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에필로그 3.
주호현이 만들었을 게 분명한 던전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나와 함께 짰던 지형과 몬스터들을 기반으로 변형한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희귀한 재료들이 넘쳐났다.
“이거 설마 만드라고라? 심지어 점박이다!!”
“어? 저거 잡아야 해! 쫓아가자!”
“성산하. 나 저기 올려 줘. 보고 가야겠어.”
“절벽에 저건 피아누라잖아? 수중 식물이라 절벽에 필 리가 없는데……. 빨리 가 보자!”
어느새 주호현도 잊고 채집에 열중했다. 웬만한 재료 가지고 날 이렇게 흥분하게 만들기 쉽지 않은데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희귀 재료들이 오 년 사이 더 이상 희귀한 게 아니게 된 건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던전 생태가 바뀌었나? 돌아가면 알아봐야겠어.’
그 재료들이 모두 나를 유인하기 위한 표식이었다는 것은 막다른 길에 뜬금없이 놓인 워프를 보고서야 알아챘다. 내 뒤로 다가온 성산하가 역시……. 하고 중얼거렸다.
“뭐야, 알고 있었어?”
“널 노리는 게 누굴까 고민하고 있긴 했지.”
워프를 꼼꼼히 살핀 성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널 부르고 있군. 들어가도 되겠어.”
갈까? 성산하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고 함께 발을 들였다.
언젠가 봤던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투명한 물이 졸졸 흐르는 연못과 만개한 꽃들, 완성된 주호현의 정원이었다.
“메에에.”
품에 안고 있던 구름이가 놓아 달라고 발버둥 쳤다. 구름이를 아래 내려 주고 길을 따라 발을 들였다. 주호현은 등나무꽃이 늘어진 차광막 아래 앉아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던전 상황을 살피던 주호현이 날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의진아!!”
“주호현!”
와다다 달려온 주호현이 날 덥석 끌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말이 없는 놈의 등을 토닥였다.
“내가 다시 보러 오겠다고 했잖아.”
“……많이 힘들었지.”
순간 치미는 감정에 입술을 깨물었다. 빈말로라도 별거 아니었단 말이 나오지 않아 꾹 눌러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떼며 물었다.
“류수윤이랑 같이 있을 줄 알았더니?”
“너 온 거 보고 나만 내려왔어. 탑의 주인만 내려올 수 있어서.”
“아아.”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주호현이 성산하를 보고 꾸벅 머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초면이네요. 반갑습니다.”
성산하와 함께 차광막 아래 벤치에 앉았다.
정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구름이가 주호현에게 다가가 말을 걸듯 긴 울음소리를 냈다.
“메에에에.”
“아, 그게 수윤이는 못 와. 여긴 카스토르의 탑이라서…….”
“너 구름이랑 말이 통해?”
“응? 어…. 들리네.”
주호현이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이. 너 여기 오자마자 류수윤만 찾기야? 주호현이 여기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아는 척도 안 하고 말이야.”
“미에에에에!”
“어어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욕했지!”
“메에.”
쾅쾅 발을 구르던 구름이가 주호현에게 돌진했다. 머리로 다리를 박고는 제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등 이해하기 힘든 모습에 주호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구름이 뭐 하는 거냐?”
“잘 모르겠는데…….”
고개를 젓는 주호현의 뒤로 황금빛 형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점점 형체가 드러나는 모습에 놀라 손가락질했다.
“류수윤이다!”
내 말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 주호현 역시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윤아? 너 어떻게…….”
“응, 호현아. 보고 싶어서.”
류수윤이 발끝을 살짝 들어 주호현의 볼에 입 맞췄다.
‘저 미친 새끼!’
흠칫 놀라 무릎 위에 올려 뒀던 주먹을 꽉 쥐는데 옆에서 성산하가 감싸듯 내 손을 쥐며 속삭였다.
“우리도 지지 말까?”
“뒤, 뒤진다!!”
실실 웃는 성산하의 가슴팍을 퍽 치는데 류수윤이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두 분. 다들 의진 씨를 보고 싶어 하는데 덕분에 돌아가면 질투의 대상이 되겠어요.”
“…못 온다며 어떻게 내려왔냐?”
“글쎄요. 구름이의 영향인 것 같은데…….”
“메에에에.”
“고마워.”
구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류수윤이 나와 성산하를 보더니 눈을 휘며 생긋 웃었다.
“표정이 밝아서 마음이 놓여요. 큰일이었을 텐데 빠르게 회복하셨네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포션 마스터 강의진이야. 자-연-회복은 내 적성에 맞지 않거든.”
물론 후유증이 극심했으나 잠이 안 오면 수면용 포션을 먹고 불안한 마음이 들면 안정 효과가 있는 포션을 투척하는 식으로 약물의 도움을 받았다. 나 역시 당시의 기억을 잊고 잔재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 의지가 컸기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던전을 이제야 연 거야? 벨라 누나나 다른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열었다던데. 류수윤도 그렇고. 무슨 문제 있었어?”
“아…. 별로 그런 건 아니…….”
“호현이도 깨어난 지 얼마 안 됐거든요.”
“뭐? 그게 정말이야?”
“수윤아!!”
주호현이 창백한 얼굴로 류수윤을 돌아봤다. 하지만 류수윤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의진 씨가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현이도 쓰러졌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둘이 연결된 무언가가 있는 느낌이네요.”
성좌의 굴레를 벗어나 이젠 아무 관련 없을 줄 알았는데…….
“너도, 너도 그곳에 떨어진 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차라리 네 시간을 나눠 들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개소리 마라.”
또 땅굴 파고 들어갈 것 같은 모습에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
던전에 마냥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떠날 시간이 가까워져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성산하가 주호현을 불러 세웠다.
“의진이 신변 정리하다 발견했는데 ‘주호현’ 이름으로 가진 부동산이랑 지속적으로 후원하던 곳들이 몇 군데 있던데요.”
“아… 네. 맞습니다.”
“원하시면 처리 도와 드리죠.”
둘이 따로 얘기하는 사이 나는 뒤로 빠져 류수윤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류수윤이 웃으며 다가왔다.
“네. 의진 씨.”
“야. 너 일부러 보냈지.”
앞뒤 다 자르고 물은 말인데도 류수윤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내가 그 좆같은 시간과 공간의 방에 갇혔을 때 할 일이 존나 없어서 하기 싫어도 머리가 계속 굴러 가더라고? 그러다 보니 알겠더라. 조디악 시스템 자체가 애초에 폴룩스가 같이 갈 수가 없던 구조더라고. 구름이도 마찬가지고.”
“음…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역시! 이 새끼,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다.
쌍둥이자리니,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전설이니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 조디악 시스템에 할당된 자리는 하나다. 류수윤은 날 내려보내고 주호현에게 카스토르의 굴레를 씌워 위로 끌고 간 거다. 선심 쓰듯 구름이까지 던져 주면서!
“주호현이랑 구름이가 어떻게 됐을지 몰라서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도 나처럼 주호현 등쳐 먹으면 뒈진다.”
“그런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겐 호현이가 가장 우선이니까요.”
“지랄하네.”
“오해는 하지 마세요. 더 나은 방법이기에 권했을 뿐 의진 씨가 없어야만 호현이를 데려갈 수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산하 씨가 성공할 줄 알기도 했고요. 다만…… 호현이가 이렇게 쓰러질 줄 알았다면 말하지 않았을 텐데,”
“이야… 또라이 새끼네 이거.”
정면을 바라본 채 류수윤과 얘기하던 중 서로 대화를 끝낸 성산하와 주호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둘이서 무슨 대화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별거 아냐. 다 끝났냐?”
성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프를 통해 나가기 전, 주호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에 보자.”
“…자주 와. 의진아.”
“내가 보통 바쁜 몸이 아니라서. ……그래도 뭐, 시간은 내 볼게. 구름아! 이리 와!”
구름이를 안아 들고 성산하와 함께 마지막 층을 빠져나왔다.
***
왔던 길 그대로 빠져나가는 둘의 모습을 보던 호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의진이 걱정할 거라고…….”
원망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에 류수윤이 방긋 웃으며 주호현을 끌어안았다.
“의진 씨 다신 못 볼까 봐 그랬지.”
“그게 무슨 소리야? 의진이가 자주 온다고 했어.”
“산하 씨 표정이 좋지 않았잖아. 성좌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어. 이대로 보내면 의진 씨를 다신 보내지 않을 것 같았단 말이야.”
“…좋은 사람 같았는데. 그럴 것 같진 않았어.”
“……으응. 내가 미안해. 조금이라도 의진 씨와 네 연결점을 남겨 두고 싶어 그랬던 걸로 치자. 그러면.”
의진이와 내 연결점……. 호현이 마음에 드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