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226.
뒤를 돌자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성산하와 눈이 마주쳤다.
다물렸던 입이 열리며 천천히 내 이름을 그렸다.
강의진.
소리 내 부른 것도 아닌데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인 듯, 성산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크게 울렸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 넓은 공간에 오직 우리 둘만 남은 것처럼 성산하와 나 사이의 거리감이 한순간에 좁혀졌다.
“성산하…….”
머리가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하니 주춤대다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발을 뗐다. 그저 성산하에게로 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옮기던 발에 겨우 속도가 붙었을 무렵 몸이 어딘가에 세게 부딪혔다.
“아!”
성산하에게 꽂혀 있던 시선이 가려지고 순식간에 현실로 끄집어진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형님……. 가시는 겁니까?”
“어어. 무일아.”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자 코앞에 바보 같은 표정을 한 박무일이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날아갈 뻔한 주먹을 겨우 붙잡아야 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박무일이 감동에 젖은 표정으로 울먹거리다 나를 와락 껴안았다.
“크윽. 형님…! 존경합니다!!”
“뭐야, 왜 이래?”
“형님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진 분이셨습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징그러워. 떨어져. 새끼야.”
몸을 압박하는 우락부락한 팔뚝에 숨이 다 막혔다. 퍽 하고 가슴팍을 밀치니 박무일이 어울리지도 않게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거 천랑 길드장이랑 저랑 차별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성산하랑 댈 수가 있어야지. 털북숭이 산적 같은 게 얻다 비벼.
박무일의 말에 헹 콧방귀를 뀌는데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저…. 의진 님.”
“어?”
“악수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저, 저도!! 항상 응원하고 있었어요!”
사방에서 뻗어지는 손들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너무 많아 하나하나 잡아 줄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아 그런지 모두의 얼굴엔 염려와 슬픔이 숨겨지지 않았다.
스치듯 손을 잡고 흔들어 주던 때, 사람들 사이로 조그만 임단의 머리통과 훌쩍 솟은 청이가 보였다. 사람들을 헤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올 줄 알았는지 임단이 기다렸다는 듯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가?”
“응. 잘 지내라.”
“이제 와서 어른스러운 척은…….”
툴툴대던 임단이 푹 한숨 쉬다 물었다.
“뭐, 남기고 싶은 말은 없고?”
“남기고 싶은 말이라니?”
“그런 거 있잖아- 마지막으로 꼭 들어줬으면 하는, 소원이나 유언 같은 거.”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임단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유언이라…. 내가 말하면 임단이 들어주겠다는 건가? 그건 의외긴 했지만 고민해 봐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시큰둥하게 고개를 젓는 내 모습에 임단이 발끈해 뭐라 말하려던 순간 청이가 한 발 다가왔다.
“사장님.”
“청아.”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청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항상 든든하던 청이었는데 오늘따라 그 어깨가 작아 보여 마음에 걸렸다. 잠깐 고민하다 크게 한 발 다가가 청이를 덥썩 끌어안았다. 품에 안은 몸이 바짝 굳었다. 뒤에서 길길이 날뛰는 임단을 못 본 체하고 청이에게 속삭였다.
“넌 우리 공방 최고의 용병이었어.”
“……사장님께서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류수윤 가이드와 함께 도망치실 수 있도록 퇴로를 마련하겠습니다.”
묵직하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에 킥킥 웃다 몸을 떼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 자식들은 맨날 똑같은 소릴……. 이게 내가 원하는 거야.”
“…….”
“고맙다. 청아.”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입술을 깨무는 청이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 멀리서 하얀 누나도 달려왔다.
“의진 님! 의진 님….”
“누나. 울지 마.”
“어떡해요…. 왜, 왜 의진 님이 가야 해. 이렇게 착하고 어린데…….”
온통 젖은 하얀 누나의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왜 이래. 나 강의진이야. 괜찮다니까. 근데 누나, 나 하나 부탁할 게 있어.”
“흐윽……. 뭔, 데요?”
“다혜가 처음 구한 마정석. 사실 다른 장신구로 가공해 주려고 했었는데 잃어버렸어. 공방 금고에 쌍으로 된 페어리 브로치 있거든. 그러니까 누나가 그것 좀 다혜랑 하정이한테 하나씩 줘. 승연이한테 말하면 뭔지 알 거야.”
“네. 네…. 의진 님. 아이들에게 꼭 전할게요.”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류수윤을 비롯해 모두가 나만 기다리고 있었다. 성산하에게 가려 등을 돌리는데 제로가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작별의 포옹 시간인가요? 제 넓은 품도 열려 있답니다.”
“……꺼져.”
스치고 지나가는데 제로가 웃으며 졸졸 따라왔다.
“저는 임청 헌터처럼 따듯한 위로 안 해 줍니까? 이거 서운한데요.”
“…….”
“쌍으로 된 페어리 브로치라니. 하나 짚이는 게 있는데 혹시 장인 테이티가 제작한 페어리 티타임은 아니겠죠?”
이러다 성산하가 있는 곳까지 따라올까 봐 걱정될 지경이었다. 머리를 짚다 물었다.
“그냥 말해. 너 원하는 거 있지.”
“후후후. 이런 이런. 제가 그런 물질적인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없으면 난 간…….”
“공방 개업 선물로 받으신 빛이나의 장갑이요.”
“그런 게 있었나……? 승연이한테 달라고 해. 지하 창고에 몬스터 고기들 있으니까 가져가서 그리폰 갖다 먹이든가 말든가.”
“감사합니다. 사장님.”
돌고 돌아 드디어 성산하에게 갈 수 있었다. 나보고 오라는 듯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성산하는 내가 바로 앞까지 다가가고 나서야 생긋 웃음을 지었다.
“인사는 다 했어?”
“응. 뭐, 제일 중요한 한 명 남긴 했는데.”
의도치 않은 방해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더니 치솟을 대로 치솟아 한껏 격정적이었던 기분이 많이 잠잠해져서 다행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는데, 아까 감정 그대로 성산하를 마주했더라면 꼴사납게 눈물을 흘렸을지도 몰랐으니까.
성산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결코 잊는 일이 없도록. 기억 속에 아주 단단히 묶어 둘 셈이었다. 샅샅이 훑으며 올라가는데 둥글게 휜 눈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홀린 듯 시선을 마주하자 성산하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만족해?”
“……아니. 평생 봐도 만족 못할 것 같아.”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쓰게 웃은 성산하가 손을 들어 내 볼을 쓰다듬었다. 눈가를 쓸고 지나가는 엄지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도 죽으면 같이 갈 수 있나?”
“…또 헛소리하네. 내가 그딴 꼴 두고 볼 것 같아?”
“너무하네. 의진이 미남계로 나는 그딴 꼴, 무력하게 두고 보게 해 놓고선.”
“그건…….”
솔직히 할 말이 없긴 했다.
‘에이씨. 미안하게…….’
머쓱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는데 성산하가 그대로 내 등을 감싸 끌어당겼다. 머리 위로 감정을 꾹 눌러 담아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절절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사랑해. 강의진.”
“……응.”
“마음 같아선, 널…….”
깊은 한숨과 함께 나를 안은 성산하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내가 네게 너무 약해서, 네 부탁은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보내지만……. 나 포기한 거 아니야. 의진아. 잠깐 놓아주는 거야. 어떻게든 살려 낼 거니까 각오해.”
설마 했지만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을 줄이야. 혼자 남을 성산하가 신경 쓰여 못내 가슴이 아팠다. 헛생각하지 말라고, 이젠 정말 끝이라는 반박이 목 끝까지 치밀었지만 성산하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팔을 들어 놈을 마주 안고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심장 소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러든가.”
“이기적인 부탁 하는 거야. 네가 성좌가 되어 영원을 살더라도 날…….”
“알았다니까.”
평생에 걸쳐 나만 생각하고 나만 찾아다니겠다는 고백을 듣고도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벅차게 뛰는 심장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성산하의 멱살을 잡아 내려 입을 맞췄다. 등 뒤에서 소란이 일었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성산하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씨발. 아쉬워. 아까워.’
성산하를 위해서라면 나를 잊으라고 말을 해야 한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이 앞에서 절대 울고 싶지 않아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아 냈다.
성산하가 천천히 아랫입술을 핥으며 떨어졌다. 젖어 반질거리는 놈의 입술을 바라보는데 눈앞에 류수윤이 보낸 메시지가 떴다.
[하말] : 이제 때가 됐어요.
“벌써?”
황급히 뒤를 돌자 제단을 오르는 류수윤의 뒷모습이 보였다.
류수윤이 제단에 오르면, 그럼 정말 끝이 난다.
류수윤의 발걸음을 따라 제단에 새겨진 문자들이 황금빛으로 빛나며 스러지기 시작했다.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성산하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데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성산하가 내 얼굴을 잡아 저를 보게 했다.
“성산…….”
성산하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던 나는 뒤가 비쳐 보일 정도로 투명해진 손을 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뭐라 말하려던 순간, 뒤에서 엄청나게 큰 굉음과 함께 밝은 빛이 퍼져 나갔다. 제단이 무너진 것이다. 동시에 내 눈앞에 수많은 시스템창들이 중첩되어 떠올랐다.
위로 오르는 류수윤의 모습을 본 성산하가 다급히 외쳤다.
“의진아!! 내가 찾으러 갈 때까지 기다려.”
“서, 성산하….”
“반드시,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대답해!!”
무슨, 무슨 말을 해야 했는데.
온통 혼란으로 가득 찬 머리가 어지러웠다. 중첩되어 떠오르는 시스템창에 의해 성산하의 얼굴마저 흐릿해질 때쯤 절박한 놈의 눈빛에 결국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그리고 나……!”
순간 주위의 비명과 붕괴하는 소음이 모두 사라졌다. 소름 끼치도록 평화로운 고요에 천천히 눈을 뜨자 그곳엔 이미 성산하가 없었다. 여긴 마지막으로 열린 하말의 구역이었다.
“카스토르! 돌아왔구나!!”
“성공했어, 정말 성공했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성좌들이 보였다. 주호현 역시도.
“의진아! ……수윤아.”
류수윤이 달려가 주호현에게 키스했다. 그제야 하지 못한 말이 뭔지 기억났다.
‘성산하에게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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