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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221화 (221/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221.

귓가를 스치는 음성에 입술을 깨물었다.

달콤한 사랑 고백 따위가 아니었다. 애끓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간절한 애원에 숨이 막혀 눈물이 찔끔 나왔다.

‘네가 이러면 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더 가슴이 아팠다. 울컥 치미는 미련을 꾹 눌러 삼켰다.

만약, 이라는 가정을 아무렇게나 구겨 진창에 처박고는 손을 들어 성산하를 꼭 마주 안았다.

***

천랑 길드장을 그만뒀다는 소리가 구라는 아니었는지 놈은 정말 최소한의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너는 도와주러 안 가냐?”

“응. 의진이랑 같이 있을 거라니까.”

“하, 존나…….”

뒤에서 나를 안은 채 게으르게 중얼거리는 놈의 모습에 짜증은커녕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초의 부름으로 놈이 오랜만에 잠시 자리를 비웠다. 수윤이 상황 좀 알려 달라고 징징대는 주호현 탓에 구름이를 데리고 류수윤에게 놀러 갔다. 류수윤은 뉴스를 보고 있었다.

“뭐 하냐.”

“의진 씨? 들어오세요.”

류수윤의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현지 시간으로 23일 오후 네 시. 미국이 드디어 알데바란의 파편과 함께 LA 던전에 진입합니다. 당국 최정예 헌터들을 중심으로 O9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헌터들이 지원을 위해 던전 주변으로…….]

[태평양 연안에서 안타레스의 파편을 발견했다는 증언에 세계 각국에서 지원이…….]

내가 갇힌 동안에도 미국과 일본의 탑을 없애는 일들은 차근차근 진행되는 중이었다. LA 던전과 교토 던전은 ■■■■■의 현신이 드러난 곳이라 그런지 기형적인 규모의 던전 브레이크가 잦게 벌어지고 폰투스 교단의 방해 공작도 더욱 극성이었는데 그 때문에 많은 헌터들이 두 나라에 지원을 떠났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제로와 임단도 미국에 갔다는 말을 들어 혹시 뉴스에 나올까 싶어 뉴스를 주의 깊게 살피다 화면에 보이는 이국적인 광경에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성산하도 저길 갔으면 도망치기 수월했을 텐데.’

그렇다고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놈이 당장 사라지길 바라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성산하와 있는 것도 좋은데, 가긴 가야 하잖아. ……젠장. 나도 모르겠다.

“점점 때가 가까워 오네요.”

벌러덩 누워 티브이를 보던 나는 류수윤의 말에 힐긋 옆을 바라봤다. 티브이 속의 도시는 엄청난 규모의 던전 브레이크로 붕괴하는 중이었는데 정작 류수윤의 표정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놈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걱정도 안 되냐?”

“어떤 게 말인가요?”

“어떤-게- 말인가요오오? 지금 그딴 소리가 나와? 우리 둘 다 갇혀서 성산하가 제주 탑에 데려가지 않으면 끝인 거잖아.”

눈을 동그랗게 뜬 류수윤이 작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올라가게 될 거예요.”

“무슨 그딴 태평한 소리를……. 잠깐, 너 설마…….”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믿기 힘든 눈으로 바라보자 류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깨어난 첫날 꿈으로 봤어요. 황도 12궁 모든 성좌들이 모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걸요.”

“역시! 존나 이상하게 태평하다 싶더라!!”

“말 안 해서 미안해요. 의진 씨는 예상 가능한 데 반해 산하 씨가 예측이 어려워서 숨길 수밖에 없었어요. 결과는 알아도 어쩌다 올라가게 되는지 그 방법은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럼…. 지금은 안다는 소리야?”

류수윤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놈이 한 말의 뜻을 알게 된 건 몇 주가 지나서였다.

[드디어 교토 탑이 사라졌습니다! 하늘을 수놓는 저 아름다운 별들을 보세요!]

미국에 이어 일본까지. 여태껏 애먹이던 두 개의 탑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모든 일이 끝난 듯 고양감에 젖어 있을 때, 티브이를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이후에 닥칠 일로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제주 하나……. 진짜 더는 못 미뤄.’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는데 끼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당연히 아까 자리를 비운 성산하가 벌써 돌아온 거겠거니 생각했는데 정작 보이는 얼굴은 여기 상주하며 우리를 감시하던 경비원이었다.

“의진 님. 수윤 님께서 부르십니다.”

“류수윤이?”

제가 오면 왔지 굳이 경비원을 시키는 게 의아했지만 별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비원의 뒤를 따라 걷는데 류수윤의 방을 그냥 지나쳐 갔다.

“류수윤 방에 없어?”

“아, 넵. 다른 곳에 계십니다.”

슬쩍 열린 문에는 구름이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산책이라도 갔나.’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가는데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경비원이 지금까지 잠겨 열리지 않았던 문을 열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나는 그대로 발을 멈췄지만 문틈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형!!”

“이 미친…. 한서진?”

경비원이 한 발 비켜서며 문을 활짝 열었다. 문밖의 옥외 비상계단 위로 헬리콥터가 떠 있었다. 언제 탔는지 헬리콥터 안쪽에는 구름이를 품에 안은 류수윤이 있었다. 한서진이 내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요.”

“메에에에!”

“너 대체 어떻게…….”

그때 건물 전체에 붉은빛이 깜빡이며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를 본 한서진이 욕을 짓씹었다.

“형, 빨리! 제주 던전으로 데려다줄게요.”

“웃기지 마!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센터에도 말 안 하고 개인 헬기 끌고 온 거니까 좀 믿어요!”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서진 뒤로 보이는 류수윤이 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말했던 순간이 지금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난, 나는…….”

“의진 님.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경비원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비상구 문 앞까지 발을 옮겼다. 헬기로 이는 바람에 머리가 세차게 휘날렸다.

제주 탑으로 가는 방법이 이거였다고? 성좌로 돌아가는 방법이 이런 식이었다고?

“형. 내 손 잡아요.”

한서진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쳤다. 한서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형?”

“강의진! 거기 서!!”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다급한 성산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웃기게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아, 나…. 성산하를…….’

다른 시공간에 빠진 듯 얼어붙은 나를 깨운 건 한서진의 고함이었다.

“시간 없다니까요!!”

“……대론 못가.”

“네?”

한서진과 시선을 마주한 채 고개를 저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못 가. ……서진아. 고맙다.”

표정을 구긴 한서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세찬 힘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곧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유백색의 커다란 구체가 내 주위를 덮었다. 모든 소음이 사라진 공간에 귓가에는 성산하의 가쁜 숨소리만 들려왔다.

“…잡았다.”

“잡혀 준 거다. 새끼야.”

꼭 껴안은 놈을 겨우 떼어 내고 얼굴을 살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엉망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이게 뭐냐. 잘난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는 놈이.”

“왜 안 갔어?”

농담할 정신도 없는지 여유 없이 물어오는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야 당연히…….”

괜스레 쑥스러워 새어 나오는 툴툴거림을 꾹 눌러 삼키고 말했다.

“너랑 인사도 못 하고 가긴 싫으니까.”

“……의진아.”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성좌가 되어야만 하는 게 미래라면……. 이런 식으로 마지막을 맞긴 싫었다. 성산하에게서 도망치고 싶지 않다.

성산하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것처럼 찬찬히 살폈다. 옅은 색채의 머리칼도, 나만 보는 깊고 다정한 눈매도 예쁜 입술도 두고 가려니 다른 사람에게 일 등을 빼앗긴 것처럼 속이 쓰렸다. 썅. 내 건데.

아쉬움을 삼키며 말했다.

“나 제주 던전에 데려다줘. 그리고 마지막까지 나랑 같이 있어.”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성산하는 이를 악물어 잘게 떨리는 턱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싫으면 어쩔 건데. 안 된다는 것 알잖아.”

“모르는데.”

이 유치한 새끼….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다 말했다.

“나 사랑한다며. 내 부탁 하나 못 들어줘?”

내 말에 흠칫 놀란 성산하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너…, 반칙이야.”

“더 치사한 짓도 할 수 있어.”

놈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입술을 맞대기 전 속삭였다.

“이왕이면 마지막에 보는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 얼굴이었으면 좋겠거든.”

“강의진 너……!”

“들어줄 거지?”

대답은 필요 없었다. 미친 듯이 뛰는 성산하의 심장 소리가 그 답을 대신하고 있었으니까.

***

조금의 문제는 있었지만, 돌고 돌아 몇 달 만에 나는 천랑의 전용기를 타고 순탄히 제주 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임단과 제로가 당장 귀국할 테니 꼼짝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아 예상보다 며칠이 지체됐다-

“메에에에!”

“구름이!!”

내게 달려오는 구름이를 안아 들었다. 그 뒤로 류수윤과 한서진, 에스퍼 팀들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불만스러운 표정의 한서진이 성산하를 노려보다 내게 다가왔다.

“……형. 진짜 너무하는 거 알죠.”

“고맙다고 했잖아.”

“그 말이 아니라…!”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는 한서진을 이상하게 보는데 성산하가 내 팔을 잡고서 제 곁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먼저 보낸 자료대로, 현재 제주 탑 앞은 이목이 너무 쏠려 있으니 천지심연 던전을 통해 진입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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