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91.
얼마나 깊은지 성산하와 잡담을 하고도 수십 초가 더 지나서야 우리는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깜깜한 어둠에 태제헌은 보이지 않았지만 헥헥대는 룬과 루트의 숨소리로 근처에 있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성산하가 위협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로드를 꺼내 휘둘렀다. 순식간에 생겨난 빛이 주위를 밝혔다.
어둠이 물러가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씹…. 저게 뭐야……?”
쿵. 쿵.
벽에 붙어 박동하고 있는 것은 새카맣고 곳곳이 돌처럼 굳어 있었지만 분명 심장이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심장은 두터운 혈관들로 이어져 벽에 찰싹 붙어 있었다. 혈관 아래로는 검붉고 끈적한 무언가가 기묘한 빛을 내며 흐르고 있어 역겨움을 자아냈다.
“으. 설마 진짜 심장은 아니겠지.”
“저게 이 던전의 보스인가. …역겹군.”
주위를 둘러보자 층이 나뉜 열댓 개의 탁하게 바랜 희멀건 암석들이 크게 공간을 두르고 있었다. 심장 뒤로 맞물린 것들은 이제 보니 무언가의 늑골 골격 같기도 했다.
이미 성산하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몬스터들이 안광을 빛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룬과 루트가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그런 몬스터들을 경계했다.
내게 다가온 태제헌이 나를 내려다보다 말했다.
“네가 끝내야 할 거야.”
“……알았어요.”
“숨어 있다 때 되면 나와.”
나를 지키라는 듯 태제헌은 성산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곤 곧 훌쩍 뛰어 심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룬과 루트가 그 뒤를 따르자 경계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크르르륵!”
“의진아, 너 보호 장비 몇 개 차고 있어?”
“A급 두 개랑 B급 하나, C급 세 개.”
“캬아악!”
“음, 애매하네. 내 로드 가지고 있을래? 쉴드 펼쳐 줄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은 성산하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가볍게 휘두르는 로드에서 퍼진 빛에 닿자마자 몬스터들이 까맣게 타 버렸고 작은 것들은 아예 재가 되어 사라졌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성산하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너 스킬 못 쓰잖아. 그냥 몸빵 좀 할 테니까 저거나 빨리 처리하자.”
어차피 곧 죽을 건데 좀 다쳐도 상관없었다. …아니 잠깐, 아픈 건 싫으니 감각 둔화 포션만 좀 마셔 둘까.
성산하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비비적댔다.
“다치는 건 안 돼.”
버프를 걸었는지 눈앞에 뜨는 수많은 상태창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를 높은 쪽 뼈대 위에 내려 둔 성산하는 아래서 따라붙은 몬스터 떼를 한 번에 태워 죽이고는 태제헌에게 합류했다.
먼발치에 서서 성산하의 빛과 태제헌의 어둠이 난무하는 곳을 바라봤다. 약한 부분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어 쉬울 줄 알았는데 심장은 특유의 기묘한 기운으로 태제헌과 성산하의 스킬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아직 치명타 한 번을 먹이지 못한 채였다. 심지어 다 죽인 줄 알았던 촉수까지 재생되어 둘을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겨우 심장이 이 정도면, 본체는……. 어마어마하겠네.”
조각들이 모두 합쳐지면 어떤 모습이 될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희뿌연 상상만으로도 전신에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상상력이 풍부한 성격이 아닌데도 겁먹어 한껏 쪼그라든 기분이 어색했다.
정체 모를 것에 이렇게까지 영향을 받는 이유는 이게 성좌의 기억이라서였다.
몸을 부르르 떨며 한기 돋친 팔을 비볐다.
“씨발, 겁 안 줘도 된다니가. 성좌 하겠다고.”
투덜대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나라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공격당하는 심장 쪽에 몰려 있었지만 눈치가 빠른 놈들은 숨어 있는 나를 찾아왔다. 자동으로 몬스터들을 공격하는 유도 화살들을 설치해 두고 아래를 향해 포션과 탄들을 하나둘씩 던졌다.
밑에서 펑펑 터져나가고 녹아내리는 몬스터들을 보며 아쉬운 한숨을 뱉었다.
“이런 놈들한테 쓰긴 아까운데…….”
이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었다면 웬만한 던전의 보스 몬스터도 상대할 수 있을 만큼의 분량이었다.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는 승연이 몰래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지만 이젠 가지고 있어 봤자 소용도 없다. 그대로 인벤토리에 남아 나와 같이 순장되는 것보단 덜 아깝겠지.
내가 있는 층 아래로 몬스터들의 시체가 빼곡하게 쌓일 때쯤 나를 부르는 태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의진!”
고개를 돌려 태제헌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횡으로 깊게 갈라진 심장이 폭포수 같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조각은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지 칼날 같은 기운과 촉수들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중이었다.
곁에 내려선 성산하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가자. 의진아.”
성산하의 손을 잡고 심장이 있는 곳으로 함께 날아갔다. 쉴드 덕에 난무하는 공격에도 다치는 일은 없었지만 위협적인 모습과 진동, 소름 끼치는 소음은 그대로라 움찔대지 않기 위해 성산하 몰래 주먹을 꾹 쥐어야 했다.
심장 앞에 다다랐을 때, 세 개의 촉수를 한 번에 잘라 내며 다가온 태제헌이 내게 검을 던졌다. 뿔같이 생긴 투명한 검은 꼭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차갑고 매끈했다. 이게 뭘까 궁금하던 차, 성산하의 헛웃음이 들렸다.
“대천사의 해방? 국가적 유물일 텐데 잘도 갖고 있군.”
“소중하면 관리를 잘했어야지.”
이죽거린 태제헌이 내게 말했다.
“성좌의 힘을 증폭시킬 거다. 이번엔 망설이지 말고 찔러 넣어.”
“내가 언제 망설였다고. 나 단도 잘 쓰거든요.”
“그래. 누가 가르쳤는데.”
태제헌의 만족스러운 웃음에 내 어깨를 잡은 성산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를 흘깃 본 나는 투덜대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저딴 식으로 생겼는데. 저걸 보고 누가 망설여요. ……성산하. 가자.”
성산하가 위로 발돋움하더니 나를 잡은 채 순식간에 아래로 뛰어내렸다. 우리 뒤를 따르는 촉수는 태제헌이 끼어들어 막아 냈다.
심장의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때. 쿵, 하고 맥동하는 심장에 의해 쉴드에 후두둑 검은 피가 흩뿌려졌다.
“지금이야.”
성산하가 로드를 휘두르는 순간 쉴드가 사라졌다. 로드 끝에서 쏘아진 빛에 의해 갈라진 곳이 더 깊게 베이며 공간이 생겨났다. 성산하의 손을 놓은 나는 유리 검을 두 손으로 쥐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뜨거운 김이 훅 끼치며 살갗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
“크윽!”
검이 물컹한 곳에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검 자루를 쥔 손에서부터 푸르른 빛이 뿜어졌다. 몸 전체를 휘감는 감각은 여태껏 살면서 처음 겪어 보는 거라, 고통보다도 더 견디기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잡은 손을 놓고 싶은 생각을 애써 무시한 채 울렁이는 마음을 다잡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줘 더 깊숙이 박아 넣었다.
“씹새끼야. 죽어-!!”
“■■■■■■■■!!”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이 공기를 울렸다. 나를 삼킨 놈의 심장이 미칠듯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가빠지고 울렁이는 감각에 눈앞이 혼미해질 때쯤, 심장이 팡 터져 버렸다.
“의진아!!”
“으아아악!!”
검붉은 핏방울들과 심장의 살점들이 하늘로 나부꼈다. 나도 함께 날아가는데 태제헌은 그런 내 모습을 슬쩍 올려다보더니 여유롭게 걸어가 떨어지는 유리검을 낚아챘다.
‘저 개새끼……!’
다행히 다급히 달려온 성산하가 나를 받아 준 덕에 추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진아, 괜찮아?”
“…응. 멀쩡. 웁, 퉤퉷 씨발 맛 좆같아!”
얼굴이 놈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말하려다 조금 먹어 버려 기겁하며 퉤퉤거리자 성산하가 제 옷깃을 잡고 피로 범벅된 머리끝부터 허리까지 내 몸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이템을 쓴 건지 몸에 묻어 있던 것들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성산하가 내 턱을 잡아 이리저리 돌려보고 꼼꼼히 날 살피며 중얼거렸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중상 입고도 포션으로 해결 보려는 포션지상주의 환자 말기잖아.”
“흥. 웃기네. 멀쩡하니까 이거나 놔.”
성산하의 품에서 벗어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성산하와 한 발짝 떨어지는데 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들키면 안 돼.’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의 심장은 파괴되었다. 그와 동시에 내게 흩어져 있던 성좌의 힘이 모여들고 있었다. 아마 손의 문양 역시 사라졌을 게 분명하다.
보스를 죽였다는 후련함을 느끼기도 전에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적시는데 어디선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돌아보자 다리를 다쳤는지 절뚝대는 룬과 옆구리에 깊은 상처가 난 루트가 보였다. 태제헌은 곁에서 루트의 상처를 보는 중이었다.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태제헌에게 던졌다.
“이거 써요.”
포션을 받은 태제헌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뭐요.”
“다친 곳은.”
“없으니까 룬이랑 루트나 빨리 치료해 줘요.”
태제헌이 룬과 루트를 살피는 사이 나는 보스가 죽은 자리를 살피는 성산하를 돌아봤다.
“야. 성산하!”
내 외침에 성산하가 뒤를 돌아봤다. 흩날리는 옅은 머리칼 뒤로 모습을 보이는 높다란 콧대와 예쁜 입술. 다정한 눈매가 나를 향했다.
“응? 의진아. 왜.”
저걸 이제 못 본다니 아쉽다.
……엄청 아쉽다.
말없이 놈을 바라보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성산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래도 해야겠지.”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느 순간부터 내 발아래에 검은 그림자가 하나 더 생겨 있었다. 등 뒤로 태제헌이 다가왔다.
“강의진. 하지 마.”
눈치는 존나게 빠른 새끼. 그런데 태제헌이 하나 모르는 게 있었다.
이제 이 탑은 내 권역이라는 거.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그대로 시간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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