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97.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저주의 말을 내뱉던 혀가 잘려 나갔다. 수십 번 중첩되던 디버프를 겨우 이겨 내던 헌터들은 그제야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놈을 죽였다!』
『이제야 살 것 같군. 저것 좀 봐! 끔찍하기도 하지. 신의 저주를 받은 게 분명해.』
『숨겨진 보스가 있다니 누가 상상조차 했겠어?』
『미스틱, 이제 완전히 끝난 것인가?』
헌터들이 모두 같은 곳을 올려다봤다. 그곳에는 성산하가 서 있었다.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성산하는 한쪽에서 보호받고 있던 작은 소녀에게 다가갔다.
『아니. 이제 성좌를 제 자리로 돌려보내야지.』
소녀 앞에 멈춰 선 성산하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고 물었다.
『어떻게 하는지 알겠어? 우리가 곁에 있을게. 무서워할 필요 없어.』
『응. 내게 말을 걸고 있어……. 무섭지 않아.』
성산하가 손을 내밀었다. 소녀가 천천히 하얀 장갑 위에 손을 올렸다.
소녀가 눈을 감자 바닥에 덩굴과 꽃이 뻗어 나가며 아름다운 마법진이 그려졌다. 워프가 빛나더니 순식간에 지하에 있던 모두가 제단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정말 신기해.』
『벌써부터 성좌의 힘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가?』
헌터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 파악을 하는 사이 손을 놓은 소녀는 혼자 천천히 제단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성산하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단의 가장 위까지 다다른 소녀가 품에서 붉은 장미를 꺼냈다. 아직 다 피지 않은, 봉오리 상태의 장미였다. 벨라의 장미정원에 핀 수십만 송이 중 성좌의 유지를 품은 단 한 송이를 찾느라 이탈리아의 각성자들이 몇 주간 애를 썼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장미를 보자 그때 일이 생각났는지 헌터들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소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장미를 제단에 바쳤다. 아무런 지지대가 없음에도 꼿꼿이 선 장미가 아주 천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만개한 장미는 새 생명을 얻은 듯 가볍게 꽃잎을 털어 냈다. 한 줌 바람도 불지 않음에도 흔들리는 꽃잎을 멍하니 바라보던 헌터들은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는 진동을 알아채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제단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라우라!!』
헌터들이 흙먼지 사이로 떨어지는 소녀에게 달려갔다. 허공을 도약한 한터가 라우라를 받아 안았다.
『미스틱,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미스틱!!』
몸을 감싸는 무형의 기운에 당황한 헌터들이 성산하를 찾았지만 그는 무너지는 제단 사이에서 푸른 빛을 내뿜는 장미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장미가 사라짐과 동시에 헌터들은 바깥으로 플릭당했다.
먹먹하던 귀에 아득하게 들리던 소리가 점점 커지며 엄청난 환호성이 되었다.
『와아아아아!!!』
헌터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탑이 빛이 되어 무너지고 있었다. 그제야 성공을 실감한 이들이 마음 놓고 기쁨을 즐겼다.
『미스틱! 성공이야! 당신 덕에…….』
한 헌터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지만 이미 성산하는 자리에 없었다.
***
“이 주 만이군. 이탈리아 여행은 잘했어?”
“여행은 무슨……. 산하 님이 탑에 들어갔는데 마음 놓고 여행하겠습니까? 다친 곳은 없으시죠?”
“힐러가 다쳐서야 되겠어? 모양 빠지게.”
씩 웃은 성산하가 차에 올라탔다. 이초가 창밖을 내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축제 분위기겠네요. 그나저나, 산하 님. 곧바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에르네스토와의 일은…….”
“탑 안에서 얘기 다 끝냈어. 카디프로 직접 지원 오겠다더군.”
“바인 길드를 데리고요? 그거 잘됐네요.”
“영국이 환영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뭐, 알아서들 하시겠지.”
어깨를 으쓱이던 성산하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남산 탑…. 아, 이젠 탑이 아니군. 남산 던전은 어떻게 됐지? 마지막 층에 문은 있어? 제단이 있는 방으로 진입은 가능하던가?”
“그게…….”
우물쭈물하던 이초가 곤란한 낯으로 입을 뗐다.
“아직 12층까지밖에 진입 못했습니다. 남산 던전의 난이도가 매우 높아 오르는 게 쉽지 않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더 늦네요.”
“……들어간 지 얼마나 됐지? 사상자는.”
“다행히 사망자는 없습니다. 다만 지형이 험하고 디버프와 독 효과가 막강해 전투 불능이 된 길드원들이 많은 탓에 속도가 나지 않고 있습니다.”
성산하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찌푸린 미간에 이초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던전 외에 다른 방해는 없습니다. 특히 폰투스 교단이라든가…….”
“놈들은 지금 다른 탑들을 막느라 혈안이야. 이미 신체가 사라진 남산 던전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을 거야.”
“그렇습니까.”
“일단은 무리하지 말라고 전해.”
성산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가 봐야겠군.”
***
[8층 고객의 소리 : 다음 층이 궁금해요.]
[9층 고객의 소리 : 갑자기 왜 이래요. 밸런스 *망했어요.]
[12층 고객의 소리 : 여기가 사실상 마지막 층.]
“으하하하! 당연하지. 이 강의진 님의 던전이라고. 쉬울 리가 없잖아!”
11층 화산정원과 12층의 용의 둥지는 착실하게 헌터들의 진입을 막았다.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직진하던 놈들이 그곳에서 고전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난이도를 올리는 데 동의하긴 했지만 마음이 영 편치 않은지 주호현은 중반 층들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마지막 층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죄책감 때문인지 마지막 층인 35층은 유례없이 아름다운 던전으로 탈바꿈되는 중이었다. 저 물러 터진 놈이 어떻게 저런 섬세한 작업을 잘하는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지? 너 진짜 잘한다. 예전에 알았으면 내 포션 병 디자인 맡겼을 텐데. 공방 표지판이랑 포장지에 쓸 로고도 만들기로 했었는데 그것도 맡겼으면 잘했을…….”
대수롭지 않게 꺼냈지만 곧 짙은 그리움이 되어 돌아온 것들에 말끝을 흐렸다.
‘공방은 어떻게 됐으려나. 구름이는…… 다들 잘 지낼까.’
이젠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잊어버리는 게 심신의 평안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미련을 버리기 힘들었다.
‘씨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입술만 삐죽대는데 갑자기 말을 않는 걸 이상하게 여겼는지 주호현이 옆을 돌아봤다. 내 모습을 보더니 던전을 꾸미던 놈의 손이 멈췄다.
“시간 지나면 무뎌질 거야. ……물론 그래도 닳지 않는 것들은 있지만.”
위로 뒤에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와닿지도 않는 위로보다 더 궁금한 뒷말에 고개를 들었다.
“……뭔데.”
“응?”
“뭐냐고. 시간 지나도 닳지 않는 게.”
“아….”
잠시 멈칫하던 주호현이 시스템창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꾸미던 가장 아름다운 던전이 그곳에 있었다.
“수윤이…….”
“류수윤?”
“어떻게 이렇게 만드냐고 했지. 수윤이 생각하면서 만들었어. 그 애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으에엥?”
콩깍지가 씌어도 아주 단단히 씌었다. 류수윤이 다정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미남이긴 했지만 솔직히 저 정도로 아름다운 건 아니었다.
‘성산하라면 모를까.’
그래, 성산하라면 저기랑 아주 잘 어울린다. 그럼 그럼.
이상한 소리를 냈다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이해가 가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던 주호현이 이리 오라며 제 옆을 톡톡 쳤다.
“앉아 봐. 보여 줄 게 있어.”
“뭔데?”
주호현이 아이템 창고에 들어가자 시스템창에 화려한 장비 아이템들이 펼쳐졌다.
이걸 처음 봤을 땐 ‘아이템이 잘 나오는 던전’으로 소문내 인기도를 올릴 계획이었다. 온갖 고급 장비 아이템들을 몬스터들에게 쥐여 주자는 내 말은 주호현에게 거절당했다. 장비 가치가 떨어져서 인플레이션이 온다나 뭐라나……. 난 이미 죽었으니 내 알 바 아니라고 하려다 주호현의 눈빛이 단호해지는 바람에-이 새끼가 요즘 형인 척한다. 자기가 먼저 태어났다는데……. 흥, 개소리. 난 절대 안 믿는다.- 특별히 내가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어차피 던전 인기도나, 몬스터의 레벨과 등급에 따라 배당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 정해져 있어서 어차피 내 계획은 이뤄지지 못할 일이었다.
‘그림의 떡이지 뭐…….’
심드렁하게 화면을 보는데 주호현이 갑자기 화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야! 너 뭐 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다시 빠져나오는 주호현의 손에는 장비가 쥐어져 있었다.
“미, 미친! 어떻게 한 거야?”
“오늘 아침에 알았어.”
주호현의 손에서 서둘러 활을 건네받았다. 손에 잡히고 화살도 쏴지긴 했으나 아무 스킬도 사용할 수 없었고 일정 거리 떨어지자 화살도 사라져 버렸다.
“에이, 뭐야. 제구실도 못하잖아.”
“우리가 성좌라 사용할 수 없는 것 같아. 하지만 만지고 다룰 순 있잖아…….”
주호현이 장비창을 끄고 채집 아이템창을 열었다. 시스템창에 한가득 찬 재료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건…….”
“포션 만드는 거 좋아하잖아. 혹시, 여기서도 만들 수 있을까 해서…….”
“씨발, 형!!”
주호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더 이상 스킬은 사용하지 못할 테지만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 포션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신나 폴짝폴짝 뛰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우르릉하고 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유독 밝은 빛이 빛나고 있었다.
“저긴…….”
“석판이 있는 곳이야.”
“빨리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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