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224.
“여기가 던전 내부라고?”
말도 안 돼. 이런 형태의 던전은 여태껏 존재한 적 없던 종류의 것이다. 심지어 나는 시스템창에 의해 던전까지 만들어 본 적 있는 사람인데도 지금 여기와 비슷한 공간이나 소재는 본 적도 없다!
당황해 채팅창에 들어가 성좌들에게 뭐 아는 거 없냐고 닦달하는데 저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봤다.
“씨발……. 저게 뭐야?”
우주의 가장 어두운 그늘에서 분리된 검은 덩어리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물체에 성산하가 나를 급히 끌어당기며 로드를 휘둘렀다. 로드에 맞아 부서진 것이 하얀빛을 내며 땅에 떨어졌다.
“대체 이게 뭐지.”
“몰라. 존나 좆같게 생겼는데.”
검은 덩어리는 타르처럼 끈적하면서도 구름처럼 텅 비어 보이기도 했다. 전기가 흐르듯 외부로 방전되며 번쩍이는 힘이 심상치 않았다. 성산하가 로드 끝으로 도망가려는 것을 꾹 잡아 눌렀다. 하지만 우리가 잡은 것은 극히 일부일 뿐, 아직도 우주 전체에서 쉼 없이 날아오는 수천 개의 것들은 어느 한 지점에서 합쳐지며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형체. 온갖 어둡고 음습한 것들을 뭉쳐 만든 듯한 외피와 단단한 기둥처럼 우뚝 땅을 버텨선 두 다리. 그 위로는 백 번을 찍어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두터운 몸통이 자라났다. 거미처럼 긴 네 개의 팔과 등 뒤로 날개처럼 돋아나 제멋대로 꿈틀대는 기다란 촉수들까지 보자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거……. 아무래도 ■■■■■ 같지.”
“네. 현신한 것 같군요.”
류수윤의 긍정을 듣자마자 뒷골이 아파 왔다.
씨발, ■■■■■의 현신이라니.
솔직히 놈이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하길래 폰투스 놈들이 신이라 부르며 섬기기까지 하는지, 얼마나 강하며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일지 궁금하긴 했다. 지금까지 봐 왔던, 전세계 탑에 봉인되어 있던 놈의 신체 조각들은 인간과 구조가 비슷했기에 크게 특별할 것 없이 인간과 비슷하게 생겨 먹지 않았을까 상상하고 말았는데……. 막상 마주한 놈의 모습은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놈의 등 뒤로 꿈틀대는 촉수들을 보자 왜 제단에서 그렇게 촉수들이 쳐 튀어나왔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가로로 움푹 파여 은하가 흐르는 것 같은 눈이 제 발밑의 우리를 훑었다. 놈이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지는데도 -씨발 눈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하니, 한 차원 높은 곳의 존재 앞에 작아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더러워졌다.
‘좆 됐다. 내 마지막 날인 줄 알았는데, 이러다 전멸하는 거 아니야?’
“성좌를 보호하고 공격 대열을 갖춰라!”
누군가의 외침에 헌터들이 다들 재빨리 한곳으로 모였다. 에스퍼들 역시 가이드를 보호하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놈의 쩍 벌린 아가리에서 혼탁한 기체와 함께 끈적한 침이 뚝뚝 흘렀다. 놈이 우리를 향해 크게 포효했다.
『■■■■! ■■■■-■■■■■■■■!!』
놈의 목소리에 땅이 울리고 바람이 일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는 그 자체로 공포로 다가와 사람들을 패닉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이곳저곳에서 무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헌터, 에스퍼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귀를 막고 몸을 움츠렸다.
“이, 이길 수 없어……. 도망쳐야….”
“우린 모두 죽고 말 거야!!”
“신, 신이야…….”
“웃기시네. 폰투스 놈들에게나 신이겠지. 정신 차려.”
“그딴 나약한 소리 하지 마라! 무기를 들어!!”
야차 같은 고함이 혼란에 빠진 헌터들을 겨우 현실로 끄집어냈다.
옆의 류수윤과 시선을 교환했다. 놈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대충 의미와 그 악의는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죽일 작정이야. 놈과 붙을 수 있을까.”
“답지 않게 왜 이래? 설마 겁먹었니?”
걱정스레 중얼거리는데 임단이 시비를 걸었다. 발끈해 돌아봤다.
“뭐? 겁먹긴 누가 겁먹었다는 거냐?”
“누구긴 누구야, 강의진 너어- 말이야. 지금 겁먹어서 꼬리 만 개 같잖아.”
“지금 내가 뭐 때문에 이러는데!”
“저 보스 몬스터 때문이겠지. 근데 그거 알아? 죽이면 그만이야.”
“뭐?”
“우리는 뭐 놀러 온 줄 아니?”
임단의 당당한 대답에 머뭇거리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류수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겉모습은 같아도 그 힘은 본체에 비할 바가 못 돼요. 이미 탑들을 파괴하며 조각들을 올려 보냈으니…… 승산은 있어요.”
“그쪽, 류수윤이라고 했던가? 여기 물정 모르는 포션 마스터님보다는 훨씬 잘 아는 것 같은데.”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저거, 왜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지?”
“힘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에요.”
“아아-.”
류수윤의 답에 임단이 고개를 주억이던 때, 내 왼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공격하면 된다는 소리군.”
돌아보자 이미 무기를 든 청이가 ■■■■■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임단이 머리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쟤는 대체 뭐가 문제야?”
폴짝 뛰어오른 임단이 그 뒤를 따랐다. 서릿발 같은 한기만 남은 자리에서 얼떨떨하게 임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선두를 끊은 둘의 모습에 이윽고 헌터들도 놈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온갖 스킬들이 난무하고 무기가 엇갈렸다. 처음 등장했을 때의 위압감과는 달리 막상 맞붙자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분위기가 달라졌다.
쏟아지는 공격에 드디어 ■■■■■도 완성되지 않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공격해!!”
“왼쪽 일곱 번째 발톱은 내 꺼다!”
『■■■■■■! ■■■■■■■■!!』
“헌터 놈들이 다 해 먹게 둘 셈이냐?”
“해치우고 진급하자!”
“우와아아아!!”
박무일을 필두로 에스퍼들까지 합세하자 ■■■■■은 확실히 당황한 듯했다. 헌터들의 스킬과 에스퍼들의 이능이 서로 엮여 태산 같던 놈을 뒤덮었다. 수십 개의 촉수를 태우고, 얼리고. 두터운 발목을 베어 내고 피부를 갈랐다.
그러나 성산하의 쉴드 안에서 지켜보던 내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모두가 달려들어도 놈의 움직임만 저지할 뿐 치명상은 단 하나도 입히지 못했다.
잘린 촉수와 피부는 계속 재생되었으며 그 어떤 강한 스킬도 놈의 목숨을 위협하지 못했다.
“내 눈에만 타격 없어 보이냐?”
“……이상하군. 아무래도 가 봐야겠어.”
단 한 번의 공격에도 우수수 나가떨어지는 헌터들의 모습을 더는 못 보겠는지 결국 성산하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로드를 둔 채 떠나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놈의 소매를 붙잡았다.
“의진아?”
“…로드 가져가.”
“로드가 있어야 쉴드를 쓸 수 있어.”
“그러니까 가져가서 너 쓰라고! 맨몸으로 가서 어쩔 건데? 나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너는…….”
잠깐 놀란 듯 커진 눈이 곧 가늘어졌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반항적인 게 보나 마나 싫다고 할 게 뻔했다. 그냥 등을 돌려 로드를 직접 뽑으러 갔다. 로드를 잡자마자 성산하가 달려와 내 손을 겹쳐 잡았다.
“강의진. 놔.”
“싫은데? 너나 놔라.”
“위험하게 자꾸 이럴래?”
“누가 할 소릴.”
“제가 갈게요.”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로드를 잡고 옥신각신하던 우리 둘 다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류수윤이 희미하게 웃은 채 서 있었다.
“역시 제가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여긴 하말의 탑이니까요.”
“무슨 소리야. 너 무기도 없잖아.”
황당하게 되묻자 류수윤이 손을 펼쳐보였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온 금빛 빛무리가 손에 닿더니 끝이 갈고리처럼 휜 길쭉한 지팡이가 생겨났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반투명한 채로 은은한 빛이 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뭐야, 그거 어떻게 했어? 네 구역이라고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거야?”
“의진 씨도 할 수 있어요.”
작게 웃으며 류수윤이 내뱉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할 수 있다고?
머뭇거리다 빈손을 내려다봤다. 나도 류수윤처럼 근사한 무기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가슴께에 간질거리던 기운이 순간 온몸으로 퍼졌다. 정신 차려 보니 양손에 푸른 빛을 내는 쌍둥이 검이 들려 있었다. 왼손엔 대거, 다른 쪽엔 그보다 조금 더 긴 길이의 쇼트 소드였다.
류수윤이 지팡이 끝으로 여기까지 날아온 촉수 파편을 푹 찔렀다. 지팡이 끝에 닿은 촉수가 파스스 연기를 내뿜더니 그대로 재로 변해 사라졌다.
“우, 우와…. 존나 멋있잖아. 이런 게 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약점은 아마 얼굴 중앙의 저 코어겠죠. 저기까지 가려면 길을 뚫어야 하는데 엄호가 필요해요.”
“그냥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죽을 걱정도 없잖아, 하고 말하려다 성산하가 마음에 걸려 말끝을 흐리는데 류수윤이 쓰게 웃었다.
“상대는 ■■■■■잖아요. 여기서 죽으면 소멸이에요. 의진 씨.”
“소멸이라면…….”
“호현이를 못 보는 거죠.”
왜 류수윤이 잠시나마 망설였는지 이해했다. 상황을 들었는지 성좌들의 채팅창에도 채팅이 미친 듯이 올라오고 있었다. 눈을 가리는 채팅창을 구석에 치워 버리고 저 멀리 보이는 ■■■■■를 바라봤다. 검은 성운과 끊임없이 재생되는 촉수들, 공격적인 이빨과 발톱을 지나 은하가 흐르는 눈.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
잠시 주춤하던 속내를 읽은 것처럼 성산하가 내 손을 잡아 왔다.
“데려다줄게.”
“성산하? ……야!!”
단숨에 나를 들어 안은 성산하가 류수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에스퍼 하나 보내지. 그편이 더 편하겠지?”
“……박무일 에스퍼로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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