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217.
떨떠름한 낯으로 류수윤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번쩍 하고 주위가 환히 밝아졌다. 뒤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온기는 익숙한 듯하면서도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른하고 붕 뜨는 기분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이 꺾여 풀썩 주저앉을 뻔한 나를 성산하가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을 줘 받쳐 안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눈부시고 찬란한 광채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뭐야? 네가 한 거야?”
“……역시 안 되는 건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이초가 허겁지겁 달려와 물었다.
“사, 산하 님. 그거 서, 설마. 그겁니까?”
“그거? 그게 뭔데.”
“맞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안 듣는군.”
“뭐야, 뭔데 그래?”
성산하의 팔을 붙잡고 대답을 종용하자 망설이던 놈이 입을 열었다.
“…레저렉션.”
“레저렉… 뭐어어?”
찬찬히 곱씹던 나는 곧 그게 뭔지 깨닫고는 입을 떡 벌렸다. 레저렉션이라면 성산하가 갖고 있던 엑스트라 급 스킬 아닌가. 그것도 무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기 스킬!
“너, 너 그거 어떻게 얻었어? 해금 조건 모른다며! 그사이에 풀어낸 거야?”
“응.”
“어떻게? 엑스트라 급이면 얻기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게다가 엑스트라 급 스킬을 얻은 것은 세계 최초 아닌가?-물론 성산하보다 한발 앞서 엑스트라 급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바로 세계 유일의 포션 마스터인 나, 강의진이 있었지만 이왕 성좌가 되었으니 최초라는 칭호는 양보할 계획도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자 작게 웃은 성산하가 내 이마 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답했다.
“응. 조금 고생했지.”
“…그런데 지금 그걸 나한테 써 본 거야?”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황당하게 묻자 성산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하말도 찾았으니, 하나쯤 빠져도 문제가 없겠다 싶어서.”
태연자약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놈이 나의 부활을 빙자한 카스토르 탈취-및 조디악 파괴-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호현이는 어떤 식으로 지냈는데요?”
“어떤 식으로 지내긴, 그야…….”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하말의 석판으로 가 하염없이 류수윤을 기다리던 주호현의 모습이었다. 틈만 나면 네놈 새끼 구역에 처박혀 훌쩍댔다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으나 주호현이 빌빌댔다는 말을 왠지 내 입으로 하기 싫어 입술을 삐죽이다 말을 돌렸다.
“우리끼리 모여서 놀았지 뭐. 그리고 던전. 성좌들이 자기 던전을 꾸밀 수 있었는데 그것도 하느라 바빴고. 주호현이 생각보다 손재주가 있었거든.”
“아하하. 호현이가 그랬어요? 귀여워라….”
“네가 거길 봤어야 했는데. 주호현이…….”
말하던 도중 아닌 척 듣고 있던 이초가 당황해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잠, 잠깐만요. 의진 님. 설마……. 남산 던전의 그것, 의진 님 작품이었습니까? 그 미친- 아니, 죄송합니다. 엄청난 난이도의 던전 말입니다!”
“남산 던전? 응 맞아.”
“허어어억…….”
고개를 끄덕이자 이초가 좌절하듯 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곁에서 헛웃음을 뱉은 성산하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하, 강의진 너…….”
“하지 마! 왜, 뭔데 그래?”
난감하게 시선을 피한 청이 대신 눈을 둥글게 휜 제로가 말했다.
“초반으로 낚고 중반에서 사람 잡아먹는 미친 던전. 희대의 밸런스 폭망 던전, 빛 좋은 개살구, 한 달 만에 화제성과 비호감 1위를 달성한 바로 그 남산 던전 말입니까.”
제로의 입에서 줄줄이 이어지는 악평들에 입만 뻐끔대는데 이초도 합세해 말했다.
“저희 천랑이…. 그 던전을 뚫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오. 의진님…!”
“그, 그건……. 씨발, 그러니까 왜 들어오는데! 너희 때문이잖아!”
괴물 같은 속도로 뚫고 들어오는 천랑 탓에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나만 악당 취급을 받는 게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저 새끼들은 결국 마지막 층까지 다 뚫었잖아! 나는 애써 만든 던전도 망가지고, 개새끼인 채로 떨어져 수모나 당했는데!!
결국 천랑을 막지도 못한 내게 남은 건 던전에 대한 악평뿐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킥킥대며 웃던 성산하가 내 어깨를 감싸 당기며 말했다.
“그만해. 던전이 왜. 멋지기만 하던데.”
“동정 따위 필요 없어. 이미 욕 처먹은 거 다 들었으니까.”
“정말이야. 세계의 여러 던전을 돌아다녀 봤지만 그런 특별한 던전은 처음이었어. 직접 만들었다니 대단하던데. 특히, 물 대신 용암이 흐르던 곳…. 거긴 약한 헌터들은 버티기 힘들겠지만 보기 힘들던 몬스터들도 많고 자생하는 마법 식물들도 많아 좋아하는 각성자들이 아주 많을 것 같던데?”
“……11층 화산 정원이야.”
“어울리는 이름이군. 그리고 용들이 아주 많이 날아다니던 곳도 멋있던데. 내가 알기로 그 정도로 드래곤이 많은 던전은 여태껏 없었어. 아직 진입한 헌터가 적어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문이 난다면 세계적으로 찾아오는 명물이 될 거야. 물론 네가 만들었는지 주호현이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내가 만들었지!”
성산하의 치사에 어깨가 으쓱해 곧바로 대답했다. ‘특별’하고 ‘대단’하며 ‘세계적으로 찾아오는 명물’이라는 말에 정신이 팔려 구석에서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이초와 제로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신이 나 한창 던전을 제작한 동기와 제작 과정들을 설명하던 차, 성산하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의자와 딱 붙였다. 곧바로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급하게 멈췄다.
‘갑자기 뭐지?’
벌써 도착했나 싶어 창밖을 내다봤지만 아직 도로 위였다. 그때 청이가 말없이 문을 열고 내리고 연이어 제로도 불만 없이 따라 내렸다.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성산하가 나와 류수윤을 살피다 내 로브에 달린 모자를 푹 씌우며 말했다.
“안에서 기다려.”
성산하까지 내리고 뒷좌석에는 이초와 류수윤, 나 셋이 남아 눈을 굴렸다. 창문에 붙어 밖을 바라봤지만 뭐가 보이진 않았다.
“뭐냐? 대체 뭔데? 넌 알아?”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가만히… 가만-히 차에서 기다리죠.”
이초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류수윤은 그저 태연한 낯이었다.
그때, 엄청난 굉음과 함께 차 옆으로 무언가 떨어졌다. 무형의 쉴드 덕에 차체는 무사했지만 진동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큭, 대체 뭐야? 던전 브레이크라도 터졌나?”
“의진 님. 이거 아무래도…….”
태블릿을 보던 이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초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바깥에 하나둘씩 에스퍼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진이네.”
류수윤의 여상한 목소리에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한서진이라니, 한서진이라니!
하필이면 이 차 안에 한서진이랑 같은 팀이었던, 서류상 뒈진 사람이 둘이나 타 있었다. 혼란에 빠져 모자를 눌러쓰고 몸을 숨기려 몸을 웅크리는데 머릿속에 한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있는 거 아니까 나와요.]
“젠장…….”
[형 때문에 왔다는 거 알잖아요. 피할 생각 말고 빨리 나와.]
[얘기만 하러 온 거예요. 안 나오면 에스퍼 부대 부를 수밖에 없어. 나는 센터 가서 얘기해도 되는데 형은 싫을 거잖아.]
씨발, 알겠어. 알겠다고! 고민하던 나는 달칵 차 문을 열었다.
“의진 님……!”
이초의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걱정 말라며 손을 휘저은 채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귀신같이 성산하가 앞에 나타났다.
“강의진 들어가 있어.”
“이미 걸렸다 새끼야.”
인상을 찌푸린 성산하의 어깨 너머로 한서진이 보였다. 로브 아래로 언뜻 보이는 내 얼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형, 대체 그게 무슨 꼴…….”
“고속도로에서 대체 이게 무슨 지랄이야. 미친 새끼야.”
“나는, 난 형이 살아 있대서…….”
한서진이 쉴드에 막힌 듯 어느 곳에 멈춰서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어느새 쉴드를 빙 두르고 총을 겨눈 에스퍼들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서진에게 다가가려는데 성산하가 날 붙잡았다.
“강의진.”
“밖으로 안 나가면 되잖아. 난 네 쉴드 믿어.”
손목을 잡은 성산하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한서진에게 다가간 나는 쉴드로 된 벽을 사이에 두고 놈을 마주 봤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던 한서진이 주춤했다.
“넌 이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거로 보이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내가 성좌를 가지고 있었고 남산 탑의 제물이 되기로 했을 뿐이야. 지금은 어쩌다 잠깐 내려오게 된 거고…….”
흘깃 뒤에서 지켜보는 성산하를 돌아보다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어차피 다시 돌아가야 해. 그러니까 너도 이런 쓸데없는 짓 할 필요 없어.”
“……거짓말.”
“뭐?”
“성산하가 형 빼돌린 거죠. 또 전처럼 정체 숨기고 살아가려고 그러는 거잖아.”
“뭐? 야! 장난하냐? 너도 이젠 탑이랑 성좌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알아도, 형 말은 안 믿어요.”
이 새끼들이 대체 뭐가 문제지? 죄다 내 말은 안 믿는대.
황당해 이마를 짚었다.
“설령 진실이라고 해도, 제가 살릴 방법 찾아낼게요. 꼭 찾아줄게요. 나랑 같이 센터로 가요.”
“씨발, 필요없어!”
잠깐 돌아 버린 성산하 대신 한서진은 내 말을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한 게 오판이었다.
에스퍼들의 총구가 성산하와 제로, 청이를 향했다. 헌터들의 눈빛이 변했다.
“…한서진. 너 진짜 이럴 거냐?”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뒤에서 달칵하고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쉴드 주위를 두르고 있던 모든 에스퍼들이 털썩 쓰러졌다.
“이게 무슨……!”
당황한 낯으로 주위를 살피는 한서진의 눈이 커다래졌다.
“오랜만이야. 서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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