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209.
웃기시네. 삼 개월 후면 이미 탑으로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콧방귀를 뀌니 성산하는 어쭈 하며 머리에 난 뿔을 툭 건드렸다. 머리를 흔들어 손을 털어 내는데 갑자기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하도 말이 많아 잠시 꺼뒀던 성좌들의 대화창이었다.
[아쿠벤스] : 됐다! 보인다 보여!!
[스피카] : 의진~ 안녕! 세상에, 그새 많이 컸네!!
[아쿠벤스] : 카스토르!! 우리 보여?
으엥? 이게 왜…….
갑자기 고개 들어 허공을 바라보자 성산하가 의아한 낯으로 나를 불렀다.
“…의진아?”
[주벤엘게누비] : 카스토르는 아래에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보이겠나.
[카스토르] : 보이다니 무슨 소리야? 내가 보여?
[사달멜리크] : 주벤엘게누비가 시스템을 조작해서 널 볼 수 있게 만들었어.
[카스토르] : 나는 너네 안 보이는데?!
[주벤엘게누비] : 그쪽에선 여길 볼 수 없다니까.
시스템이 CCTV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불안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성산하가 나를 들어 안았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힐을 사용했는지 성산하의 손에서 따듯한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딱히 변화가 없자 성산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상 수상한 티를 낼 수 없어 성산하의 품에 가만히 안길 수밖에 없었다.
[카스토르] : 언제부터 봤던 거야?
[스피카] : 방금 전에 성공했어. 주벤 할배가 며칠 동안 매달려 있었거든!
[주벤엘게누비] : 카스토르 자네가 없는 사이 새로운 성좌들도 만났다네! 인사 나누게.
[알레샤] : 안녕. 난 알레샤야.
[알게디] : 나는 알게디.
[카스토르] : 아. 호주랑 캐나다! 올라간 거 들었어.
[알레샤] : 직접 만나 인사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폴룩스랑 비슷하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카스토르] : 내가 더 잘생겼어.
[폴룩스] : 의진아 다친 곳은 없지?
[루크바트] : 다치긴, 털에 윤기가 흐르는 걸 봐! 완전 길들여진 몬스터 다 됐네. 다 됐어!
[카스토르] : 몬스터는 누가 몬스터라고! 다시 돌아갈 거라니까!!
[사달멜리크] : 언제 올 수 있어? 아직 돌아오는 방법도 모르잖아.
[스피카] : 맞아. 보고 싶다구. 의진.
[레굴루스] : 옆에도 몬스터인가? 저 양 말이야.
[아쿠벤스] : 돌아올 생각은 있는 거지?
성좌들의 재촉에 귀까지 아파 오는 것 같아 발로 귀를 털털 털었다.
‘주호현이랑 둘이 있을 땐 조용했는데.’
성좌가 열이나 되니 정신이 없었다.
[카스토르] : 나도 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 남았을 뿐이야. 이것만 해결되면 바로 갈 거야.
[주벤엘게누비] : 문제라는 게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나?
[카스토르] : 남은 탑들 때문에. 제주랑 뭐…….
[레굴루스] : 제주라면… 하말이었던가.
[아쿠벤스] : 카스토르 너 혼자서 그걸 도울 생각이었던 거야? 재밌겠다! 나도 가고 싶어
[알게디] : 재미있을… 일이 아니지 않나……?
[사달멜리크] : 아쿠벤스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
시끌시끌한 성좌들 사이에서 주호현과 벨라만 조용했다. 고민하다 더는 숨길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주호현과의 개인 메시지창을 열었다.
[카스토르] : 주호현. 내가 지금까지 말 안 한 게 있는데.
***
대자로 벌러덩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배를 쓰다듬으려는 놈들이 하도 많아 웬만해선 배가 보이게 눕지 않았는데 오늘은 온몸에 진이 빠져 어쩔 수가 없었다.
아까 나눴던 주호현과의 짤막한 대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멍청한 놈…….’
지금까지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주호현은 구름이와 제주 던전에 대한 얘기를 듣고도 내 탓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는 괜찮다고, 꼭 구름이를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단 말뿐이었다.
‘류수윤을 그렇게 기다리면서 뭐? 의진이 너는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주호현 이 멍청한 놈. 미련해 빠진 새끼!’
하도 답답해 마구 발버둥을 치다 벨라와의 메시지창에 들어갔다.
[카스토르] : 누나. 아직이야??
[스피카] : 다들 아는 게 없대. 알레샤랑 알게디도.
[카스토르] : 레굴루스도??
[스피카] : 레굴루스랑 주벤엘게누비는 호현과 같이 있어서 아직.
[스피카] : 여기보단 아래에서 찾아보는 게 빠르지 않을까 :(
벨라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가 않았다. 엠바고니 뭐니, 한참 후에야 풀리는 정보도 있고 아예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뉴스로 뭔가를 얻기엔 한계가 있었다.
‘헌트로폴리스라도 들어가 봐야 하나?’
승연이나 수철이 휴대폰을 훔쳐서…. 근데 이 발로 자판을 칠 수 있으려나. 당연한 의문에 가만히 발을 들어 바라봤다. 복슬복슬한 털 한가운데 커다란 분홍 발바닥과 위로는 사람 손톱보다 작은 손가락 네 개. 휴대폰을 부스는 거라면 몰라도…….
한창 고민 중이던 때, 잠시 일을 보러 나갔던 성산하가 이초와 함께 돌아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이. 드디어 찍었다.”
“크르르르…….”
하필이면 배를 보이고 누워 있을 때!
신난 표정으로 실실 웃는 이초를 노려보는데 놈이 얄미운 표정으로 말했다.
“짖어도 소용없어. 이미 찍었거든. 나연이 보내 줘야지.”
“그만 놀려. 다 알아듣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알아들으니까 저런 표정이 나오죠. 고등급 몬스터라는 거, 정말 만만히 볼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혀를 내두르며 고개 젓던 이초가 내 곁에 앉는 성산하를 보며 물었다.
“오늘 여기서 주무실 겁니까? 요즘 공방에서 자주 주무시는데 그럴 바에 아예 몬스터를 집으로 데려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겠지. 조금만 더 크면.”
“그럼 자료는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내일은 저 대신 가은이가 오는 거 아시죠.”
테이블에 서류 봉투와 태블릿 하나를 올려 둔 이초가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대충 자료를 훑던 성산하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옆에 붙은 손님 방으로 향했다.
“이제 자러 가자.”
“웡.”
***
한밤중,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내 곁에는 성산하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온몸의 기척을 죽인 나는 살금살금 움직여 따끈한 성산하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까 룬과 루트에게 미리 말해 둔 대로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성산하가 깊게 잠들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나는 침대 아래로 펄쩍 뛰어내렸다.
바람 소리도 나지 않은 완벽한 착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쳐든 나는 당당하게 방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주벤엘게누비] : 카스토르 어디 가나?
[아쿠벤스] : 길드장을 속이고 비밀스럽게 떠나는 모험이다!!
[알게디] : 어딜 가는 걸까요.
한 발 떼기가 무섭게 채팅창이 활성화됐다.
이 새끼들은 잠도 없나. 한껏 질린 표정으로 머리를 휘저어 채팅창을 저 멀리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처박아 두고 복도로 나왔다. 목적지는 내 방,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이었다.
직접 물어보지 못해 그렇지 가장 최신 정보라면 성산하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이초가 ‘자료’라며 준 태블릿이라면…… 무조건 봐야 한다!
타이밍도 좋지, 휴대폰이 너무 작아 고민이던 내게 이초가 태블릿을 쥐여 준 셈이었다!
의자와 협탁, 침대와 창틀을 타고 오르는 기나긴 여정 끝에 나는 목표했던 태블릿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작은 힘에도 구김이 잘 가는 봉투는 멀찌감치 밀어 놓은 채 발바닥의 말랑한 부분으로 태블릿 화면을 클릭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에 잠시 당황했으나 성산하의 개인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자 단번에 풀렸다. 기본으로 뜨는 웹 사이트를 누르자 수많은 폴더가 펼쳐졌다.
「남산 던전」, 「폰투스 교단」, 「O10」, 「제주 던전」, 「천랑」, 「강의진」, 「성좌」…….
‘제주 던전을 봐야 하나? 아니면 성좌……? 폰투스인가?’
아무래도 가장 끌리는 건 ‘강의진’ 폴더였다. 자꾸 눈길이 가는 내 폴더에서 힘겹게 유혹을 떨쳐 내곤 제주 던전부터 보기로 결심했다.
‘끄응…….’
제주 던전부터 찬찬히 읽었지만 하나의 폴더 안에는 이론부터 조사 내용 등 무수히 많은 파일들과 사진 자료들이 있어 내가 원하는 정보를 바로 찾기 어려웠다. 이대로라면 동이 틀 때까지 아무것도 찾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에 휩싸인 내게 가장 위 검색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폴더 하나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해 잘못 누르는 이 발로 글자를 완성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L…… A…….TJ, 아니아니! 선… 성……좌!!’
몇 번이나 다른 문자를 클릭하며 완성한 단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엔터를 눌렀다. 이윽고 화면에 드디어 내가 찾던 자료들이 나왔다.
「성좌가 죽게 되면 그 힘이 임시로 다른 곳에 옮겨진다. 이를 ‘유지’라 칭한다. 다만 이 ‘유지’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미국 S급 헌터들에게 두 번째로 생겨난 성좌의 ‘파편’을 찾는 퀘스트. 함께 생겨난 성좌 지도에 따르면 성좌의 ‘파편’은 ‘성좌’, 혹은 ‘성좌의 유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파편’의 위치가 ‘성좌’, 혹은 ‘성좌의 유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며…….」
홀린 듯 내용을 읽고 있을 때 벼락같이 느껴지는 아주 작은 기척에 흠칫 놀라 온몸의 털이 삐죽 섰다.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다.
“의진아.”
(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