타나게 된다면 현재 내가 남산 탑에 와 있다는 것을 다른 S급들도 알게 될 거다. 아마 폰투스 교단 놈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지겠지. 아니, 어쩌면 서설원 그 새끼가 또 냅다 뉴스에 출연해서 ‘강의진이 남산 탑으로 튀었다’ 하며 인터뷰 할 수도 있고.
까득 손톱을 무는데 뒤에서 뻗어진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이리 와.”
나를 돌려 앉힌 성산하가 손을 잡아 올려 장갑을 끼우며 말했다.
“그럼 이제 들어 볼까. 대체 우리 포션 마스터님의 원대한 계획이 뭔지.”
“…….”
“마지막 층에 가서 어쩔 계획이야?”
“그것도 모르면서 따라왔냐.”
내 투덜거림에도 장갑의 밴드를 묶던 성산하는 빙긋 웃기만 했다. 망토를 단단히 여미고 모자까지 씌우는 손길에 답답하다며 머리를 흔들고 말했다.
“제단을 볼 거야. 그곳에 뭔가 숨겨진 게 분명해. 그 촉수도 이상했고……. 일단은 이게 다야. 가 보면 알게 될 거라는 직감 같은 게 오는데 이것도 카스토르 때문일까?”
“정말…… 소름 돋을 정도로 무모한 계획이군.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눈썹을 찌푸리는 얼굴을 마주하다 시선을 돌렸다.
“무모하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다른 수가 없잖아.”
“그래. 퀘스트도 내팽개치고 싸우기나 하다 결국 성좌가 직접 움직이게 만든 우리 탓이지.”
모자 밑으로 삐져나온 앞머리를 만지작대던 성산하가 내 몸을 망토 채로 껴안아 제 무릎 위에 덥썩 올려놓았다. 발버둥 쳤지만 두터운 망토 탓에 꿈쩍도 하지 못했다.
“뭐 하는 거야. 놔!”
“우리 의진이. 애기 치곤 무겁고 크네.”
“썅! 너 이러려고 망토 입혔지!”
“응. 목청도 크고. 다 크네.”
부리또 혹은 멍석말이 같은 꼴이 되어 성산하 품에 안긴 채 놈을 노려봤다. 내 얼굴을 훑듯이 빤히 바라보던 성산하의 시선이 입술에 머물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왜 내게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어?”
성산하의 물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한 걸 묻는다는 생각에 외려 말문이 막힌 사이 성산하가 말을 이었다.
“기다렸어. 네가 말 할 때까지. 기회는 많았잖아.”
“그야, 그건 그냥……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해서 그랬을 뿐이야. 게다가 위험할 게 뻔하잖아.”
“위험하니까 더 부탁했어야지.”
“하지만 내 일인데, 상관없는 너까지…….”
“네 일인데, 내가 왜 상관이 없어.”
“어?”
성산하의 아름다운 얼굴에 채 숨기지 못한 서운함이 스쳤다. 처음 보는 표정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몸을 꿈틀댔다.
“네 일인데 내가 왜 상관이 없어. 의진아.”
“서, 성산하?”
“……아직 내게 아무 감정 없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가끔은 못 견디게 궁금할 때가 있어. 대체 난 너한테 뭘까.”
성산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흰 장갑을 낀 손이 볼을 쓰다듬다 천천히 목을 타고 내려갔다. 성산하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목줄이 채워져 있을 곳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첫인상이 나빴던, 목줄이나 채우고 귀찮게 구는 개자식일까? 그런데 가끔 날 보며 웃는 네 얼굴을 보면 기대가 되는걸. 어쩌면 날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고.”
“…….”
“대형 길드의 길드장이니 그럭저럭 쓸 만한, 도구로 생각한대도 기쁠 것 같은데, 정작 필요할 땐 도움도 요청하지 않고.”
“……야.”
“그것도 아니라면, 뭘까. 단순히 흥미로운 병을 가진 환자?”
내 입술을 살짝 건드리는 손을 냅다 물었다.
“읏, 뭐 하는…….”
성산하의 손에 힘이 풀린 사이 드디어 망토에서 벗어난 나는 벌떡 몸을 세운 채 성산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환자는 씨발, 장난하냐? 물론 개자식은 맞는데! 누가 아무 감정 없는 사람이랑 키스를 하냐? 또라이 새끼야!”
“강의진…….”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성산하의 멱살을 놓으며 투덜댔다.
“내가 싫었으면, 넌 키스한 다음 날 바로 고자됐어. 알아?”
“하, ……그렇지. 고자라니. 그래. 넌 그때도….”
놈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퍼져 나갔다. 고자 소리에 함박웃음을 짓는 놈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또라이 새끼. 고자가 그렇게 좋나.’
꺼림칙하게 몸을 물리려는 날 성산하가 와락 끌어안았다. 추운데도 왠지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붉어진 귀를 벅벅 털어 냈다.
“강의진.”
“…….”
“의진아.”
“뭐. 말을 해.”
“방금 했던 말, 조금만 과장 보태서 고백으로 생각해도 될까.”
“지랄하네. 아직 그 정도는 아니거든.”
웃음이 터진 성산하가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잘게 떨리는 성산하의 몸이 굉장히 뜨겁다고 생각할 무렵, 성산하가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왜 이렇게 뜨거워. 열 나는 건 아니지?”
“나? 나는 그냥 네 새끼 때문에 잠깐 열나는 것뿐……. 어? 어어?”
황급히 성산하를 밀치고 망토를 풀어 헤쳤다. 곧바로 퍼지는 열기에 성산하도 나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리 몸이 뜨거운 게 아니었다. 앞주머니에 넣어 뒀던 펜던트에서 열이 나는 거였다.
“펜던트가 갑자기……!”
“무효화 끝났는지 확인해.”
성산하의 말에 황급히 상태창을 열었다. 그 말대로 무효화 시간이 끝나 있었다.
“끝났어!”
“성좌 지도에도 네가 보여. 남산 탑에 있는 것으로.”
주머니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붉은 루비들이 요요히 빛나고 있었다.
“활성화된 건가……?”
떨리는 손으로 펜던트 중앙의 보석을 만지자마자 미친 듯이 밝은 붉은빛이 굴을 밝혔다. 천장과 벽, 바닥을 이루고 있던 눈들에 물방울이 맺히더니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나가자. 야! 루트! 일어나!!”
코까지 골며 자고 있던 루트를 깨워 일으킨 뒤 성산하와 함께 굴을 벗어났다. 좁은 공간을 벗어나자 빛은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솟아올랐다.
“……너무 눈에 띄는걸.”
“젠장, 막을 수가 없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어느새 선명해진 손바닥 위의 문양과 펜던트가 함께 공명하는 게 느껴졌다. 근방은 나무 하나 없는 평원이라 아침 일찍부터 사냥 중인 헌터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열려면 빨리 열어!!”
다른 손으로 펜던트를 퍽퍽 치며 소리치자 빛이 점점 두꺼워지더니 하늘까지 닿아 있던 길이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공기가 흔들리며 허공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설원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내다보였다. 푸른 식물이 가득한 정글이었다.
“……처음 보는 장소야. 적어도 32층 이상이겠군.”
던전에 생겨난 새로운 통로라니. 헌터들이 이런 걸 놓칠 리 없었다. 다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이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존나 무섭네. 빨리 넘어가자.”
한쪽 발을 들이며 뒤를 돌아보자 혀를 찬 성산하가 로드를 꺼내들고 있었다. 로드를 가볍게 돌리자 우리가 서 있는 곳 반경 10미터 밖으로 하얀 스파크를 튀기는 원이 그려졌다. 원이 팽창하며 선에 닿은 헌터들을 멀리 밀어 버렸다. 헌터들은 발버둥 쳤지만 속수무책으로 멀리까지 튕겨져 나갔다.
“젠장! 이건 미스틱의…….”
“치사하다! 같이 좀 가자!”
“밀지 마!! 찍고 있잖아!”
어떻게든 선을 넘으려 애를 쓰는 헌터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팽창하는 선을 피하려 점프를 하다 그대로 풍차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놈도 있었으며, 나름 쉴드를 펼쳐 보았다가 쉴드 채로 굴러가 볼링공처럼 모여 있던 헌터들을 박살 내기도 했다.
희귀한 구경에 정신 팔린 사이 성산하가 어깨를 감싸 당겼다.
“뚫고 넘어올 수 없을 거야. 가자.”
“응.”
“뭐가 있을지 모르니 내 뒤로 따라와.”
틈 너머로 보이는 다른 공간으로 성산하가 발을 들였다. 놈을 따라가려다 순간 드는 생각에 뒤를 돌아봤다. 역시나 루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헌터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루트! 야! 이리 와, 루트!!”
두 손을 붕붕 흔들며 소리쳤지만 내게 오려는 듯하던 루트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머뭇거렸다.
‘저 바보가…….’
결국 자리를 깔고 앉아 꼬리만 탁탁 치는 루트의 모습에 더 기다릴 수가 없어 틈에 한 발을 들이며 정말 간다- 하고 소리치려는데 발을 들이는 순간 몸이 안쪽으로 후욱 빨려 들어갔다.
“루-트- 나 정말로……. 어어어?”
저 멀리서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뒤돌아봤지만 나는 이미 다른 층에 온 상태였다. 몸이 아래로 훅 떨어졌다.
“으아악!!”
“의진아.”
일 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날 받은 성산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루트 새끼가 안 들어와서…….”
약간 위쪽에 걸쳐진 공간의 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틈은 점점 닫히고 있었다. 성산하 역시 점점 좁아지는 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늦은 것 같군.”
“……뭐. 돌아갈 때 챙겨 가면 돼. 어차피 고등급 몬스터라 죽을 일도 없어.”
성산하의 품에서 내려와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몇 층이지? 아오, 더워. 망토는 벗어야겠네.”
“워프부터 찾아봐야겠어.”
망토를 벗으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 등 뒤에서 우지끈하고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성산하가 나를 잡아 제 뒤로 숨겼다.
“뭐지?”
성산하는 아무 말 없이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다시 찢어지고 있는 틈이 보였다.
“뭐, 뭐야. 어떻게…….”
“월! 월월!!”
찢어진 틈에서 검은 형체 두 개가 훌쩍 뛰어내렸다. 하나는 루트고, 남은 하나는… 룬이었다.
그럼 저 뒤에서 나오고 있는 건…….
내 팔을 잡은 성산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억지로 틈을 찢고 뛰어내린 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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