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외전 8.
“하하하….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자연스레 내 곁으로 다가온 성산하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슥슥 정리해 줬다. 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데 성산하가 이초에게 물었다.
“벌써 끝났나? 기가빈은.”
“이번 KQ랑 월계나루 일로 급히 콘셉트 변경을 하게 됐습니다. 인터뷰 질문도 싹 교체하느라 오늘은 무리라고 하더군요. 내일로 미뤘습니다.”
“그럼 강의진 데려가도 되겠네.”
날 돌아보며 웃은 성산하가 갈까, 하고 물었다. 미리부터 약속된 일정이라 고민 없이 발을 옮기는데 승연이가 나를 잡았다.
“의진 님 오늘 저녁 먹고 오시나요?”
“아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하얀 누나랑 송아 누나 이따 또 온다는데. 디무인가 뭔가 이제 마시지 말고.”
“네에……. 늦게 오세요?”
“글쎄, 지금이 여섯 시니까…….”
시간을 가늠하는데 내 어깨를 잡아당긴 성산하가 가볍게 웃으며 대신 답했다.
“기다리지 마.”
***
가려고 했던 100년 전통 할머니 국밥집이 오늘 재료가 모두 소진되었다 해서 차를 돌렸다. 이후로 들르는 곳마다 문을 닫거나, 웨이팅이 너무 길어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주변 드라이브나 한 꼴이 되었다.
“배고파…. 배고프다-.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겠다.”
“으음, 큰일이네. 전에 갔던 레스토랑이라도 갈래? 거긴 열었을 텐데. 아니면 그 옆에 일식당이나.”
“싫어. 오늘은 한식을 먹기로 아침부터 정해 놨다고.”
“그럼…….”
톡톡 핸들을 두드리던 성산하가 돌연 고개를 기울여 나를 바라봤다. 장난스러운 표정에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성산하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우리 집으로 갈래? 맛있는 거 해 줄게.”
짓궂은 미소가 무슨 의민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해 준다고? 너 요리 할 줄 알아? 뭐, 그러든가. 맛없으면 각오해라.”
요리하는 성산하의 뒷모습을 보며 맛있는 냄새에 코를 씰룩이다 시선을 돌려 집을 구경했다. 높은 천정이나 정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통창, 거실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과 그 옆에 진열된 멋있게 생긴 술병들. 전부터 집에 놀러 오라는 초대는 받았었지만 직접 와 본 건 처음이었다. 평소에 머무는 집이 맞는지 깔끔히 치워진 와중에도 군데군데 생활감이 보였다.
‘술이 대체 몇 개야? 이 자식, 왠지 술을 잘 마신다 싶더라니. 옆에 상패는 뭐지? 미스틱일 때 받은 건가? ……어? 저 의자는 저번에 영상통화 할 때 봤던 거다. 맨날 앉아 있는 데가 저기였군.’
흔적들을 살피며 성산하의 습관 따위를 유추하는 놀이를 하는데 앞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성산하가 살짝 고개 돌려 물었다.
“오늘 뭐 하면서 기다렸어?”
“바빴어. 공방 일 하다 약산에 가서 연구 좀 하다……. 잠깐, 기다리긴 누가 기다렸다는 거야?”
“그래서 안 기다렸다고?”
“……썅, 조금 기다렸다. 엄청 조금.”
웃느라 들썩이는 등판을 퉁명스럽게 바라보다 문득 드는 생각에 턱을 괴고 물었다.
“근데 너 선재랑 애들 한 번도 보러 간 적 없다는 거 진짜야?”
“누구?”
“월영 보육원 애들 있잖아. 선재랑 하늘이, 양태오랑…….”
“아아….”
정말 모르는 표정을 하던 성산하는 그제야 기억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만났어야 했나?”
“왜? 그래도, 친구였고…… 궁금하잖아?”
“글쎄. 그다지 궁금하진 않던데.”
“너 꼬맹이들한테 친절한 편이잖아. 난 그래서 당연히 보고 왔을 줄 알았지.”
별 싱거운 소릴 다 들었다는 듯 가볍게 웃은 성산하가 그릇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착해야만 봐 줬으니까.”
“응?”
작은 의문은 성산하가 완성한 음식을 보자 깨끗이 사라졌다. 갓 지은 하얀 쌀밥부터 먹음직스럽게 윤기 나는 제육볶음, 콩나물국에 계란말이. 냉장고에 있던 열댓 개의 밑반찬까지 꺼내 옮기니 순식간에 식탁 가득히 음식들이 차려졌다. 아침부터 먹고 싶었던 것들이라 군침이 돌아 어서 성산하가 앉길 기다렸다.
눈이 마주친 놈이 고갤 끄덕이자마자 나도 수저를 들었다. 밥을 한술 크게 떠 집어넣는데 성산하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잘 안 고쳐지네. 허락 구할 필요 없다니까.”
“……또 그랬냐? 습관이라.”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집고 있던 고기를 한입에 넣었다. 먹자마자 눈을 크게 뜨니 지켜보고 있던 성산하가 웃었다.
“생각보다 맛있나 봐?”
“……응. 솔직히 아무 기대 없었는데 존나 맛있어. 왜 이렇게 잘하냐?”
“어릴 때부터 혼자 챙겨 먹어야 해서 자연스럽게 늘었어.”
“아하…….”
성훤을 만나기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지만 성산하나 이초 모두 물어봐도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천지심연 던전에 던져져 혼자 살아남은 어린아이가, 저주까지 가진 채로 어떻게 살았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보육원 애들도 그래서 만나지 않은 건가? 하긴, 성산하에겐 마냥 반가운 기억이 아닐 수도 있겠네.’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데 성산하가 내 앞에 파란색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
“뭐야?”
성산하의 손가락이 치워진 자리에 선명하게 보이는 ‘대한민국 여권’이 여섯 글자에 놀라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거… 여권이잖아!”
“응. 의진이 네 거야. 신상 복권 처리하면서 같이 만들었어. 다른 신분증들도 있는데 그건 각성자 등록까지 마무리되면 한 번에 줄게.”
“내 여권이라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펼쳐 보자 사진과 함께 ‘강의진’하고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여권이 구겨지지 않게 애써야 했다.
내 여권을 갖는 건 처음이다. 가고 싶었던 나라들이 무지하게 많았는데 이제는 어디든 마음껏 갈 수 있단 거잖아!
“이것만 있으면 이제 마음대로 비행기 타고 다른 나라도 갈 수 있다는 거지?”
“그럼.”
“미친! 고마워, 성산하!!”
신이 나 성산하를 꽉 끌어안았다. 웃음기 어린 음성이 다정하게 물었다.
“가고 싶은 곳 있어?”
“당연하지, 엄청 많아! 이탈리아에 가서 벨라도 봐야 하고, 영국 가서 주벤 할배랑, 사달이랑 아쿠벤스도 봐야 하고…….”
“성좌들을 다 만나러 갈 셈이야? 적어도 열 곳이란 말이네.”
“거기뿐만이 아니야. 아라비아 사막에서만 나는 재료가 있는데 인벤토리에 넣으면 효력이 떨어져서 그 자리에서 바로 제조해야 해. 거대 석상의 심장을 구할 수 있는 칠레도 가야하고, 미미르의 샘물로 포션을 만들면 엄청나게 놀라운 결과물이 나온댔어. 북서대서양에 위치한 어느 무인도에 있대. 진짜 가고 싶었는데.”
킥킥거리며 웃던 성산하가 가볍게 머리를 헝클였다.
“이렇게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어떻게 참았어. 그래, 다 가자. 네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데려다줄게.”
“약속한 거다.”
공방이 안정되면 시간을 내서 곧바로 떠나야지. 어딜 먼저 갈지 행복한 고민이었다.
감동의 여권 전달식 이후로 입맛이 돌아 한 상 가득이던 음식을 모조리 비웠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늘어져 있는데 성산하가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물 줄까? 음료수 마실래?”
“난 사과 주…… 아니, 술! 술 마실래.”
대충 답하다 눈을 번뜩이며 말을 바꾸자 답을 듣기도 전부터 사과 주스를 꺼내던 성산하가 멈칫해 날 돌아봤다.
“술을 마시겠다고?”
“생각해 보니 오늘은 마셔야겠어. 내 여권이 생긴 날이잖아! 으하하.”
“……요즘 너무 자주 마시는데.”
“그건 어제만 그런 거고, 다른 날은 일하느라 바빠서 못 마셨어.”
“그러다 몸 상해.”
“포션 마-.”
“포션 마시면 된단 소리는 하지 말고.”
“쳇.”
술 아니면 아무것도 마시지 않겠다 농성하며 드러눕자 성산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미심쩍은 표정을 하던 놈이 결국 가져온 것은 샴페인이었다. 도수를 보자마자 야유하며 뒤에 진열된 것 중 가장 멋있어 보이는 술을 집었다.
“12도면 주스잖아! 난 양주 마실래.”
“하아……. 안 돼. 너 여기서 취하면 감당 못해.”
“안 취해. 취해도 여기서 자고 가면 되잖아. 너네 집이고, 침대도 많고…….”
“의진아. 그게 문제라고.”
“으엉?”
“집 보내 준다고 할 때 얌전히 샴페인 마셔.”
단호히 답한 성산하가 손에서 양주병을 가져갔다. 제자리에 올려두고 놈이 샴페인 잔을 들고 올 때까지 팔짱 끼고 앉아 심기 불편한 티를 냈다.
‘지금 자기 집 아깝다는 거지? 치사한 새끼. 내가 공방에서 얼마나 많이 재워 줬는데.’
맞은편에 앉은 성산하가 잔을 내려놓고 캡을 까려는 모습에 손을 뻗었다.
“엇, 나 그거 해 보고 싶었어. 내가 열래.”
“코르크 처음 따면 어려워. 내가 해 줄게.”
“……양주도 못 먹게 하고 샴페인도 못 까게 하고.”
이미 기분이 상한 상태라 뭐든 비뚤게 보였다. 입술이 부루퉁하게 나온 채로 투덜대자 성산하가 헛웃음을 지으며 내게 병을 건넸다. 병목을 잡자마자 신이 나 자세를 바로 하자 성산하가 잔소리를 해 댔다.
“뮤즐렛 제거하기 전까지 손 떼지 마.”
“쉽잖아. 그냥 이 철사 풀어내고, 코르크만 따면… 엇, 이거 왜 이렇게, 빡빡……해!”
빡빡한 코르크를 힘으로 잡아 빼자 펑 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손안의 코르크가 미끄러졌다.
“강의진!”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갈색 물체 뒤로 황급히 손을 뻗는 성산하가 보였다. 곧 이어질 타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