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222.
천지심연 던전을 통하면 곧바로 탑의 마지막 층으로 갈 수 있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괜스레 긴장이 돼 떨리는 손끝을 감추듯 꾹 말아 쥐었다. 그 위를 감싸는 손길에 옆을 돌아보니 성산하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도 되는데.”
“도망은 무슨…. 가자.”
콧방귀를 뀌었지만 혹여 성산하가 잠시 돌아 버려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놈의 손을 꼭 잡고 문밖을 나섰다.
미리 통제된 길을 따라 사람 하나 없는 천지심연 던전 입구로 향했다. 내 뒤로 청이와 제로, 임단과 하얀 누나 동료들, 한서진과 에스퍼 팀을 비롯한 천랑 길드원들까지 줄지어 따라왔다. 게이트에 발을 들이기 전 잠시 멈춰 뒤를 돌아봤다. 내가 멈추자 뒤따라오던 이들도 우르르 발을 멈췄다. 청이가 의아하게 물었다.
“사장님?”
“류수윤은 어딨어?”
내 부름에 에스퍼들과 함께 있던 류수윤이 앞으로 나왔다.
“네. 저 여기 있어요.”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서.”
한 발 자리를 비켜 주며 말하자 작게 웃은 류수윤이 계단 위로 올라왔다. 그 옆을 종종대며 따라오는 구름이의 모습을 본 나는 손을 뻗어 한 번에 번쩍 들어 안았다.
“메에에에.”
“혹시 모르니까 넌 나랑 있자.”
“미에?”
류수윤이 하말이고 구름이는 하말의 유지인 만큼 탑 안에선 누가 표적이 될지 모른다. 구름이는 상황이 궁금한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얌전히 내 품에 안겼다.
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머리통을 보자 새삼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는 구름이를 살리겠다고 어떻게든 제주 탑이랑 떨어트려 놓으려 애를 썼는데. 지금은 내가 직접 구름이를 안고 제주 탑에 들어가게 되다니.
구름이는 나와 함께 성좌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게 될 거다. 거기서는 맛있는 것도 많이 주고 심심할 틈이 없게 놀아 줘야지. 귀여운 녀석이니 벨라 누나랑 주벤 할배, 다른 성좌들도 구름이를 엄청 예뻐할 거다.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
품 안의 구름이를 꼭 안은 채 게이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게이트를 통하자 오랜만에 보는 음습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워진 주위에 류수윤과 내 몸에서 나는 푸른 빛이 더욱 환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불을 켤 필요도 없겠는데요.”
웃음기 섞인 제로의 목소리에 투덜대며 로브 자락을 여몄다.
류수윤과 나 때문인지 이상하게 몬스터들은 우리 주위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에스퍼들과 천랑 길드원들이 나서서 위협적인 몬스터들만 먼저 처리하기도 해서 일은 생각보다 더 수월했다. 탑과 이어진 워프가 있는 곳으로 쭉 직진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점점 앞서 걷던 류수윤이 더 빛난다 싶더라니 언젠가부턴 주변에 반짝거리는 금빛 기운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류수윤! 너 몸 주변에 그건 뭐야?”
“……놀랍네요. …힘이, 돌아오고 있어요.”
신기한 눈으로 제 주위를 돌아보던 류수윤은 어느새 완전한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때 한창 조용하던 성좌들의 채팅창에 알림이 뜨며 대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쿠벤스] : 보인다! 보여! 주벤 할배가 고친 거야?
[안타레스] : 신기하다. 정말 보이잖아?
[주벤엘게누비] :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네만. 카스토르 자네가 한 일인가?
[레굴루스] : 저긴 어디지? 마치 던전 같은데.
[알레샤] : 카스토르와 하말이 갈 던전이라면 하나뿐이지. 성공했나 보군. 축하해. 카스토르.
‘아씨, 뭐야. 시끄러울 것 같아서 온다는 말도 주호현한테만 했는데.’
하는 말들을 보니 또 오류가 생겨 우리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어차피 이제 와 보든 말든 상관없어 채팅창을 닫아 버리려는 순간 믿기지 않는 대화가 하나 떠올랐다.
[하말] : 안녕하세요. ^^
“으엥? 뭐야.”
놀란 건 나뿐이 아니었다. 성좌들 역시 갑작스러운 하말의 등장에 기겁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스피카] : 세상에! 하말이잖아?
[스피카] : 안녕? 못 보는 줄 알았지. 뭐야!
[레굴루스] : 벌써부터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대체 어떻게!
[알게디] : 확실히 일반적인 상황은 아닌데요…….
[사달멜리크] : 소름 돋는군. 우리와 같은 성좌인 건 맞나?
[스피카] : 그게 중요해? 그렇게 고대하던 하말을 드디어 만났잖아!
[폴룩스] : ……수윤아?
[하말] : 응. 호현아.
[하말] : 네가 있는 곳으로 가는 중이야.
[하말] : 보고 싶어.
[주벤엘게누비] : …….
[아쿠벤스] : ewwwwwwwwww…….
이름만 불렸는데 좋아 죽겠는지 대화창을 보며 웃고 있는 류수윤에게 다가가 등을 퍽 치며 속삭였다.
“야! 허공 보면서 웃지 마. 존나 수상해 보인다고.”
[폴룩스] : 의진아……!
부를 땐 나오지도 않던 주호현이 귀신같이 튀어나왔다. 대화창을 날려 버리고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구름이와 함께여서인지, 아니면 ■■■■■의 힘이 약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던전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해서 힘이 돌아오고 있어요.”
“채팅도 그래서 써지는 거고?”
“네. 이대로라면 남은 조각은 저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기하네……. 힘이 돌아왔다니 다행이지만 방심하진 마라. 꼭 그러다 뒈지더라.”
“하하. 네.”
류수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좆같아진 단체 채팅방을 수습하기 위해 류수윤에게 주호현과 개인 메시지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줬다. 더 이상 미친놈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웃는 일은 없었지만 류수윤의 만면에 감도는 해사한 웃음은 대체 무슨 얘기를 하기에 저러는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던 류수윤이 어느 곳에서 돌연 발을 멈췄다. 눈살을 찌푸리고는 왼편의 어두운 그늘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놈이 중얼거렸다.
“저건 대체 뭐죠……?”
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닌지 류수윤이 갑자기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우리 모두 당황해 그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수윤 형!”
“야! 갑자기 어디 가?”
“류수윤!!”
좁은 동굴 끝에 이어진 커다란 공동에 그제야 류수윤이 뭘 보고 그런 표정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긴…….”
아이들 석상 한가운데 류수윤이 있었다. 성산하를 홱 돌아봤다.
“내가 만들어 준 저주 정화제는?”
“마지막 임상시험 중이었어.”
“메에에에.”
품에 안긴 구름이가 버둥거렸다. 내려 달라는 행동에 안고 있던 구름이를 땅에 내려 주자 구름이가 곧바로 류수윤에게 달려갔다. 류수윤과 구름이가 합쳐지자 하말의 빛이 더욱 강해졌다.
“도와주러 온 거야?”
“메에.”
구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류수윤이 땅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둘에게서 번진 빛이 주위의 석상을 감쌌다. 천천히 아이들의 머리부터 저주가 씻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아이들이 풀썩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에 그대로 뛰어내려 달려갔다. 그중 한 명을 받아 안았다. 아직 의식을 잃은 채였지만 체온도 따듯하고 심장도 뛰고 있었다. 저주가 풀린 것이다.
“임지원. 신하늘……. 김선재.”
“아는 애들이에요?”
“응. 내 친구들.”
내 말에 잠시 놀란 듯 하던 류수윤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의 저주에 걸려 있었어요.”
“응. 정화제를 만들던 중이었는데…….”
내 품에 안긴 선재를 내려다봤다. 모든 생기와 색채를 돌려받은 지금은 돌이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죽기 전에 이 모습을 봐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단번에 풀어 버렸네.”
“여긴 하말의 구역이니까요.”
구름이를 쓰다듬으며 말하던 류수윤이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성산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이야 제가 있어서 몬스터들이 공격하진 않지만 제가 떠나면 습격해 올 텐데. 이를 어쩌죠?”
“……바깥에 대기 인력이 더 있어. 길드원들을 남겨 보호와 구조하게 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성산하의 말에 류수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산하가 남을 인력을 배분하는 동안 에스퍼들도 아무렇게나 쓰러진 아이들을 편하게 눕히는 걸 도왔다. 복잡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누군가 옆에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친구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그냥 한 말이야, 아니면 진짜인 거예요.”
한서진이었다.
아직 품에 안고 있던 선재를 흘깃 쳐다보다 대답했다.
“진짜야. 보육원 동기들이었어. 녹스에서 각성 실험을 하다 죄다 저주 걸려서 석상이 되어있더라. 내가 크는 사이에……. 뭐,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잘된 거지.”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요?”
“그럼 울면서 하냐?”
“형 진짜……. 진짜 나한테 너무한 거 알아요?”
그렇다기엔 딱히 서운한 어투도 아니라 의아하게 옆을 돌아봤다.
“형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뭐? 이 새끼, 나 욕 하려고….”
“그런 형을 좋아한 나는 더 정신 나간 놈이고.”
이어진 한서진의 말에 입을 합 다물었다.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한서진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의 감정이나 속마음에 간절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형만큼 단순하다가도 갑자기 튀어서 사사건건 속 썩이고 한시도 가만히 안 있는 사람은 처음이야.”
“욕이야 칭찬이야. 하나만 해라.”
“칭찬이에요.”
“아닌 것 같은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어.”
“내가 성산하보다 못한 게 뭔데.”
“뭐억? 큭, 콜록, 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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