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92.
“아무래도 파동이 불안해 좀 더 조사를 해 봐야…….”
“강의진 너……!”
걱정스런 낯으로 다가오며 말하던 성산하와 다급히 손을 뻗던 태제헌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훌쩍 뛰어 발을 붙잡은 그림자에서 벗어난 나는 멈춰 버린 주변을 경이롭게 둘러봤다. 심장이 있던 자리에 생겨난 파동은 물론이고 공기에 떠도는 먼지 하나까지 그대로 멈춰 있었다. S급 두 명의 시간까지 빼앗을 수 있다니.
“……직접 보니까 더 신기하네. 엑스트라 급은 다르다는 건가.”
멈춰 버린 태제헌과 성산하의 곁을 신기하게 기웃거리던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개들을 발견했다. 룬과 루트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고 둘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줬다.
“잘 있어라. 다치지 말고. ……조용하니까 어색하네.”
예전엔 하도 치대는 통에 조용하길 바란 적도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조용하자 그저 아쉬움만 커졌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찌푸린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태제헌의 얼굴을 보자 입 안이 썼다. 죽기 전 인사를 할 수 있다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마지막까지 태제헌을 봐야 한다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
“…야. 태제헌.”
“…….”
“이 존나 나쁜 씨발 새끼야.”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렇게 당당히 태제헌을 마주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한땐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던 놈이 지금은 내 힘으로 꿈쩍도 못 하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후련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말없이 놈을 바라보다 배에 온 힘 다해 주먹을 날렸다. 태제헌이 뒤로 조금 밀려날 정도의 세기였다. 겨우 한 대로 오랜 기간 쌓였던 앙심이 다 풀릴 리 없지만 남자가 되어서 비겁하게 무방비한 상대를 더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겨우 한 대니까 비겁했어도 봐줘요….”
생각보다 더 단단한 복근에 주먹이 다 얼얼했다. 얼얼한 손을 털며 태제헌에게서 등을 돌리는데 돌아서자마자 나를 바라보는 성산하와 눈이 마주쳐 흠칫 놀라 발을 멈췄다. 단순히 아까와 같은 위치에 서 있어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뱉을 수 있었다.
“씨…. 존나 놀랐네.”
성산하에게 다가가 앞에 서 놈을 마주 봤다. 조각 같은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다 손을 뻗어 볼을 감쌌다.
“……성산하.”
내 등 뒤 허공을 향한 성산하의 눈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부드러운 뺨을 매만지며 주절거렸다.
“이게 마지막이라니. 사실 존나 실감 안 나.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생각보다 담담한 걸 보니 폰투스 놈들의 말이 맞았어. 한 번 죽어 봐서 두 번도 쉬운가 봐. 하긴, 태제헌 엿 먹일 작정 하나만으로 자살할 땐 언제고 이제 와 죽기 싫다고 하는 것도 웃기잖아? 게다가 S급 포션 마스터에게 딱 어울리는 죽음 같기도 해. 죽음으로 세상을 구한다니, 존나 멋지잖아. 훈장 5개쯤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어. 내 위인전까지 나오면 어떡하지?”
“…….”
“생각 많이 해 봤는데. 어떻게 보면 나는 성좌의 힘으로 일 년이나 더 산 거나 다름없더라고. 그사이에 내 공방도 만들고 날 좋아하는 손님들도 만나고. 친구들도 엄청 많이 생겼잖아. 승연랑 청이, 제로. 다인 누나랑 하얀 누나, 한서진….”
순간 울컥해 말을 멈췄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와 명치가 뻐근했지만 애써 무시한 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씨이, 갑자기 존나 심란하네…. 여하튼 우리 구름이랑 그리고, 그리고…….”
뜨거운 것이 볼을 흘렀다.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입꼬리를 잡아 올리던 얇은 실이 눈물의 무게에 결국 툭 끊어졌다. 한순간에 일그러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숙이자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로 굵은 눈물방울들이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씨발.
아직 만들지 못한 포션들이 많은데, 승연이에게 금방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다혜의 원석으로 선물도 만들어 줘야 하는데. 해야 할 일들이,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 너무 많은데. 왜 내가.
힘겹게 모른 척하던 거센 감정들의 파도에 아플 정도로 목이 메었다. 성산하의 옷깃만 잡고 숨죽여 울었다. 시간이 멈춘 곳에서 나를 방해하는 건 아무도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북받치는 감정을 갈무리한 나는 온통 젖은 얼굴을 들어 성산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너도. 다시 만나서 기뻤어. 성산하.”
못다 한 말을 마친 나는 성산하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나직이 속삭였다.
“만약 너랑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함께 있었다면 아마 널….”
성산하의 목을 감싸 당겼다. 굳어 움직임이 없는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울음을 참느라 힘껏 깨물었던 입술이 너덜너덜해 아린 고통이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고 그대로 입을 벌려 키스했다. 또다시 눈이 젖어 들어갔다.
찰나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아쉬운 입술을 뗐다. 잔뜩 부은 입술에 손을 대며 눈앞에 뜬 상태창을 바라봤다.
「진행률 100% 달성! 별의 정화(EX)로 저주의 침식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타이밍 한 번 좆같이 좋네.”
딱히 정화 때문에 키스한 건 아니었지만-사실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얻어걸린 결과가 괜찮았다. 이제 성산하와 이어진 것도 없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겠다.
시간 허비를 너무 많이 했다. 인벤토리를 뒤져 작은 까마귀의 둥지에서 샀던 구속 3종 세트 중 하나인 은빛 수갑을 꺼내 성산하의 손을 구속했다. 아마 쉽게 풀어내겠지만 시간은 벌 수 있을 거다.
“S급도 질렸어. 엑스트라급 정도는 되어야 강의진이지.”
태제헌과 강아지들, 성산하까지. 모두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마지막으로 크게 심호흡했다.
“……가자.”
바닥에 손을 대자 카스토르의 모양으로 황금빛 마법진이 그려지며 일 층으로 향하는 워프가 생겨났다. 워프가 가동되는 것을 보며 손을 튕겼다.
멈춰 있던 공기가 흐르고 워프의 파동에 옷자락이 펄럭였다. 태제헌이 당황한 낯으로 배를 감싸 쥐고 성산하가 놀란 눈으로 발밑을 바라봤다. 갑자기 생겨난 마법진에 당황한 놈들이 주위를 둘러보다 나를 발견했다.
“이게 무슨! 강의진 너 언제 거기로……!”
“의진아, 이리 와!”
나를 발견한 성산하가 손을 뻗으려다 제 손목을 구속한 수갑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파괴하려는지 양손에 힘을 주는 모습을 보고 급히 워프를 열었다. 마법진이 더욱 환하게 빛나며 문이 열렸다. 닿지 못할 걸 알면서도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강의진!!”
성산하와 룬, 루트의 모습이 사라지는 사이로 태제헌이 나를 향해 존나 달리기 시작했다.
“씨, 씨발. 뭐야?”
예상과 다른 상황에 급히 마법진으로 태제헌을 잡으려 했지만 아직 힘을 다루는 게 미숙해 헛발질하는 사이 검은 기운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하나로 뭉쳐 있던 어둠이 폭발하고 이리저리 튀어 주위를 때려 부쉈다.
“크윽……!”
천장이 무너지고 벽이 부서져 바위가 떨어졌다. 이러다 성좌가 되기도 전에 죽겠다 싶어 등을 돌려 심장이 있던 곳으로 달렸다. 그곳에는 제단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조그만 워프가 있었다.
쾅!
눈앞에 천장의 조각이 떨어졌다. 사방으로 튀는 파편에 힘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급히 얼굴을 가렸다. 소란이 잠재워진다 싶을 때쯤 저벅저벅 하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설마, 말도 안 돼…….’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렸다. 희뿌연 흙먼지 사이로 거대한 인영이 우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강의진.”
“씨발, 말도 안 돼!”
태제헌의 얼굴을 보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친……. 괴물이에요? 아니, 씨발 어쩌려고! 빨리 다시 나가요!”
“내가 왜.”
워프를 다시 열어 보려 했지만 뭐가 잘못된 건지 전처럼 되질 않았다. 태제헌을 경계하다 힐긋 옆을 바라봤다. 한 발 거리에 워프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거절한 건 너다. 알아서 내려가시든지.’
설마 성좌의 공간까지는 못 따라오겠지 싶어 워프에 몸을 던졌다. 제단에 오르자 촉수가 나타났던 전과 달리 가장 아랫단부터 천천히 신성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역시 나를 따라온 태제헌이 뒷덜미를 잡아챘다.
“씨발, 놔! 뭐 하는 건데요!!”
“혼자 죽을 수 있게 둘 줄 알았어?”
“내가 죽든 말든 그쪽이 무슨 상관인데! 꺼져!”
이제 눈앞에는 엄청난 속도로 수많은 황금빛 시스템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퀘스트 성공!
[선산의 주인이 열렸습니다!]
[선산의 주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천지보감이 열렸습니다!]
[천지보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
보상을 지급합니다.
+명성이 50880000000000… 올랐습니다!
(현재 명성 : 50880000000000… )
+현재 상태에 맞는 스킬이 생성됩니다.
찡그린 낯의 태제헌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봤다. 몸이 변하고 있었다. 아무리 태제헌이라도 이제 날 잡지 못한다.
그때, 뒤에서 엄청난 진동이 느껴졌다. 탑 전체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거대한 진동이었다.
성좌가 되는 과정인 줄로만 알고 별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는 나를 태제헌이 잡아 반대편으로 던졌다.
“피해!”
“으아악!!”
제단 아래까지 굴러떨어져 위를 올려다보니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에 엄청난 다발의 촉수가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아직까지 제단 위에 있던 태제헌 역시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씨발, 태제헌!!”
새로 생긴 스킬 중 다급히 아무거나 골라 ‘별의 충돌(EX)’을 사용하자 하늘에서 내리친 푸른 번개에 촉수가 까맣게 타 버렸다. 엄청난 위력에 감탄할 새도 없이 위에 있을 태제헌 생각에 기어오르듯 제단을 달렸다.
어찌나 많은지 낙엽처럼 쌓인 촉수 시체를 거둬내고 거둬내자 드디어 태제헌의 얼굴이 보였다.
“아, 찾았…….”
안도해 내뱉던 말도 못다 한 채로 태제헌을 내려다봤다. 두꺼운 촉수가 태제헌 가슴을 뚫고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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