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223.
뜬금없는 헛소리에 당황해 사레가 들렸다. 한서진이 한숨을 쉬며 등을 두드려줬다.
“가, 갑자기 성산하가 왜 나와?”
“형. 성산하랑 뭐 있잖아요.”
존나 당황해 돌아보자 한서진은 이미 다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어라. 어떻게 알았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한서진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보란 듯이 손까지 잡고 들어왔잖아.”
내가…. 내가 그랬나? 기억도 안 나는데.
하긴, 정말 그랬대도 이상한 일도 아니다. 성좌의 몸으로 내려온 이후, 나는 이미 죽었고 여긴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항상 하고 있었으니까. 전보다 남의 시선에 무뎌진 탓에 경계심 또한 없긴 했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괜스레 머쓱해져 목덜미를 매만지며 입을 삐죽였다.
“너랑 성산하는…. 에이, 이제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요.”
“쓰레기? 으하하하!!”
“……아, 형!!”
한참을 웃다 결국 한서진에게 다리를 한 대 맞고서야 진정했다. 소란에 이쪽을 바라본 에스퍼가 내가 안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는지 다가와 말했다.
“제게 주세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눕혀 놓겠습니다.”
“응. 여기. 조심히 안아.”
품에 안고 있던 선재를 건넸다. 멀어지는 에스퍼의 뒷모습을 지켜보는데 한서진이 물었다.
“형은 아쉽지도 않아요?”
“응?”
옆을 돌아보자 나를 향한 한서진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한서진의 검은 두 눈에는 다 헤아리지 못할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근심 어린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후회 안 할 것 같아?”
“…….”
수많은 물음을 다 쳐 내고 겨우 뱉은 짦은 문장이었지만 누르고 눌러 담은 감정들이 오롯이 느껴졌다. 마주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존나 아쉽지. 하지만 후회 따윈 안 해.”
“형답네요.”
고개를 끄덕인 한서진이 허탈한 시선을 내렸다.
“난 형이 죽었다는 것도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데……. 멋대로 왔다 멋대로 다시 돌아간다니. 이게 뭐예요. 혼자 뭐가 그렇게 빠른 건데.”
“……미안하게 됐다.”
달래듯 놈의 무릎을 두드리는데 한서진이 내 손을 감싸듯 잡았다.
“마지막으로 안아 주면 안 돼요?”
“……한서진.”
“마지막이잖아요.”
애원하듯 들려온 속삭임에 결국 덥석 놈을 끌어안았다. 머지않아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작별은…….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마디 위로조차 쉽게 나오지 않아 말없이 등을 쓰다듬는데 안고 있던 한서진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찰나,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인사는 다 했어?”
“성, 산하?”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자 팔짱 낀 채로 웃고 있는 성산하가 보였다. 왜인지 삐딱해 보이는 웃음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땀이 삐질 흘렀다.
뒤에서 한서진이 내 손을 꾹 잡았다 놓으며 말했다.
“이만… 갈게요.”
“응. 이제 가야지. ……잠깐, 한서진 너….”
말하는 투가 이상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한서진이 씁쓸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애들이랑 여기 남을 거예요. 보스전에는 굳이 갈 필요가 없기도 하고, 게다가…… 형 가는 거 못 볼 것 같아.”
“한서진…….”
“갈게요.”
내 반대쪽으로 발을 뗀 한서진은 한 발 뒤에 서 있던 성산하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나라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거야.”
“…….”
한서진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 말을 듣고 홱 고개를 돌렸다. 둘이 싸움이라도 날까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성산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는 낯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의진아.”
내밀어진 손을 보다 홱 고개를 돌렸다. 성큼성큼 발을 옮기자 성산하가 졸졸 따라오며 귀찮게 굴었다.
“손은.”
“안 잡아.”
“왜? 잡아 줘. 누군 안아 주기까지 했으면…….”
“꺼져!!”
***
천지심연 던전의 워프를 통하자 곧바로 제주 탑 19층에 도착했다. 굽이진 길을 따라 중앙으로 향하니 전에 봤던 거대한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문을 열고 지나가면 드디어 ■■■■■의 마지막 조각이 나온다. 제단이랑 좆같은 촉수도 함께 튀어나오겠지. 처음 겪는 일이 아닌데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겉으로 티가 날 정도였는지 성산하가 어깨를 감쌌고 성좌들의 응원이 쏟아졌다.
구름이를 안은 류수윤이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빛이 나는 하얀 손이 석판 위에 닿자 음각되어 있던 문자들을 따라 푸른 빛이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문 전체에 순식간에 그려진 커다란 마법진에 의해 워프가 가동됐다.
전투계들이 먼저 내부로 진입하고 성산하와 함께 어두운 워프를 보고 있는 류수윤에게 다가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우리도 들어가자.”
“안에서 엄청나게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네요.”
그 말에 힐긋 워프를 바라본 성산하가 설명했다.
“하말이 제단에 오르면 촉수들이 나와 공격이 시작될 거다. 촉수들을 없애야 조각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어.”
“그렇군요.”
“무기는 정말 필요 없나?”
“네.”
류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정비를 끝낸 우리도 워프로 발을 들였다.
몸을 감싸는 마나의 파동을 지나자 눈앞엔 위압적인 크기의 제단이 우똑 솟아 있었다. 먼저 입장한 헌터들이 그 주위를 빙 둘러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저기가 제단인……. 야! 류수윤!”
옆을 돌아보며 말하는데 이미 류수윤은 사라지고 난 후였다. 놈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뚫고 제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보호를 맡은 헌터들이 다급히 류수윤 뒤에 따라붙었다.
제단에 다다른 류수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단에 올라 고어가 적힌 돌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발밑에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의진아.”
성산하가 나를 제 곁으로 잡아당겼다. 점점 커지는 진동과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굉음. 모두들 곧 나올 촉수의 공격을 대비해 무기를 고쳐 쥐었다. 하지만 일 분이 지나도록 제단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진동과 굉음마저 멎어 버리자 다들 의아한 눈으로 내 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내가 안고 있는 구름이를.
“메에에에.”
구름이도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올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류수윤이 갔는데 왜 안되는 건데. 설마 구름이를 데려가야 하는 건가?’
구름이를 꼭 껴안고 상황을 살피던 내가 한번 가 보겠다며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슨 소리? 진동은 멈췄는데.”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임단이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곤 제단으로 달려갔다. 거침없는 행동에 막을 새도 없었다. 류수윤을 지나 훌쩍 제단에 오른 임단이 꼭대기에 멈춰서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히 중앙을 내려다봤다.
“다들 이리 와 봐.”
임단의 말에 하나둘씩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구름이를 안은 채라 머뭇거리던 나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음 놓고 발을 들였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이변이 눈에 띄게 보였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던 쪽의 제단 반대편이 반으로 쩌억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임단이 내려다보고 있던 곳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조각으로 가는 길이군.”
“촉수의 공격도 없이 바로 열릴 수가 있습니까?”
“오히려 길을 열어 준 것 같이 보이는데. ……네 힘인가?”
성산하가 류수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류수윤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의 기운은 이 아래에서 그대로 느껴지고 있어요.”
“뭐, 내려가 봐야지 별 수 있어?”
임단이 한쪽 손목에 감겨 있는 붕대를 다시 단단히 동여 매더니 성산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청이랑 앞장설 테니 네가 애들 데리고 와. 왠지 느낌이 별로야.”
“…가 보겠습니다.”
청이와 임단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심연에 몸을 던졌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에스퍼들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그 뒤를 따라 뛰어들기 시작했다.
우리 차례가 되어 내려가기 전, 성산하가 쉴드를 펼쳐 나와 류수윤을 보호할 때였다. 갑자기 구덩이에서 엄청난 어둠이 쏟아져 나와 남은 이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쉴드 주위를 감싸는 칠흑 같은 어둠에 성산하가 내 어깨를 세게 감싸 안았다.
“씨, 씨발. 뭐야 이거?”
“…파동이 느껴지는데. 워프된다.”
“뭐? 어디로?”
류수윤이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귀가 먹먹해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풍경이 엄청난 빠르기로 바뀌었다.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광경들에 인상을 찌푸리며 한쪽 귀를 막은 채 구름이를 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쉼없이 바뀌던 공간이 드디어 멈췄다. 말을 잃은 우리는 주위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친…….”
머리 위로 쏟아지는 수억 개의 별들, 푸르거나 붉으며, 보랏빛을 띠는 성운들과 그 사이로 아득히 비춰 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명들.
우리는 우주 속의 어느 행성에 불시착한 상태였다.
먼저 들어간 에스퍼들과 우리와 함께 집어삼켜진 헌터들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장님 덕에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네요. 감사합니다.”
“지랄 마라. ……이거 진짜야? 환각이야?”
“우주에선 숨 못 쉬지 않습니까? 다들 당한 거 아닐까요? 그 연기가 단체 환각제라거나?”
혼란 속에서 성산하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태엽을 몇 번 감아 보던 성산하가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직 던전 내부야. 지구를 벗어난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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