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219.
그럼 그렇지. 조용히 지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달려온 수철이와 윤하얀 가족까지 합세해 공방은 한바탕 울음바다로 변했다. 미안함과 민망함, 안쓰러운 감정이 동시에 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섣부른 위로도 쉽지 않았다.
겨우 소란이 지나가고 눈이 팅팅 부은 백다인이 물었다.
“의진 님. 몸은 괜찮으신 거죠?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언니는 저게 괜찮아 보여? 아저씨가 완전 새파랗게 블루베리가 됐는데!”
큭, 블루베리라니.
다혜의 외침에 머쓱하게 내 몸을 둘러봤다. 푸르스름하게 빛이 나는 것이 확실히 이상한 꼴이긴 한데.
“다혜야. 그럼 못 써. 너도 들었잖아. 의진 님이 성좌라 어쩔 수 없다고. 그리고 자꾸 버릇없게 굴지.”
“…성좌가 뭔가 중요해. 아저씨가 먼저였잖아. 게다가 이제는 돌아왔으니까 상관없는 거 아니야?”
뚱하게 투덜거리는 다혜의 말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의진 님. 다시 돌아오신… 거 맞죠?”
“이제는 계속 공방에 계시는 거죠.”
반짝반짝 빛나는 눈들이 대답을 종용했다. 성산하에게 사주라도 받았나 싶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시선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류수윤을 바라봤지만 놈은 그저 품에 안은 구름이를 쓰다듬으며 방관자처럼 관조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을 더 바라냐 묻는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공방에 남는 게 좋다! 당연한 거 아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다른 방법도 없었다. 지난 일에 미련 가져 봐야 힘들기만 할 게 뻔하다. 할 말이야 정해져 있었지만……. 다만 이들이 조금 덜 상처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말을 고르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탈탈 털었다.
그때 성산하가 다가와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럼. 나머지 탑이 사라지면 더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을 거야.”
“뭐? 야, 성산하…!”
당황해 성산하를 잡아끌어 속삭였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꼭 열두 개 다 있을 필요는 없다고.”
“너 아직도 그 생각을……!”
황당함에 말도 나오질 않았다. 입만 뻐끔대는데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껴졌는지 다른 사람들도 당황한 눈빛을 교환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사장님이 안정적이지 않기라도 하단 말입니까?”
진명이의 물음에 여태껏 꾹 입을 다물고 있던 승연이가 말했다.
“의진 님은 다시 희생하실 생각이세요.”
“예?”
“네에에?”
승연이의 말에 다들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셨잖아요. 탑도 사라졌고…. 이제는 모두 잘 해결된 것 아니었나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또 희생하실 일이 뭐가 있어요. 이미 그렇게나 숭고한 희생을 하셨는데…….”
“전… 의진 님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도요!”
“가지 마세요. 사장님.”
“맞습니다. 아무도 사장님께 희생을 강요할 수 없어요.”
한마디씩 말을 거들던 이들은 점점 흥분하더니 결의에 차 계획까지 세우기 시작했다.
“의진 님을 숨길 수 있을까요?”
“공방이 안전하긴 하지만, 지금 너무 눈에 띄는 형태셔서…….”
“외형 변형 아이템은 찾아보면 많아. 문제 없어.”
“엄마…. 저번처럼 사람들이 찾아와서 시위하면 어떡해요?”
“……이번엔 엄마랑 친구들도 찾아와서 지켜 줄 거야. 아빠도 도와줄 거고.”
“애초에 말도 안 됐어요. 인신 공양이라며 사람을 사지로 몰다니.”
“이번엔 우리도 온 힘을 다해서 의진 님을 지켜요.”
성산하가 어쩔 거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다급히 소리쳤다.
“이 바보들이! 조디악 시스템을 미완성했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런 말들을 하는 거야?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한 명이 희생하는 거잖아! 그게 더, 더 합리적….”
“아니요. 의진 님. 누군가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건 그 자체로 불합리적인걸요.”
다인 누나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흥미로운 표정으로 관망하고 있던 제로가 물었다.
“사장님은 어떠십니까?”
“……뭐가.”
“사장님은 어떠신지 물었습니다. 죽고 싶으신가요? 혹시 숨겨 왔던 사후 세계에 대한 로망이 있다든가? 후후후.”
“무슨 그딴 바보 같은 질문이 다 있냐.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심지어 난 이미 몇 번이나 죽어 봤다고.
투덜대는 내 말에 제로가 짙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됐네요.”
“뭐?”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인상을 파삭 찌푸리는데 성산하가 나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살고 싶은 거라면, 더더욱 못 놔줘.”
“야. 너…….”
“어차피 남은 탑은 세 개야. 세 곳의 성좌를 올려 보내면 탑도 사라질 거고 너는 여기 남으면 돼. 문제될 것 없어.”
“하지만…….”
“으음, 그렇게는 힘들 텐데.”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자 류수윤이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드러나는 형체에 그를 처음 보는 이들이 탄성을 흘렸다.
“와… 반짝반짝.”
“사장님이랑 똑같다. 몸에서 빛이 나요!”
“……그건 또 무슨 소리지.”
“그렇게 바라볼 것 없어요. 저는 단지…. 힘들 거라고요.”
성산하의 차가운 물음에 희미한 미소를 띤 류수윤이 말했다.
“지금 의진 씨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겠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성좌의 사념체예요. 조디악 시스템이 불안정한 틈을 타 잠시 현신했지만 그의 중심과 영혼의 근간을 이루는 본체는 그대로…….”
류수윤의 시선이 천장 너머 아득한 위쪽을 가늠하듯 바라봤다.
“위에 있단 말이죠.”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방금 말한 계획대로, 하말과 알데바란, 안타레스까지 제자리로 돌아가 조디악 시스템이 완성된다면 그땐 카스토르도 자연스럽게 제 위치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붙잡을 방법은 없어요.”
류수윤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확신에 가득 차 감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남산 던전에 돌아가지 않아도……. 돌아가게 될 거라고?’
정적이 찾아온 로비에서 승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 해도 바, 방법이 없지는 않아요.”
“승연 씨. 방법이 있단 말인가요?”
“…….”
나를 바라보는 승연이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큰 폭으로 떨렸다.
“조디악 시, 시스템을 완성하지 않으면 돼요.”
“승연 씨……!”
“야. 연승연, 너 미쳤냐?”
“하말과 알데바란, 안타레스도 올려보내지 않으면……. 그러면…….”
의진 님도 가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요.
결국 울음이 터진 승연이가 소리치며 통곡했다. 그 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만 봤다.
그건 결국 폰투스 놈들이랑 똑같아지는 거잖아. 멍청아.
***
밤이 늦어 하얀 가족과 다인과 다혜, 진명이까지 돌아갔다. 하지만 류수윤의 말에도 성산하는 다른 방법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 세계에 ‘제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6,736개의 던전 중 쓸 만한 정보가 조사된 것은 총 42곳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던전에 제물을 바칠 시 던전 내부에 그 잔재가 남지 않고 아예 소멸되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조사한 42곳에서는 특이하게도 제물의 잔재가 남아 있죠. 아이템이나 뼈, 귀금속 등…….”
“남산 던전에서도 의진의 것을 찾아볼 수 있단 얘기군.”
“그런데 뼈만 남아도 레저렉션이 가능합니까?”
“……후우.”
대체 몇 시간 만에 6,736개의 던전 조사를 어떻게 한 건지 의아한 제로 놈의 말을 시큰둥하게 듣다 시비를 걸었다.
“남산 던전에는 그런 거 안 나온다니까. 아이템은 그냥 내가 창에서 골라 설정한 거야. 단순히 내 취향에 맞았을 뿐이라고. 게다가 난 거기서 죽은 게 아니라 그 몸 그대로 올라가서 뼈다귀도 안 나올 거다.”
실망한 제로의 표정을 보며 킬킬대는데 갑자기 내 말을 듣던 청이가 말했다.
“제단보다는 던전 자체에 초점을 두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데. 전부터 사장님이 하던 말도 그렇고 오늘 하말의 말을 들으며 생각한 것인데, 던전이 성좌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약한 던전의 경우 던전의 중심을 이루는 핵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것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
“던전을 부수어 심장을 꺼내자?”
“그래. 나쁠 건 없지 않나.”
“자, 잠깐 잠깐. 그 말은……. 지금 내 던전을 씨발 부셔서 핵을 꺼내 거기다 레저렉션을 쓰겠다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썅! 이 또라이 새끼들아!!”
앞에 있던 초콜렛을 한 줌 쥐어 던졌지만 S급 세 놈은 눈 하나 깜빡 않고 받거나 피해 버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괜찮은 방법인데요. 임청 헌터. 다시 봤습니다?”
“……흠.”
“사장님도 저번에 말씀하셨잖습니까. 던전의 숨겨진 마지막 층이 성좌의 공간이라고요. 후후후. 어떻게든 던전과 이어진 것이니 던전의 핵이라면 분명 닿을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래.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고 난 후, 리셋되기 전에도 의진이가 내려왔지. 보스 몬스터 재생은 던전의 핵이 가장 큰 에너지를 쓰는 일이기도 하니까.”
“삼켜 버린 사장님의 육체만 다시 꺼낸다면……. 살려 낼 수도 있겠네요.”
아이고 머리야. 이 미친놈들이…….
던전을 부순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설령 진짜더라도 더 큰 문제가 따로 있었다. 당장이라도 남산 던전으로 달려갈 듯한 성산하의 모습에 고민하다 말했다.
“…그렇게 한대도 난 못 살아 나.”
“강의진. 의진아. 할 수 있어. 네가 희생할 필요 없으니까….”
“그게 아니라! 꺼낸대도 그건 내 몸이 아니라고!”
답답함에 냅다 소리를 지르자 성산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육신이 아예 소멸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입술을 깨물다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거 주호현 몸이야. 레저렉션을 써도 주호현이 살아나지 내가 일어나는 일은 없을 거다.”
“강의진. 너 대체 무슨 소릴…….”
“난 이미 예전에 죽었어. 태제헌에게서 도망칠 때 자살했거든.”
성산하의 눈에 처음 보는 절망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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