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214.
황당함에 입만 뻐끔대며 목을 더듬었다. 손끝에 잊고 있던 두터운 가죽의 감촉이 만져졌다. 답답한 느낌에 목줄을 잡아당겼지만 빠질 리가 없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풀어 줘.”
“안 돼.”
“장난치는 거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지만 이미 돌아 버린 성산하에겐 통하지 않았다. 다가와 나를 한 품에 껴안은 성산하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절대 안 놔줄 거야.”
행복한 중얼거림은 제게 하는 다짐이자 내게 하는 경고였다. 아득한 절망에 눈을 감았다.
***
[작은 주인 결국 하얀 놈한테 잡혔다.]
[역시 바보군. 주인님이 알면 정말 화낼 거다. 빨리 도망가라.]
[나는 작은 주인이 정말 작을 때가 좋았다. 새끼 같아서 귀여웠다.]
[작은 주인은 정말 작은 게 맞다. 원래도 주인님보다 작았으니까.]
“저리 안 꺼져?! 구경할 거면 도와주기라도 하든지!”
몬스터의 형체를 벗어나서도 성좌인 상태라 그런지 룬과 루트와는 말이 통했다. 몰래 공방에서 도망치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뒤에서 구경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중이었다. 놈들을 노려보며 손을 내저었다.
“이제부턴 진짜 중요하니까 방해하지 마.”
[작은 주인 목을 봐라. 새끼들도 안 하는 목줄을 하고 있다. 캥캥캥.]
[풉. 수치스럽군.]
뒤에서 낄낄대며 저들끼리 웃는 개새끼들을 무시하고 마무리를 했다. 비늘 덩굴로 열심히 꼬아 낸 밧줄에 밀랍 처리까지 마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씨발, 가둬 두면 내가 못 나갈 줄 알고?”
밧줄 끝에 매듭지어 만든 고리를 허공에 몇 번 돌리다 반대편 건물을 향해 휙 던졌다. 다행히 십여 미터 조금 안 되는 기둥 위에 쏙 들어간 고리는 밧줄을 잡아당기자 단단히 고정되었다. 남은 한쪽을 우리 공방 옥상 난간에 칭칭 감고 나서야 손을 털며 속 시원한 한숨을 뱉었다.
이제 비늘 덩굴과 밀랍이 엉겨 붙어 굳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몇 분만 기다리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내 몸을 지탱해 줄 수 있을 거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목줄은 둘째치고서도 엘프목이 나를 공방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산하가 무슨 수를 쓴 건지 아니면 엘프목이 나를 못 알아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담장도 못 넘는데 류수윤의 납골당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 반지만 찾으면……. 만약 그 방법이 통한다는 것을 밝혀내면 그땐 성산하도 내 말을 들어 줄 거야.’
고민하는 사이 밧줄의 경화가 끝났다. 한쪽에서 엎치락뒤치락 장난치던 룬과 루트에게 간다며 인사하고는 훌쩍 난간 위로 뛰어올랐다.
“나 간다!”
[떨어지겠다. 밑에 가서 기다리자.]
[우리가 받아 준다! 작은 주인!]
“안 떨어지거든!”
경화가 끝난 밧줄은 폭이 좁은 것만 빼면 흔들리지도 않고 단단했다.
두 팔을 뻗어 중심을 잡은 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엘프목의 경계와 닿는 지점이라 정신을 집중하는데 위에서 구경하던 성좌들도 불안했는지 걱정스러운 메시지들을 보내는 통에 눈앞이 가려 발을 헛디딜 뻔했다.
“으아아! 씨, 놀래라.”
[아쿠벤스] : 줄이 너무 얇은 거 아냐?
[폴룩스] : 의진아 조심해…….
[알레샤] : 저 빛나는 몸은 어찌할 생각이지?
[주벤엘게누비] : 생각이 있으면 뭐라도 걸치겠지. 그나저나 아무래도 불안…….
[카스토르] : 아 넘어질 뻔했잖아!!
[레굴루스] : 카스토르!! 뒤에!!
으엥?
레굴루스의 메시지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뒤를 돌아보는데 팔짱 낀 채 웃고 있는 성산하와 눈이 마주쳤다.
“의진아. 뭐 해?”
“흐아악! 씨발!”
성산하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배꼽까지 뚝 떨어졌다. 철렁하는 느낌에 놀라 펄쩍 뛰다 발이 미끄러졌다. 허우적대며 중심을 잡으려 애썼지만 이미 미끄러진 몸은 옆으로 기운 후였다. 서둘러 손을 뻗어 줄을 붙잡았다.
“좆…. 될 뻔했네.”
두 손으로 겨우 붙잡고 허공에 매달린 채 위를 올려다봤다. 성산하의 시선은 밧줄 반대편이 묶인 앞 건물을 향해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라니까 그새를 못 참아서 도망을 가?”
“씨발, 그러니까 내가 풀어 달라고 했잖아!”
“풀어 줘?”
성산하가 밧줄 끝을 지그시 밟았다. 힘을 줄수록 파스스 부서지는 밧줄의 모습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씨발, 아니지? 야….”
“풀어 달라며.”
“목줄을 풀어 달랬지 누가 밧줄을…. 으아아악!! 씨발 새끼야아!!!”
공방과 연결되어 있던 밧줄이 끊어지며 그대로 몸이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룬과 루트가 나를 올려다보며 짖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엘프목의 경계를 통과하는 게 느껴졌다. 가까워지는 옆 건물에 눈을 질끈 감는데 손에 붙들고 있던 무게감이 사라지며 몸이 누군가의 품에 폭삭 안겼다.
“…개새끼야.”
“응. 나도 좋아해.”
볼에 닿는 입술의 감촉에 바짝 긴장해 있던 몸에서 한순간 힘이 턱 풀렸다. 미친 새끼…….
그대로 성산하에게 잡혀 방으로 압송된 나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썅! 일단 내 얘기 좀 들어 보고 결정하라고!”
“성좌에 관한 거 아니면 다 들어 줄게.”
“…성좌에 관한 얘기면?”
“하지 마. 안 믿어.”
넌지시 떠본 물음에 돌아온 단호한 대답에 짜증스레 베개를 집어 던졌다.
“다 이유가 있다고! 하루면 된다니까? 딱 하루만 나갔다 오면…….”
“절대 안 돼.”
가볍게 베개를 잡아챈 성산하를 노려봤다.
“씨발. 맘대로 해라. 난 갈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 거니까…….”
불쑥 다가오는 놈의 모습에 흠칫 뒤로 물러나는데 성산하가 내 위로 덮치듯 몸을 겹쳐 내리며 물었다.
“무슨 수를 쓸 건데?”
“뭐?”
“우리 의진이 미남계라면 넘어가 버릴 수도 있고.”
짙은 웃음을 짓는 입술을 보다 어느새 가슴 위로 올라온 손을 혼란스럽게 바라봤다.
미, 미남계? 그게 뭐지. 난 이미 미남인데 여기서 뭘 더 해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자 성산하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풉, 아하하. 강의진 너…….”
“아씨! 뭔데!”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한참을 웃은 성산하는 진정하듯 나직한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쉬운 남자 되면 안 되는데.”
“미쳤냐? 혼자 쳐 웃다가 웬 헛소리야.”
“말해 봐. 뭐 때문에 그러는지.”
“…뭐?”
“말할 생각 없으면 말고.”
갑작스러운 물음에 멈칫하다 몸을 물리려는 성산하의 모습에 다급히 손을 뻗어 옷자락을 붙잡았다.
“구, 구름이 때문에!”
“…하말?”
“그래! 구름이를 살리고 싶어서 그랬어. 구름이 대신 주호현 같은 류수윤의 사념체, 그러니까……. 아니 이씨….”
주호현과 류수윤의 이름이 나오자 성산하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를 바라보던 성산하가 허리를 주욱 당겨 제 허벅지 위에 나를 앉혔다. 어색한 자세에 몸을 비틀던 나는 시선을 맞춘 성산하의 진득한 눈빛에 차차 움직임을 멈췄다.
“어떻게 된 일인지 처음부터 제대로 다 얘기해.”
“처음부터?”
“그래. 처음부터. 남산 던전에서 네가 날 버리고 갔던 때부터.”
“……버리긴 무슨.”
말할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막상 판을 깔아 주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 필요하다고 생각된 부분만 꺼내 말했다.
“조디악 시스템이 있어. 원래 지구를 지키던 거래. 그런데 폰투스 놈들이 우주 구석에 있던 ■■■■■를 불러 내서…….”
“…뭐라고?”
“■■■■■. 인간은 발음 못 하는 거니까 대충 알아들어. 여튼 그 새끼가 지구로 소환되다가 조디악이랑 부딪혀서 둘 다 부서진 거야. 열두 조각으로. 그래서 그 새끼 조각들도 부수고 조디악의 성좌들도 다시 살려야 하는 건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그중 하나야. 카스토르.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그날은…….”
성산하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날 기억을 떠올리는 게 분명한 표정을 마주 보기 힘들어 시선을 떨궜지만 그래 봤자 성산하 품 안이었다. 마음이 불편해 은근슬쩍 떨어지려 바르작거렸지만 허리를 꽉 안은 손은 떨어지질 않았다. 속으로 푹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하말은, 사실 구름이가 아니라 류수윤이야. 구름이는 조각이라 류수윤을 살리기 위해 제물로 바쳐야 하는 거고……. 그래서 살리고 싶었어. 위에서도 계속.”
“성좌가 되어서도 여길 볼 수 있었어?”
“아니, 남산 던전만.”
“어쩌다 내게 온 거야? 하말…. 구름이 때문에 온 건가?”
“그건 아니야. 내려오는 방법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눈 떠보니까 몬스터인 채였다고. 그리고 네가 날 만나자마자 발로 찼잖아!”
“그건…….”
성산하의 눈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곤란한 웃음을 지은 놈은 대답을 회피하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도 고민 중이었어. 다른 탑들의 경우를 모두 찾아봐도 하말 대신 바칠 제물을 찾을 수 없었거든. 구름이를 살릴 방법을 알고 있는 거야?”
“응.”
“뭔데?”
“류수윤의 납골당에 가야 해. 거기서 가져올 게 있어.”
성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네. 같이 가자.”
“응.”
그리고 성산하는 나를 안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놈의 등판을 내려다봤다.
‘이 새끼가 왜 조용하지?’
하말만 해결됐다고 끝이 아니라는 걸 나도, 성산하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결국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성산하. ……나중에 나도 남산 던전 가야 하는 거 알지?”
“아니. 네가 거길 왜 가.”
“이 새끼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말했잖아! 내가 카스토르라고!”
“그래서?”
“성좌들이 있어야 조디악 시스템이 다시 정상 가동…….”
“꼭 열두 명 다 있을 필요 없잖아.”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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