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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87화 (187/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87.

“미친…….”

아무 감정 없는 차가운 시선이 나와 성산하를 차례로 훑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다 겁먹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꾹 쥐었다.

태제헌의 양옆으로는 루트와 룬이 우뚝 서 있었다. 엄한 주인 곁이라 아양은 부리지 못해도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숨길 수 없는지 루트의 꼬리가 360도 회전 중이었다. 프로펠러 같아 조금만 더 있으면 곧 추진력을 받고 날아갈 지경이었다.

‘저 개새끼가! 내가 얼마나 잘 챙겨 줬는데!’

배신감에 루트를 노려보자 태제헌이 피식 웃으며 몸을 굽혀 루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을 참 잘 듣지. 누구와는 다르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이럴 작정이었군.”

성산하의 비아냥에도 태제헌은 루트를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머리부터 몸, 발끝까지 훑고 내려간 시선이 가늘게 좁혀졌다.

“살이 빠졌네. 고생 좀 했나 보지.”

“녹스에 있을 때보단 낫거든요.”

첩자 노릇을 한 루트 덕에 내 위치는 알아냈대도, 저 틈까지 찢고 들어올 순 없었을 텐데.

태제헌이 왜, 여기까지 쫓아온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여긴 왜 왔는데요. 또라이예요?”

“널 막으러 왔지.”

“막다니, 그게 무슨…….”

“잘 즐겨 둬. 바깥 보는 일은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씨발. 진짜.”

나를 보호하듯 막아선 성산하를 본 태제헌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걱정 마. 일이 끝나는 즉시 너만 죽이고 의진이는 내가 안전히 데려갈 테니까.”

“굳이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있을까?”

저를 죽이겠다 공표하는 말을 듣고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피식 웃은 성산하의 손에는 어느새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렇잖아도 네 놈이 살아 숨 쉬는 꼴 더 이상 참고 보기 힘들었거든.”

“쯧, 명을 재촉하는군. 빨리 죽길 원한다면… 들어주지.”

마주 본 둘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룬과 루트가 성산하를 주시하며 몸을 낮췄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사이로 주위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온도마저 낮아진 느낌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예민해진 오감에 온몸의 털이 비쭉 섰다. 그리고 그때 태제헌과 성산하가 눈앞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

허공에서 섬광이 번쩍이며 뭔가가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허리춤의 포션병을 꾹 쥐었다. 혹시 성산하가 위험하다면 막아야 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게 분명한데도 둘의 모습을 눈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땅에서 이는 먼지와 스킬 이펙트들이 한데 뭉쳐 한 덩어리로 솟아올랐다. 룬과 루트도 끼어들지 못하고 나와 같은 곳만 바라보며 바닥을 긁어 댔다.

‘씨발.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여차하면 던질 생각으로 포션병을 쥐고 있긴 했으나 상황을 파악하긴커녕 놈들의 움직임도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찰나, 한 덩어리로 합쳐졌던 둘이 뿌연 먼지에서 갈라져 나왔다.

성산하는 다행히 무사했지만, 한쪽 손을 붙잡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살짝 흘러내린 장갑 아래로 검게 변한 피부가 보여 다급히 다가갔다.

“성산하!!”

“큭…….”

성좌의 힘으로 성산하를 정화시키면서 손에 드리웠던 저주의 흔적도 점점 옅어졌다. 퍼센트가 80을 넘었을 때는 손끝을 제외하고는 거의 본래 피부색을 되찾은 상태였는데!

황급히 성산하의 상태를 살폈다.

< 성산하 - 헌터 >

-속성 : 선/빛

-■■■■■■■■

-■■■■■의 저주로 인해 부패 진행중

.

.

►별의 정화(EX)

- 진행률 92.2%

정화 진행률은 전과 같았다. 그렇다면 갑자기 심해진 건 왜지? 단순히 자극받아서인가? 대체 태제헌이 뭐라고…….

흩어지는 흙먼지 사이로 태제헌의 형체가 드러났다. 옷자락을 툭툭 터는 놈의 모습은 방금 전까지 싸운 사람답지 않게 멀쩡해 보였지만 발밑에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무기가 떨어져 있었다.

“천랑의 애송이가 제법이군. 하지만 그 저주를 달고 있는 이상 결코 나를 이기지 못해.”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지 품에서 작은 약병-아마도 독일 테다-을 꺼내 처먹는 성산하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나는 태제헌의 말을 듣고 멈칫해 돌아봤다.

“왜요?”

“뭐가.”

“성산하 저주가 무슨 상관인데요.”

“그건…….”

성산하의 손을 잡은 채로 묻자 태제헌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낮게 가라앉은 눈빛을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머리 위에서 천둥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놀라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저 멀리 서쪽 하늘에 틈이 생기고 있었다. 위를 바라본 성산하가 로드를 고쳐 쥐며 중얼거렸다.

“저건 폰투스 놈들이잖아?”

“벌써 따라붙었군.”

“하지만 놈들이 어떻게? 성좌가 있어야 문을 열 수 있다고…….”

무력화 효과가 사라진 이후 성좌 지도가 다시 떠올랐을 테니 내가 남산 탑이라는 것은 들켰겠지만 설마 놈들이 마지막 층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날 보며 태제헌이 말했다.

“네가 있으니까.”

“뭐라고요?”

“네가 탑에 발을 들인 이상 탑 전체에 성좌의 힘이 흐르지. 증표를 가진 이들이 길을 여는 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아.”

“그렇다면 설마…….”

성산하의 중얼거림에 태제헌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성산하와의 전투로 흐트러진 주머니 사이로 미처 숨기지 못한 체인이 늘어져 있었다. 혀를 찬 태제헌이 체인을 숨겼지만 이미 모두가 그걸 본 이후였다. 저건 폰투스 놈들의 펜던트가 분명하다.

“대체 그걸 당신이 왜…!”

저것 때문에 틈을 찢고 들어올 수 있던 거였어! 하지만 태제헌이 폰투스 교단의 펜던트를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단순히 나처럼 사이비 놈들을 패고 빼앗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직감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맞아, 그때 제주 탑에서도……. 사이비 놈들이 태제헌에게 배신자라고 했었지.’

태제헌이 폰투스 놈들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의구심이 함께 찾아왔다.

태제헌과 같은 집에서 십여 년을 함께 산 나다. 녹스에서 그런 큰일이 벌어졌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참지 못하고 더 캐물으려는 찰나 태제헌이 말을 피했다.

“더 허비할 시간 있을까. 먼저 점거당한다면 제단을 보지도 못할 텐데.”

“……쓸데없는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강의진. 따라와.”

성산하의 경고를 뒤로하고 태제헌이 먼저 앞장서 나갔다. 하늘을 살핀 성산하가 내 손에 스크롤을 쥐여 주며 말했다.

“이거 받아.”

“뭐야?”

“이동 스크롤이야. S급이라 웬만한 상급 던전도 단숨에 빠져나갈 수 있을 테지만……. 탑은 특수한 경우이니 중간에 추락할 것도 대비하고 있어.”

“갑자기 이런 건 왜 주냐. 존나 불안하게. 그냥 같이 나가면 되잖아.”

성산하는 그저 방긋 웃더니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그런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변명하지 마. 그 혹시 모를 상황도 안 생기게 네가 더 노력하면 되잖아.”

“하하하, 그래. 변명 안 할게. 같이 나가자. 자, 약속.”

“누가 앤 줄 아나.”

투덜대면서도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성산하의 손에 손가락을 걸어 줬다. 흰 장갑과 내 손가락이 엮였다. 성산하가 손가락을 건 채 가만히 속삭였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태제헌 역시 폰투스 교단을 피해 제단까지 가려는 것은 같아. 폰투스 놈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제단을 본 이후야. 네가 뭘 계획했든지 서포트해 주려고 했지만 태제헌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마지막 층에 진입해서는 내 곁에 꼭 붙어 있어.”

“……응.”

“착하다.”

다시금 머리를 쓰다듬는 성산하의 장갑 아래로 내려온 저주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 조금이라도 더 정화할까? 일 분만, 아니 삼십 초만…….’

삼십 초면 몇 퍼센트나 정화되려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 저 멀리서 우리를 재촉하듯 달려오는 룬의 모습에 결국 말하지 못하고 발을 옮겨야 했다.

***

태제헌은 마치 길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앞으로 직진했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태제헌과 성산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귀중한 재료가 될 몬스터 사체를 남기고 가는 게 더 힘들었다.

폰투스 놈들보다 우리가 더 가까이 있었는지 다행히 놈들을 마주치기 전에 우리는 제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게 늘어진 이파리와 덩굴을 헤치며 도달한 마지막 층은 바닥에 있었다. 땅에 크게 그려진 문 형태의 그림에 지워지지 않는 형태의 문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둥글게 돌다 한쪽 구석에서 카스토르의 문양을 찾을 수 있었다.

“찾았다! 저기 카스토르의 문양이야.”

문양도 찾았으니 고민할 필요 없었다. 꼭 열쇠 구멍처럼 만들어진 구멍이 둘 있었다. 그중 하나에 손을 올리자 손 안쪽에서부터 뜨끈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바닥에 파인 모든 글자가 푸른 빛을 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왜 안 열리지?’

전체적으로 저번에 봤던 것보다 약한 마법진을 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의 구멍에 다른 쪽 손을 올리자 그제야 땅에서 폭발적인 빛이 샘솟았다. 땅이 쿵- 쿵- 하며 박동했다. 전에 겪었던 감각이다. 곁에 서 있던 성산하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친 성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듯이 바닥을 밀자 발밑이 뻥 뚫렸다.

문 위에 서 있던 나와 성산하, 태제헌과 개들 전부가 검은 파동 속으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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