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89.
“퇴로를 막아! 다른 층으로 빠져나갈 수 없게 해야 한다!”
“제단이 활성화됐다! 어차피 피할 수 없어, 놈은 그분께 맡기고 배신자를 먼저 죽여라!!”
아이템발로 아슬아슬하게 촉수를 피해 도망치고 있긴 하지만 언젠간 잡힐 거라는 걸 알았다. 포션 하나 까먹을 틈이 없었다. 결국 발이 삐끗한 순간 두꺼운 촉수가 내 허리를 휘감아 허공에 추켜올렸다. 그러곤 빠른 속도로 제단을 향해 복귀하기 시작했다.
“씨이이이바아아알-!”
촉수에 붙잡힌 꼴로 수백 미터 상공을 날아갔다. 이리저리 뻗어져 나가던 촉수들을 족치던 태제헌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봤고 루트는 월월 짖으며 나를 따라 달렸다.
성산하는 제단 근처에 있었는데 내 모습을 보곤 금방이라도 달려올 듯하다 눈을 질끈 감고 애써 참는 모양이었다. 그러곤 화풀이하듯 신도들을 펑펑 터트렸다.
나를 잡은 촉수가 제단 앞에 다다르자 중앙에서 여태까지 봤던 것보다 훨씬 두꺼운 검은 기운이 위협하듯 일렁였다. 다른 것들의 몇 배로 두터운 기둥에 유독 위쪽이 부푼 것이 꼭…….
‘씨발, 존나 좆같이 생겼네.’
점점 길이를 늘리는 그것을 보며 착잡한 한숨을 뱉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성산하가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만 참아!”
높이 든 성산하의 로드 끝이 환하게 빛났다. 그를 아래로 내리꽂자 괴생물체의 비명과 함께 촉수가 미친 듯이 꿈틀댔다. 공격에 위협을 느꼈는지 촉수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누군가 나를 강한 힘으로 밀친 듯 몸이 휘며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충격에 눈을 뜨자 어느새 나는 제단 바로 앞에 눕혀져 있었다. 검은 촉수가 내 상체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었다. 생각과는 달리 전혀 아프지 않았다. 다만 몸에 이어진 촉수에게 빠른 속도로 기운을 빼앗긴다는 것이 느껴졌다.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고 한없이 졸려졌다.
‘이거 꽤나…….’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강의진, 정신 차려!”
“의진아! 조금만, 조금만 버텨!”
하늘로 가득 찬 시야에 촉수를 공격하는 태제헌과 성산하가 스쳐 지나가며 내게 무어라 소리쳤지만 잘 와닿지 않았다. 겨우 손을 펼쳐 들자 양손에 카스토르의 문양이 미친 듯이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가슴팍에 이어진 촉수를 움켜쥐었다.
또다시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자면 안 되는데. 성산하가, 태제헌이……. 바짝 힘을 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어라?”
눈을 감았다 뜨자 나는 전혀 다른 곳에 와 있었다. 끝없이 넓게 이어진, 색색 빛깔 꽃들로 가득한 초원이었다. 고개를 들자 낮과 밤, 노을과 여명의 색을 모두 가진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온몸에는 다른 의미의 소름이 돋았다.
난 분명 남산 탑 마지막 층이었는데! 제단도, 촉수도. 성산하도 사이비 놈들도 없는 이곳에서 눈을 뜨다니.
‘내가, 내가 설마 잤나? 제물로 바쳐져 버린 건가?’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 역시 던전보다는 천국과 더 가깝지 않은가!
혼란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는 내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자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내가 보였다. 아니, 주호현이었다.
놈을 보자마자 치미는 울화에 소리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썅!! 주호현이라니. 좆 됐다.”
“…안녕.”
“죽었는데 씨발 안녕은 무슨 안녕? 아아악! 씨이바알!!”
“너 ……어.”
“으아아아아악!!”
“강의진 너 안 죽었다고!”
“으엉?”
허공을 향해 소리 지르던 내 옆에서 주호현이 버럭했다. 나도 덩달아 멍청하게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너 죽지 않았다고. 잠시 널 여기로 불러낸 거야.”
“누가? 네가?”
주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죽지 않았다니. 당황스러운 기분에 눈을 깜빡였다.
“죽은 게 아니면, 여긴 어딘데? 난 탑, 그러니까 던전에 있었는데.”
“넌 그대로야. 여기도 탑이거든, 가장 마지막 층. …여긴 탑의 주인만 들어올 수 있어.”
“탑의 주인이라면, 카스토르를 말하는 거야?”
“응. 네게 말해 줘야 할 게 있어서 불렀어.”
주호현이 무슨 말을 할지 따위보다 지금 싸우고 있을 성산하와 태제헌이 더 중요했다.
“나중에 얘기해. 나 내려가야 해. 어떻게 가? 지금 존나 급하다고.”
“……아래는 걱정할 필요 없어.”
주호현이 손을 펼쳐 허공을 한 번 휘젓자 꼭 시스템창처럼 생긴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그 안엔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마지막 층의 전경이 나타나 있었다. 이상한 것은 아무도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꼭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퍼뜩 고개를 들어 주호현을 바라봤다. 내가 생각한 것이 맞다는 듯 주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입은 하지 못하지만 탑의 주인으로서 잠시 시간은 벌 수 있어.”
“……존나 멋있다 너. 그냥 유령이더니 언제 전직했냐?”
“…….”
“혹시 지금 내려가서 폰투스 교단 놈들이랑 촉수 새끼에 독만 뿌리고 오면 안 되냐?”
“그건 안 돼. 공간 벗어나면 바로 시간이 흐를 거야.”
주호현이 존나 재미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시간을 멈췄다는-현실이 멈춘 건지, 우리가 멈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믿기지 않는 상황에 신이 나 옆에 있던 나무 그루터기에 털썩 걸터앉아 고개를 까딱였다.
“뭐, 그럼 급할 거 없네. 하려는 말이 뭔데?”
주호현이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내 얼굴로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하는 건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네가, 이 탑이 막고 있는 존재가 뭔지 알아?”
“신이라고 하던데. 맞아?”
“……■■■■■”
“뭐, 뭐라고?”
분명 주호현이 말을 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귀로는 들었으나 머리가 인식을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기묘한 경험에 당황한 표정을 짓자 주호현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듣지 못할 거야. 저것은 혼돈과 파괴, 재앙과 암흑이야. 누군가는 저것을 신으로 추앙할 수도 있겠지.”
“……뭔진 몰라도 어마어마하네.”
“■■■■■는 우주의 저편, 가장 깊은 심연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를 소환하려는 시도는 우주의 많은 곳들에서 이뤄졌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어. 그러다 폰투스 교단이 ■■■■■를 불러내는데 반쯤 성공한 거야.”
“반쯤 성공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구로 소환되는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 보호막이었던 조디악 시스템과 충돌하며 열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렸지.”
“조디악 시스템이라면…….”
「Z
「#5. ZODIAC SYSTEM 수호」
「#5.5 ZODIAC SYSTEM 재건」
여태껏 봤던 시스템창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메인 퀘스트가 항상 말하던 그것.
“…알고 있어. 조디악 시스템. 성좌들을 말하는 거잖아.”
“맞아. ■■■■■를 막는 대가로 조디악 시스템은 산산히 부서졌어. 그를 구성하고 있던 열두 성좌는 인간들에게 유지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지. 원래라면 연관되지 않았어도 될 인간들이 성좌의 힘을 갖게 된 거야. ……하지만 폰투스 교단에 의해 그 유지마저 사라지게 되고, 봉인된 ■■■■■의 힘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조디악 시스템은 마지막 수단으로 탑을 세운 거야. ■■■■■의 조각을 억누르기 위해서.”
조용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주호현의 말을 듣자니 삐질 땀이 흘렀다.
‘잠깐, 그럼 탑을… 없애면 안 됐단 소리잖아? 씨발…. 좆 됐다.’
주호현의 눈치를 보다 슬며시 말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탑 없애기 운동 중인 거 아…냐? 제물…. 성좌 찾아다가 바쳐 버렸는데.”
“…….”
“어? 잠깐, 발자국에 눈동자 나왔는데, 그거 설마…? 씨발, 소름 끼쳐.”
주호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탑을 없앤 것도 아닌데 괜스레 눈치가 보여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 후 주호현이 말했다.
“제물을 바친 던전은 이미 ■■■■■의 힘이 돌아왔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성좌의 공간이었어야 했던 곳은 둥지로 쓰이고 있는 상태야.”
“둥지라니?”
주호현이 또다시 앞에 시스템창을 띄웠다. 어둡고 더러운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며 계속 태어나고 있었다.
“뭐, 뭐야. 몬스터?”
“온갖 더러운 것들의 집합체지. 이것들이 ■■■■■와 함께 밖으로 풀려나면 그땐 모든 게 끝이야.”
“그, 그래도 탑을 없애지 말자는 나라들도 있어. 우리나라도 아직 두 개나 남아 있고…….”
“힘이 돌아올수록 더 이상 탑의 존재는 무의미해져.”
절망적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시스템창에서는 지금도 쉴 틈 없이 무언가가 탄생 중이었다. 본능적인 역겨움에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를 부른 이유가 뭔데. 탑을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거야?”
“……탑 아래에 있는 ■■■■■의 조각을 죽여 없애.”
“알겠어. 죽일게. 그럼 돼?”
단호히 대답하자 주호현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내가, 해야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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