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90.
멍하니 중얼거린 말이 꼭 남일처럼 들렸다.
잠시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게 있기야 하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주호현의 굳은 표정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씨발…. 이건 반칙이지.’
저렇게 속내가 훤히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잖아.
모든 상황이 하나를 가리키고 있는데 더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했다.
“하아…….”
깊은 한숨이 나왔다. 기분이 어떻냐고 묻는다면 글쎄, 이상하게도 굉장히 아무렇지 않았다. 한 번 죽어 봤으니 두 번도 쉽지 않겠냐는 사이비들의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땐 절대 죽어 줄 생각 없었는데.’
양손에 선명한 카스토르의 문양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
“너랑 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
주호현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애초에 답을 바라고 물은 것도 아니었지만. 놈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놀라 말했다.
“엇! 잠깐, 카스토르는 쌍둥이 자리의 알파성이잖아. 게다가 우린 쌍둥이…….”
침울해 어두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가 절대 짓지 않을 표정을 하고 있는데도 꼭 닮은 생김새에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럼 내 동생인 너도 성좌가 되는 거야?”
말하고 나니 충분히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주호현은 이미 죽은 데다, 메인 퀘스트와 관련되었을 때마다 내 꿈속에 나타났지. 심지어 전에는 본인 입으로 직접 자기가 사념체라고 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주호현이 말했다.
“내가 형이야.”
“역시 그랬구…… 가 아니라! 뭐?”
“내가 형이라고.”
“웃기지 마. 증거 있어?”
황당해 벌떡 일어나 주호현을 마주 보고 섰다. 미세하게 조금 더 높은 눈높이에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거 봐, 키도 내가 더 크잖아!”
“……지금 그거 내 몸이잖아.”
“그건……!”
순간 할 말을 잃고 벙찌자 주호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지더니 작게 웃음을 흘렸다. 회상에서 엿보는 것이 아닌, 이렇게 직접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신기하게 바라봤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아마 같이 성좌가 되지 않을까.”
“성좌가 된다는 게……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닌가 봐?”
시스템창을 열어 아래층 상황을 살핀 주호현이 내게 손짓했다.
“보여 줄 게 있어.”
***
주호현이 나를 데려간 곳은 초원의 어느 한복판이었다. 그곳엔 아주 커다란 석판이 놓여 있었는데, 열두 조각으로 나뉜 석판에는 마법진 같아 보이는 그림과 함께 별과 성좌들의 문양이 크게 새겨져 있었다.
발밑에 카스토르의 문양을 구경하는데 먼저 석판을 밟고 앞으로 나아간 주호현이 따라오라는 듯 나를 돌아봤다.
“신기하다. 마지막 층에 이런 게 있을 줄이야.”
놈을 지나쳐 가며 중얼거리는데 무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으악!”
분명 뻥 뚫린 평원이었기에 부딪힌 아픔보다 당황스러움이 더 컸다. 얼얼한 이마를 매만지며 앞을 살폈지만 눈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뭐랑 부딪힌 거지? 꼭 쉴드처럼…….
설마 하며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벽이 만져졌다.
“뭐야, 이거?”
앞을 더듬거리며 발을 옮겼다. 정확히 카스토르의 경계선을 기점으로 투명한 막이 쳐져 있었다. 신기한 눈으로 둘러보자 뒤에서 주호현이 말했다.
“우리만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네 말은……. 마지막 층이 모든 탑들과 이어져 있다는 말이야?”
“아마도.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눈을 뜬 이후에 그 누구도 보지 못했어. 그리고 문양도 비활성화된 채고.”
주호현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카스토르의 문양을 쓸어내렸다.
“성좌가 된다면……. 잘은 몰라도 이게 끝은 아닐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
“사후세계, 그딴 건가. ……어쨌든 내가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
“아프진 않을 거야.”
“그래. 듣던 중 존나 다행이다.”
투덜대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카스토르의 문양보다 더 익숙한 것이 눈에 밟혔다. 하말의 문양이었다.
“구름이…….”
내가 성좌가 된다면, 구름이는 어떻게 하지. 구름이도 성좌가 되어야 하는 건가? 제주 탑의 보스도 죽여야 할 텐데 나 없이 안전할 수 있을까.
내가 하말의 문양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봤는지 주호현이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금까지 수윤이의 유지를 지켜줘서 고마워.”
“…구름이가 혼자 있어. 내가 돌아올 줄 알고 있을 텐데.”
“넌 최선을 다했어.”
“…….”
구름이까지 포기해야 한다니 입 안이 썼다. 하지만 그만큼 이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느껴져 마음을 다잡았다. 주먹을 꾹 쥐고 말했다.
“준비됐어. 이만 내려보내 줘.”
주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 옆으로 잘려 나간 검은 촉수가 떨어졌다.
“의진아. 괜찮아?”
나를 안고 제단을 벗어난 성산하가 물었다.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촉수가 잘려 나간 제단 가운데에 끝없이 깊은 구멍이 보였다. 그곳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성산하, 저기. 저거야! 태제헌의 말대로 성좌를 제물 삼아 탑을 사라지게 하는 건 함정이야! 사이비들이 따르는 존재를 부활시키는 의식이었어! 촉수 뒤에 숨어 있던 놈의 조각… 아니, 이 던전의 보스가 있어. 그 새끼를 죽여야 해!”
“의진아…? 갑자기 너 무슨…….”
“그리고 너! 약속해. 구름이가 제물이 되지 않게 지키고 제주 탑 보스도 죽여 주겠다고. 응? 빨리 맹세해. 성산하.”
옷자락을 잡고 소리치자 성산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약속할게.”
“진짜지?”
“당연하지. 하말은 꼭 보호할 테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 하는 이유가 있어? 의진이 너 괜찮은 건 맞지?”
성산하가 걱정스레 내려다보며 머리를 넘겼다. 놈의 얼굴을 보자 괜히 가슴 안쪽이 울렁거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태제헌 말도 있고… 잠깐 기절했을 때 성좌의 힘인지 뭔지 때문에 확신이 들었을 뿐이야.”
“아픈 거 아니면 다행이고.”
그때 아래서 검은 물체가 우리쪽을 향해 쇄도했다. 촉수를 완전히 태워 죽인 태제헌의 시비였다. 몸을 돌려 가뿐히 피한 성산하가 아랠 보며 중얼거렸다.
“재촉하긴….”
아래로 내려가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폰투스 놈들의 시체 사이로 가닥가닥 잘린 촉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S급이래도 겨우 둘인데 이 많은 수를 해치우다니…….
혀를 내두르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제단 위에 올라섰음에도 전처럼 다른 반응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전에 없던 깊은 구멍이 생겨난 위쪽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계단을 오르는데 위쪽에 서서 기다리던 태제헌이 내가 가까워지자 툭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놈을 지나쳐 가는데 팔이 잡혔다. 귀찮게 옆을 바라보자 나를 꿰뚫듯 바라보는 검은 시선이 있었다.
“왜요.”
“너…….”
태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짜증이 났지만 어차피 몇 분 후 뒈질 거, 마음을 넓게 먹고 말했다.
“진짜 괜찮다고요. 그나저나, 신의 조각이라는 거, 어떻게 찾는지나 알려 줘요.”
“……아직 몰라. 찾아봐야 해.”
뭐야, 아는 척 존나 하더니…….
팔을 잡았던 손을 놓고 위로 오르는 태제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씰룩댔다. 제단 아래에 뭔가를 설치하던 성산하 역시 뛰어올라 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그냥 고개를 젓고 말았다.
제단 가장 위에 올라 오페라 글라스를 이용해 탐사 스킬도 써 보고, 온갖 감정 스킬도 사용해 봤지만 실마리를 찾기 힘들었다. 한참을 뒤져 보는데 코를 킁킁대며 주위를 돌던 룬이 태제헌에게 다가가 뭔가를 월월댔다. 태제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룬이 곧바로 구덩이 아래로 몸을 던졌다. 옆에서 글자를 해석하던 나는 깜짝 놀라 구덩이를 바라봤다.
“룬!!”
“……월! 월월!”
다행히 무사한지 안쪽 깊숙이에서부터 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태제헌이 손을 털며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따라와.”
“뭐라고요? 밑에 뭐라도 있어요? 아니, 갑자기 뛰어내리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제헌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뛰어내렸다. 태제헌에 루트까지 아래로 몸을 던지자 성산하와 둘만 남은 나는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쟤네 미쳤나 봐.”
“우리도 이만 갈까.”
젠장. 아니길 바랐는데.
성산하 역시 내려갈 생각인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촉수의 좆같음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데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어둠으로 뛰어내려야 한다니.
이래서 전투계 새끼들은 안 된다니까. 나처럼 신중하지를 못해요.
투덜대며 내밀어진 성산하의 손을 잡았다.
한 팔로 나를 껴안은 성산하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제는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보스를 죽이더라도 태제헌이 널 노릴 거야.”
“……뭐. 알겠으니까 보스나 확실히 죽여.”
잃을 것도 없는데 더 이상 태제헌이 두려울 일은 없었다. 오히려…… 네가 문제지.
어둠 속에 실루엣만 보이는 성산하를 바라보다 대충 고개를 주억이자 성산하가 착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싫으면서도 싫지 않은 기분에 성산하의 손을 털어내려다 그냥 어깨에 턱을 올린 채 가만히 기대 있었다.
“이러면 설레는데.”
“지랄.”
얼마나 깊은지 성산하와 잡담을 하고도 수십 초가 더 지나서야 우리는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깜깜한 어둠에 태제헌은 보이지 않았지만 헥헥대는 룬과 루트의 숨소리로 근처에 있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성산하가 위협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로드를 꺼내 휘둘렀다. 순식간에 생겨난 빛이 주위를 밝혔다.
어둠이 물러가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씹…. 저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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