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95.
등이 푹신한 풀밭에 닿았다. 전에 봤던 하늘이 시야 위로 펼쳐졌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선산의 주인!”
「보유하고 있지 않은 스킬입니다.」
“젠장, 왜 하필!!”
조금만…,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그랬다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이젠 다 끝났다. 나는 성좌가 되었고 태제헌은 죽기 전 상태 그대로 약산에 갇혀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 테다. 무거운 자책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등 뒤에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곁에 선 주호현이 위로라도 하듯 어깨를 잡았다.
“끝났잖아!”
“……강의진.”
“보스를 죽이면 끝난다며. 분명히 죽였어. 보스도, 그 좆같은 촉수도!! 그런데 대체 왜 다시 나온 건데!”
답답함과 억울함이 뒤섞인 마음에 생떼 부리듯 소리치자 주호현이 곤란한 얼굴로 침음을 삼켰다. 한참 동안이나 말을 고르던 주호현이 뱉은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마지막의 그건, ■■■■■의 힘이 아니야. ……성좌의 힘이지.”
“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멍하니 위를 올려다봤다. 주호현이 힘겨운 얼굴로 말했다.
“네가 성좌가 되는 과정에서 차마 담지 못한 힘이 폭주한 거야. 그래서 너까지 공격하게 된 거고.”
“웃기지 마! 그건 분명 촉수였다고!”
“그 장소의 기억을 읽어 비슷한 것을 흉내 냈을 뿐이야. 기운은 전혀 달라.”
“그런…….”
주호현이 손을 내젓자 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붕괴한 제단은 그 잔해만 남아 천천히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부서진 돌덩이들 사이에서 촉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까맣게 타 원형을 알아보기 힘든 상태였지만 온전한 성좌의 힘을 받아 들인 지금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저건 놈의 짓이 아니었다.
눈앞의 화면을 아연히 바라봤다. 결국 태제헌은 내가 죽인 거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으니까.
-네 손에 죽는 날.
태제헌은 이렇게 될 줄을 이미 알고 있던 걸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태제헌을 죽이려 시도한 적이 수십 번, 죽이는 상상을 한 건 수백 번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까. 마지막으로 본 놈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개새끼. 끝까지…….”
누가 구해 줬다고 고마워할 줄 알아.
곁에서 눈치만 보던 주호현이 내 옆에 앉았다.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쌍둥이자리…, 카스토르가 완전한 성좌가 아닌 상태라서 힘이 넘쳐흐른 것 같아.”
주호현의 말을 듣다 고개를 돌렸다. 우리 앞으로 넓게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상관없어. 우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
[남산 던전이 사라진 지 벌써 열흘째. 강의진의 공방 앞에는 오늘도 추모 행렬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강의진의 공방에서 나타나는 성좌 지도의 표식에 관해선 의견이 분분합니다. 혹자는 그것이 ‘제주 탑’에 관련된 무언가라며, 남산 탑의 성좌인 강의진이 미리 알고 가지고 있었다고들 하고 또 혹자는 강의진이 사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이초가 다급히 운전석에서 운전하던 승훈의 팔을 툭 쳤다. 승훈이 눈치 보다 채널을 돌렸다.
[한국에서 처음 폭로된 사이비 종교 ‘폰투스’. 이후 전 세계에서 폰투스 교단에 대한 고발이 계속되고…….]
[남산 탑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특수 던전. 재오픈 날이 하루 앞으로…….]
[성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함정이었으며, 던전에 숨겨진 보스가 있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 탑 보유국들은 다급히 전투를 대비한 특수 토벌대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이미 실패한 미국과 일본에서는 협회를 향한 국민들의 규탄이…….]
계속 넘겨도 이번 일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눈을 감고 있던 성산하가 입을 열었다.
“승훈아. 라디오 끌까?”
“앗, 넵!”
부드러운 목소리에 운전하던 승훈이 황급히 차에 나오던 뉴스를 껐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초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성산하 눈치를 봤다.
세계 최초로 ‘정상적이게’ 사라진 유일한 탑이 남산 탑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마지막 층에서 혼자만 살아 돌아온 성산하. 모든 국가에서 그를 찾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은 얼핏 온화해 보이기도 했지만 제 상사가 현재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초는 끊임없이 메일이 오고 스케줄로 가득 찬 태블릿을 꽉 쥐었다. 독단 행동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연락들을 숨길까 고민하던 찰나 성산하가 귀신같이 물었다.
“이탈리아에선 연락 왔어?”
“…네엡. 당연하죠……. 연락 안 온 곳이 없으니까요.”
“내일 간다고 전해. 오늘 자정에 출발하자.”
“오늘 두 시에 기자회견, 네 시에 O12 회의, 일곱 시에 헌터 협회 방문 후 여덟 시에 공방에 들리기로 한 것은 기억하시죠……?”
“그럼.”
이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속으로 심호흡을 하곤 간절하게 말했다.
“산하 님. 며칠이라도 휴식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
“돌아오자마자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중이시잖습니까.”
“그럴 시간 없어. 의진이가 어떻게 만들어 낸 기회인데 한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지.”
“탑에 직접 들어갈 계획이시지 않습니까. 이러다 과로로 쓰러지십니다.”
“괜찮아. ……의진이 포션 마시면 되니까.”
성산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다 피식 웃었다.
“꼭 포션 지상주의 같군……. 큭….”
혼자 웃다 와락 얼굴을 찌푸리는 성산하의 모습에 맞은편에서 이초가 할 말을 잃고 질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성산하는 그 상태 그대로 잠시 감정을 갈무리하더니 손을 떼고 말했다.
“남산 던전이 내일 열린다고 했지.”
“내일 오전 11시입니다.”
“현장 나갈 수 있는 팀들은 모조리 다 들여보내. 마지막 층에는 무조건 우리가 먼저 도착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성산하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장갑을 끼지 않은 깨끗한 맨손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기억에 함께하던 저주의 흔적은 이제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강의진의 흔적으로 정화된 하얀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엑스트라 급이 된 지 이틀째. 벌써 질렸다.
“흐아아암. 지루해.”
여기 있으면서 알게 된 것 첫 번째. 탑의 숨겨진 마지막 층들은 성좌들의 공간이다. 그리고 모두 이어져 있었다.
석판 때문에 넘지 못할 공간들이 모조리 다른 이들의 구역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주호현은 하말의 구역 쪽으로 가 그 장소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또 여기 와 있냐? 지루하지도 않아?”
“…응. 별로.”
그리고 두 번째. 주호현은 존나 재미없는 놈이었다. 사실 그 누구라도 이런 곳에 둘만 남겨 놓으면 지루할 테지만-비밀이지만 성산하라면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긴 했다.- 주호현의 딱딱한 성격 탓에 유독 그 정도가 심하게 느껴졌다.
황금 솥이며 의신의 손길, 선산의 주인 등…. 스킬들이 사라져 포션도 만들지 못하는 데다 성좌는 섭취도, 수면도 필요하지 않았다. 정말 맨 정신 그대로 깨어 시간을 때워야 하는데 같이 떨어진 놈이 주호현이라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때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나마 재미있었지만 던전 브레이크로 엄마와 아빠가 죽었단 얘기를 듣고는 분위기가 더 껄끄러워졌다.
“빨리 누구든 왔으면 좋겠다. 우리 구름이도 오려나…….”
“……다들 돌아온다면 이곳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될 거야.”
“어디로?”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었어. 여기는 임시라는 뜻 같아.”
“그런 게 어디 써 있었는데?”
주호현이 이상하게 바라보다 제 앞을 휘저었다.
“여기.”
주호현의 앞에 떠오른 상태창의 모습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 그거! 그냥 탑 상황 구경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성좌 시스템 같던데. 너도 할 수 있어.”
“그래? 상태창!”
< 카스토르♊ >
황도 12궁 중 하나로 ZODIAC SYSTEM의 셋째 성좌
-레벨 : 측정불가
-계열 : 복합계
-등급 : EX
-스킬 : 별의 정화 (EX), 별의 충돌(EX), 별의 자장가(EX)…….
처음 불러 보는 상태창을 멍하니 바라봤다.
당연하지만, 이젠 기본 상태가 카스토르였다. 예전에 구름이가 그랬듯 ‘강의진’의 상태창은 카스토르의 뒷면에 숨겨져 회색빛으로 죽어 있는 상태였다.
상태창이 주호현에게도 보이는지 같은 곳을 바라보던 주호현이 내 손을 잡아 움직였다.
“힘을 담는다고 생각하고……. 열어 봐.”
주호현을 따라 손에 기운이 옮겨 갔다. 동시에 손을 휘젓자 우리 앞에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주호현의 것과도 다른 모습이라 우리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삭막한 던전을 나만의 개성을 가득 담아 멋지게 꾸며 보자!
►튜토리얼을 재생합니다.
►망하는 지름길! 넘기기?
“던전… 꾸미기? 이게 뭐야?”
“모르겠어. 일단 튜….”
주호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손이 두 번째 선택지를 눌러 버렸다. 주호현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아……!”
“앗 미안. 나도 모르게…….”
이번만큼은 튜토리얼을 들으려고 했는데!!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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