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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96화 (196/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96.

반투명한 시스템창에는 수십 개나 되는 구역의 지도가 펼쳐졌는데 자세히 보니 하나하나가 모두 각기 다른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그를 본 우리는 동시에 중얼거렸다.

“던전이잖아?”

“정말 던전…….”

주호현이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확대했다. 화면이 커지며 비춘 공간은 익숙했다. 눈보라가 치는 평원과 저 멀리 보이는 설산. 남산 탑의 초입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장 마지막 층도 살펴보자 역시 내가 지나온 열대우림이 보였다.

“남산 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가?”

바깥 상황은 알지 못하지만 제단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미국과 일본에서처럼 탑이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겼었구나…….’

공간을 찢고 이동하느라 보지 못했던 다른 층들을 신기하게 구경하는데 가만히 고민하던 주호현이 말했다.

“혹시 우리도 아직 탑에 남은 걸까?”

“그러게. 당연히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아! 아니면 우리가 만드는 대로 던전이 생겨나는 거 아닐까? 나만의 던전 만들기랬잖아.”

“튜토리얼을 봤다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에 후회하지 마.”

한 번 지나간 튜토리얼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눌러보다 보니 가장 초기 화면을 볼 수 있었다.

삭막한 던전에 나만의 개성을 가득 담아 멋지게 꾸며 보자!

-방문객들의 활동성이 높아질수록 던전 인기도가 올라갑니다.

-인기도가 일정 수치에 도달할 때마다 던전 업그레이드 아이템이 증가합니다.

-인기도가 100%가 되면 성좌의 권역이 되어 재구성 이후에도 직접 지배할 수 있습니다.

인기도 : -223%

활동성 : 0%

“엑? 뭐야. 인기도가 왜 이렇게 낮아? 적어도 0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야?”

“……권역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인기도 100 만들면 알 수 있겠지!”

새롭게 나타난 흥밋거리에 눈을 빛냈다. 마냥 지루할 줄로만 알았던 사후 인생에 한 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다.

주호현이 신중한 표정으로 설명을 몇 번이나 읽는 사이 나는 옆에서 시스템창을 조작했다.

지형을 선택해 주세요.

►[산] [바다] [강]

►[절벽] [늪] [동굴]

►[해저] [천공] [지하]

►[폐허] [정원] [선상]

.

.

“미친! 이건 처음 보는 건데?”

눈앞에 펼쳐지는 수십 가지 선택지들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산을 선택하면 야트막한 동산부터 험준한 산세를 가진 태산까지 어떤 것이든 고를 수 있었으며 정원을 선택하면 요정의 정원, 고블린의 정원, 루비 궁의 정원 등이 있었다. 지금껏 세상에 공개된 적 없던 지형들도 많았다.

마력이 깃든, 환각의, 함정의 등의 수식어를 가진 세세한 자연물들까지 선택할 수 있어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의 종류만도 수만 가지였다.

「시간대를 설정해 주세요.」

「던전 내의 기후를 선택해 주세요.」

「워프 위치를 설정해 주세요. 특수한 상황에서만 열리는 워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끌리는 대로 선택하자 모래시계와 함께 안내문이 나타났다.

「환경에 맞춰 던전 생태계가 설정됩니다. 나타날 수 있는 몬스터와 채집 재료들을 재설정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주로 출몰하는 몬스터 유형을 선택해 주세요. (다중 선택 가능)」

「습득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보스 몬스터를 선택해 주세요.」

「보상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시스템창이 보여 주는 몬스터 종류들에 입이 떡 벌어졌다. 온갖 멋지고 강한 몬스터들이 숨을 죽인 채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용이다!! 이건 무조건 드래곤이지!”

“가, 강의진!”

마구 선택하려는 내 손을 잡아챈 주호현이 희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보스 몬스터 설정은 다음 칸인데.”

“응. 알아. 한 층의 잡몹부터 보스 몬스터까지 죄다 드래곤이라면 멋있을 것 같지 않아? 던전 별칭도 생길 거야. 용의 둥지. 어때? 상상만 해도 인기도가 팍팍 오를 것 같지?”

현재 마이너스인 인기도를 100%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선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헌터들이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선 광역 도발이 최고다.

그러나 주호현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스테이지 던전이잖아. 겨우 3층이고.”

“초반 층이 특이해야 다들 보러 오지. 다음 층은 강물 대신 용암이 흐르게 둘까? 좋은 아이템들 많던데 그 사이사이에 숨겨 두면 위험해도 찾으러 오겠지?”

“안 돼.”

“어?”

“다치는 사람이 많을 거야.”

주호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선택지’와 ‘인기도’가 모래처럼 스르르 무너져 내리고 사람과 몬스터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어떻게 이걸 까맣게 잊고 있었지?’

섬뜩함에 꿀꺽 침을 삼키자 슬쩍 날 바라본 주호현이 조용히 말했다.

“네 탓 아니야. 나도 그래. 꼭 인간성이 사라지는 느낌이지.”

“……그렇네.”

주호현이 손을 뻗어 ‘자동 설정’을 클릭하자 해당 층의 난이도가 F급으로 정해졌다. 채집할 수 있는 재료와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자동으로 설정되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넌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죽은 이후에 계속 여기서 지내던 거냐?”

혼자서 몇 달을 지냈다니. 심심했겠다 생각하며 묻는데 주호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내가 눈을 뜬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네가 탑에 들어왔으니까.”

“뭐? 하지만 내 꿈에도 나오고 그랬잖아? 놀이동산에서도 보고……. 나한테 퀘스트도 줬잖아! 기억 안 나?”

“그건…….”

주호현이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은 존재하지만 내가 한 일 같지가 않아. 마치 나도 꿈에서 너를 만난 것처럼.”

“그때 넌 네가 사념체라고 했어. 지금과는 다른 건가?”

“……모르겠어.”

주호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다 시선을 돌렸다.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겠냐. 던전이나 만들자.”

***

주호현은 가이드 경력이 길어서 그런지 확실히 나보다는 던전 조형에 조예가 깊었다. 주춤주춤하다가도 내가 창의적인 시도를 할라치면 재빨리 손을 대 평범하게 만들어 놓는 데 선수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 결과가 그럴듯하기에 입을 삐죽이면서도 놈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막에 고래는 꽤나 괜찮지 않았냐? 엄청 멋있었을 텐데.”

“자이언트 웨일은 사막에선 제힘을 다 내지 못할 거야.”

“칫, 사람들 다치는 게 싫다고 할 땐 언제고.”

“보스 몬스터는 다음 층의 난이도를 경고하는 안전장치이기도 하니까…….”

“……나 식물계 구성해야 하니까 말 걸지 마.”

그렇게 주호현과 내가 손을 모아 얼기설기 짜 맞춘 던전이 20층까지 만들어졌을 무렵, 던전 문이 열렸다.

여태껏 텅 비어 있던 던전에 헌터들이 몰려 들어오는 모습을 주호현과 나는 나무 그늘에 기대 티브이 보듯 구경했다.

“와, 사람 존나 많네. 이렇게 보니까 새롭다.”

“전투계 외에도 많이 들어온 것 같아.”

“아무래도 초반 층이니까. 어어? 보스 벌써 죽었다. 새끼들. 보상 얻으려고 아주 혈안이 되어 있네.”

「인기도가 137 올랐습니다!」

「인기도가 342 올랐습니다!」

「인기도가 870 올랐습니다!」

던전 내에 우리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기에 헌터들이 즐기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수치도 계속 올라 드디어 마이너스를 벗어났다.

“드디어 1%가 됐어! 이대로라면 100%도 금방 찍겠는데?”

“초반인 걸 감안해도…, 응. 빠른 것 같아.”

시스템 화면으로는 소리까지 들리진 않았으나 해당 층의 ‘가장 첫 감상’과 ‘가장 많은 평가’는 따로 전해졌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만 기다릴 정도였다.

띠링!

[1층 고객의 소리 : “*발! 빨리 와!”]

[1층 고객의 소리 : 눈이 내리지 않아서 좋아요.]

[2층 고객의 소리 : “여기 꽤 괜찮다?”]

[2층 고객의 소리 : 전보다 더 쉬워요.]

“전보다 더 쉽대잖아! 내가 보스 더 세게 하자고 했지!”

“……미안.”

[3층 고객의 소리 : “강의… 찾아….”]

“응?”

주호현이랑 티격태격하는 사이 지나간 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3층 고객의 소리 : “정원이다! 여긴 처음 발견된 공간이야.”]

[3층 고객의 소리 : 신비로워요.]

“잘못 들었나?”

이후에도 어렵다, 쉽다. 밸런스가 맞지 않다. 묘하게 매력 있다 등등 여러 평가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아직 20층까지밖에 만들지 않았는데 뚫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 역시 더 어렵게 만들었어야 했다고 아쉬워하는데 주호현이 어떤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야, 뭐 해?”

“여기…….”

주호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검은 로브를 쓴 수십 명의 헌터가 보였다. 순간 폰투스 교단 놈들인가 싶어 흠칫했으나 자세히 보니 ■■■■■ 특유의 능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비슷한 놈들인가?’

놈들은 엄청난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약삭빠르게 그 뒤를 따라붙은 다른 헌터들의 힘까지 합치니 초반 층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끊임없이 울리는 고객의 소리의 범인이 바로 이놈들이었다.

“곧 10층까지 뚫리겠는데…….”

놈들의 무자비한 진격에 내가 성심성의껏 꾸민 던전은 파괴되고 몬스터들은 추풍낙엽처럼 스러지는 중이었다. 던전 리셋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았기에 놈들이 뚫은 그 길 그대로 지름길이 생겨 능력이 딸리는 일반 헌터들까지 줄줄이 다음 층으로 와 ‘별거 아니네.’, ‘생각보다 쉬운데?’ 등으로 해당 층의 고객의 소리가 바뀌었다.

애써 만든 던전을 무시하는 의견들에 부아가 치밀었다. 홱 주호현을 돌아봤다.

“저 새끼들 막아야 해.”

“…….”

“21층에 용의 둥지랑 용암 쓰자.”

고민하던 주호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헌터들을 막으려면 그 정도는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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