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외전 4.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피곤하고 졸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방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데 안송아가 타이밍 좋게 말했다.
“진명이랑 승연 씨는 이미 꿈나라인데 더 마실 수 있는 사람만 남고 들어갈 사람은 들어가죠? 수철이도 좀 재워야겠고.”
“저 그럼 진명이 데려다주고 올게요.”
곰 같은 진명이를 깨워 부축하려는 윤하얀의 모습에 나도 승연이를 들어 안으며 말했다.
“누나. 내가 옮길게. 진명이 오늘 손님방에서 재워.”
“의진 씨는 안 피곤해? 많이 마셨잖아. 들어가도 되는데.”
“나는…….”
말하려던 순간, 안송아 옆에 오만한 표정으로 앉아 바라보는 임단과 눈이 마주쳤다. 그 조그만 얼굴에 적혀 있었다. ‘이겼다’라고.
“씨이, 당연히 더 마시지!! 앞으로 열 병도 더 거뜬해!”
한껏 흥이 난 용수철은 재우는 데 실패하고, 승연이와 진명이를 각자 방에 던져뒀다. 돌아오니 처음처럼 리셋되어 있는 테이블에 꿈인가 싶어 눈을 비볐다.
다시 자리에 앉으니 옆에 있던 임단이 몸을 기울여 물었다.
“그런데 강의진. 너 진짜 몰랐어?”
“뭘.”
“다인 언니랑 김진명 사귀는 거.”
“몰랐다니까.”
“진짜 바보냐? 어떻게 그걸 모르냐?”
“뒤졌을 때 사귄 건데 어떻게 아냐고.”
“그 전부터도 졸졸 따라다녔다던데.”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껌딱지….”
고릿적 기억을 뒤지느라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백다인도 궁금했는지 슬며시 물어봤다.
“저도 궁금해요. 의진 님 공방에 있었을 때가 제일 자주 마주치던 때였거든요. 사실 감정적 기류가 있긴 했는데……. 그때도 아무 생각 안 하셨어요?”
내가 김진명이 어땠는지 따위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
“그냥 도매상이랑 채집가니까. 친하게 지낼 수도 있는 거잖아. 상생 관계 뭐 그런 거 말이야.”
“네에? 상생 관계요? 아하하.”
“푸하-! 웃기네. 그럼 너도 성산하랑 상생 관계냐?”
“성산하가 여기서 왜 나와.”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웃음에 불퉁하게 묻자 임단이 코웃음 치며 답했다.
“너 성산하랑 사귀잖아.”
“뭐래. 아닌데.”
“뭐? 아직 안 사귄다고?”
“무슨 소리야. 아직이고 뭐고, 내가 성산하랑 왜 사귀는데.”
술잔을 내려놓으며 부정하자 분위기가 싸해졌다. 취해 무뎌진 감각에 이상함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대체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도 그렇고, 아까 그 직원들도 그렇고……. 다 존나 이상해.”
“너 성산하 좋, 아니 성산하가 널……. 아니-! 뭐가 됐든!! 그럼 지금 둘이 아무 사이 아니라는 말이야?”
임단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성산하와 나의 관계를 정의할 생각을 해 본 적 없기에 대답이 곧장 나오지 않았다.
성산하랑 내가 무슨 관계냐고? 당연히 친…… 친구인가, 우리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백다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혹시, …한서진 에스퍼랑 진행 중이신 건가요?”
“진행하긴 뭘 진행해. 걔는 또 왜 나오는데.”
“최근에 공방도 한번 놀러 오셨잖아요.”
“의진 씨, 그 에스퍼랑도 뭐 있던 거 아니었어?”
“맞아. 나도 둘이 사귀었다가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뭐? 미쳤냐!!”
황당해 벌어진 입이 다물려지지도 않았다. 이러다 태제헌도 나오겠네, 하고 생각하던 때, 역시나 임단이 경악한 얼굴로 뻐끔댔다.
“그럼 너 설마 태…….”
“씨발! 아니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머리가 징징 울렸다. 임단의 눈에 서린 의심이 억울해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키스는 해 봤는데 진짜 사귀진 않는다고.”
“키, 키스라고 했냐. 지금?”
충격 어린 임단의 시선을 보자 뭔가 말실수를 한 듯해 머리를 긁적이다 덧붙였다.
“……물론 내 친구 얘기야.”
“지랄. 네가 친구가 어딨어.”
윤하얀이 당황한 눈으로 백다인과 시선을 교환했다.
“친구… 사이에도 키스를 할…… 수야 있죠? 상황은 가지각색이니까요. 썸이라든…….”
“역시 그렇지? 그럼 나 성산하랑 친구야.”
“의진 씨……. 친구 이야기라면서!!”
“너…! 강의진 이 멍충아!”
노성을 지른 임단이 테이블을 탁 치자 유리잔 여러 개가 깨졌다. 임단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 새끼가 그래? 친구끼리 키스해도 된다고? 썅, 어린애 데리고 뭐 하는 거야? 친구? 개-소리하고 있네! 친구는 개뿔. 성으읍! 너 갖고 노는 으으읍!!”
“다, 단아! 그만해.”
“누님! 취하셨습니다.”
윤하얀과 수철이가 달려들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인 듯 취기가 폭발한 임단을 막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 와중에 다인 누나가 한 말이 머릿속에 둥둥 맴돌며 제멋대로 재조립되었다.
-친구 사이에도 키스를 할 수 있죠.
-친구끼리 키스할 수 있죠.
-당연히 할 수 있죠!
생각보다 별일 아닌가 보다. 고민거리가 덜어지자 애써 참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몰려드는 피곤함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남은 넷은 앞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언니느은- 저 멍청이가 답답하지도 않냐고!”
“에이, 아무리 그래도 길드장님이 그럴 사람까진 아니지. ……맞나?”
“아니야. 이건 끝장을 봐야 해. 그 자식 당장 여기로 부르자.”
“맞습니다! 송아 누님은 보스라고 팔이 안으로 굽으신 겁니다! 저도 가만 두고 볼 수 없슴다!”
쾅쾅 테이블을 내리치는 수철이의 손길에 잔과 병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고, 임단의 손에도 서릿발 같은 기운이 언뜻언뜻 어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스킬이 튀어 공방을 부술 것 같은 모양새다. 어떻게 하지…….
가만히 지켜보다 연구실에서 포션 하나를 들고나와 모여 있는 이들 가운데로 냅다 던져 버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뭉게뭉게 퍼지고 넷이 소파 위로 털썩 쓰러졌다.
“좋아. 좋아. ……으으음, 루빈스툴라 원석….”
귀에 익어 버린 수철이가 부르던 축가를 흥얼거리며 내 방으로 올라갔다. 위층에서 놀고 있었는지 한참 보이지 않던 구름이가 후다닥 따라 들어와 침대에 누운 내 품에 파고들었다.
구름이의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으며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친구끼리 키스를 해도 된다니 고민은 덜었지만, 누나들이 하나 모르는 게 있었다. 오 년 전 성산하가 내게 했던 고백. 그땐 죽을 작정이라 아무런 답도 해 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나도 성산하를 좋아하고, 성산하도 오 년 전 내게 분명히 사랑한다고 고백했다고. 서로 좋아하면 친구가 아니지 않나?
-사랑해. 강의진.
죽기 전에 했던 고백인데 아직도 유효한 건가? 설마 그사이에 마음을 바꿔 먹은 건 아니겠지? 남자답지 못하게.
여하튼, 아직 성산하와 나의 관계가 확실히 정립된 것은 아니란 말이다.
‘다인 누나랑 진명이처럼…… 나쁘지 않은데.’
성산하가 치졸하게 마음을 바꿔 먹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서로 좋아하기도 하고, 키스도 하지만 우린 아직 친구다. 그렇다면 대체 친구에서 사귀는 관계로 넘어가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머릿속이 성산하 생각으로 가득 찼다.
“흐아아암. 잠 온다.”
“메에.”
점점 취기가 오르는지 몸이 둥둥 뜨는 것이 기분 좋았다. 창밖을 바라보자 새하얀 달이 떠 있었다. 새하얗고 예쁜…… 사나.
“……보고 싶은데 언제 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언제 잠든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옆에서 기척이 느껴져 눈을 뜨자 어스름한 불빛에 비친 성산하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남은 술기운에 눈앞의 형상이 진짠지 모르겠어 눈만 꿈뻑이며 멍하니 바라보자 성산하가 픽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자.”
머리칼 깊숙이 헤집고 들어오는 손가락이 기분 좋았다. 잔뜩 몽롱한 기분이었지만 자고 싶진 않았다. 성산하도 그걸 알았는지 더 자라고 한 주제에 말을 걸어왔다.
“로비가 아주 가관이던데. 무슨 짓을 한 거야.”
“…재워 준 거야. ……자야 하니까.”
“하하, 누가 말리겠어. 널.”
“……넌 왜 이렇게 늦게 왔는데.”
“일이 늦게 끝나서. 기다렸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웃는지 가볍게 떨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성산하가 잔뜩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 ……많이 마셨어? 의진이 술 잘 못 마시잖아.”
“씹, 못 마시긴 누가…. 내가 다 이기고 마지막까지 깨어 있었거든.”
“포션으로 기습해서겠지.”
“……네놈 새끼 패시브나 끄고 말하시지.”
“나중에 남자답게 일대일로 붙어 볼까?”
“그럼 당연하지. 안 봐도 내가… 하아암. 이길 거다.”
하품을 하던 그대로 눈을 감자 성산하가 가볍게 날 흔들었다.
“잘 거야?”
“으, 머리 아파……. 흔들지 마.”
킥킥 웃던 성산하가 볼을 쿡 찌르며 물었다.
“힐해 줄까. 바로 깰 수 있는데.”
“필요 없어. 푸른 목산호나 해독 포션 먹으면 금세……. 게다가 애초에 안 취했…. 하암, 다고.”
“안 취했는데 왜 이렇게 얌전하고 귀여워.”
“……헛소리하네. 힐 싫어.”
제멋대로 쓰는 힐에 당할 순 없었다. 내일 포션으로 해장할 거라며 단단히 엄포를 놓자 성산하가 아쉬워하며 가슴팍을 도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