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6화 (6/122)

#06

“아!”

누군가와 부딪쳤다. 부딪친 상대는 단단하고 강했다. 부딪친 그 순간 몸이 뒤로 확 밀려났다.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그 찰나의 순간 다시 몸이 확 앞으로 당겨졌다. 하진은 얼굴 위로 좋은 향이 확 다가옴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하진은 이 향을 알고 있었다.

차정우. 이건 정우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하진은 제 등을 끌어안듯 누른 느낌과 숨을 쉬는 순간 몸속 깊은 곳까지 확 퍼지는 정우의 향에 다시 눈을 꽉 감았다. 심장이 아래로 확 떨어졌다.

“형, 괜찮아요?”

정우가 하진의 어깨를 쥐며 살짝 몸을 떼어냈다. 꽉 붙어 있던 몸이 떨어지자 하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는 순간, 저를 향해 얼굴을 기울인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

“형?”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있었나. 분명한 것은 있었다고 해도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진은 저를 향한 그 곧은 시선과 갑자기 알 수 없어진 저의 마음, 그리고 제 얼굴 위로 드리워진 정우의 그늘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형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어깨를 쥐고 있던 정우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제 어깨에서부터 팔까지 쓸며 내려가는 정우의 손에 하진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오싹할 만큼 서늘한가 싶다가, 순간 확 도는 열기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제 몸인데도 전혀 제어할 수가 없었다.

“아, 아니야! 일은 무슨! 갑자기, 갑자기 부딪쳐서 놀라서 그래….”

“정말이죠?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정우는 하진의 팔을 양손으로 단단히 쥔 채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살폈다. 진지함에 장난이 섞이기 시작했다. 하진은 정우의 얼굴이 목덜미 쪽으로 가까이 갔다가 또 머리 위로 내려오는 것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원래라면 맞장구를 치면서 장난을 쳤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진짜 이상하네.”

“뭐, 뭐가?”

“말도 잘 안 하고, 진짜 어디 아파요?”

저에게만 집중된 정우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수도 없이 눈을 맞추고, 이렇게 같이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걸까. 하진은 슬쩍 뒤로 몸을 빼며 정우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씩 웃었다.

“언제 나 아픈 거 봤어? 내가 왜 아파.”

평소와 다름이 없이 웃는 하진을 본 뒤에야 정우는 안심한 얼굴로 작게 미소 지었다.

“왜 나와 있었어요? 아! 나 기다렸구나.”

“아니거든.”

하진은 힘이 쭉 빠진 손으로 겨우 들고 있던 이온 음료 병을 들어 정우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 음료수 병을 본 정우가 질투 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마개를 열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대고 한 모금을 크게 마셨다. 하진은 그런 정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부끄럽고, 귓가가 뜨거웠다.

“어, 진짜 이상해.”

“또 뭐가아…….”

말을 길게 쭉 늘이는 하진을 보며 웃은 정우가 그대로 하진의 손을 잡아 제 뺨에 가져다가 댔다. 찬 음료를 계속 들고 있어 차가워졌던 하진의 손이 금세 정우의 체온으로 물들었다.

“이럴 땐 나 기다렸다고 해줘야지. 형 변했어요. 내가 제일 좋다더니.”

“…….”

웃는 얼굴 역시 처음 보는 게 아닌데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하진은 정말 제가 좀 이상하다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정우에게 잡히지 않은 손도 마저 들어 그대로 정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우리 막내 녹음은 잘했어?”

“그럼요. 다시 하길 잘했어요.”

“다행이다. 역시 우리 정우 하고 싶은 거 다 해야 돼. 이제 들어가자.”

“네.”

하진의 손목을 쥐고 있던 정우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하진은 뒤도는 정우를 보며 들리지 않게 고여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우에게 잡혔던 손목을 괜히 다른 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눈에 담기는 그 익숙한 뒷모습에 손목이 낯선 화끈거림을 머금었다. 하진은 영문을 모를 이 마음의 변화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

정우 네 말이 맞아. 나 좀 이상해.

***

하진은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우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해 왔는데, 왜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별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코너를 돌다가 정우와 부딪쳤을 뿐이고, 평소처럼 저를 잘 따르고,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막내 정우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등을 끌어안고, 얼굴을 가까이하고, 이런 것쯤이야 평소에도 가끔 있는 일이었다.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이유가 없는데 이상해진 결과만 존재했다. 하진은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무거워진 마음을 안은 채,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잤어요?”

“…응?”

“형 자는 줄 알았는데.”

어깨 위로 기분 좋은 무게가 더해졌다. 하진은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늘 하던 것처럼 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뺨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하진에게 정우는 아주 고마운 은인이자 가장 소중한 동료였다. 그리고 동시에 친동생이면 좋겠을 정도로 사랑하는 막내였다. 아마 진짜 친동생이 있었다고 해도 정우한테 하는 것처럼 잘해 주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하진은 정우가 정말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또 이렇게 저에게 살갑게 굴고, 다정하게 붙어오는 게 귀엽고 좋았다. 제가 이상해졌다고 해도 그 마음은 전과 똑같았다. 그런데 왜 늘 하던 행동들에 멈칫하게 되는 걸까. 정우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다시 숨을 내쉰 하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몹시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을 만큼 머리 안이 복잡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숙소에 도착한 밴이 시커먼 입을 쩍 벌린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멤버들은 모두 좀비처럼 축 늘어진 채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 피곤한 와중에도 리더인 인규가 오늘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었다. 하진은 형도 고생 많으셨다는 말을 남기고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등 뒤로 따뜻함이 확 달라붙었다. 그리 놀랄 것이 없는 너무나도 익숙한 체온이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심장이 확 떨어졌다. 하진은 웃을 수 없었다.

“형 며칠째 왜 그래요. 말도 잘 안 하고.”

“내가 그랬어?”

“다른 형들은 몰라도 난 알아요. 형 얼굴만 봐도 기분 어떤지 다 아는데.”

“…내 기분이 어떤데?”

하진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옆에 있는 침대에 앉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쓰고 있던 캡을 벗고 아무렇게나 머리를 털어낸 정우가 어둠 속에서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손을 뻗어 침대와 침대 사이에 있는 협탁 위에 놓인 무드등을 켰다. 그리 밝지 않은 빛이었지만,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디 보자.”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렇게 키가 큰 남자 둘이 침대에 마주 보고 걸터앉으면, 아슬아슬하게 무릎이 닿을 정도의 통로만이 존재했다. 하진은 제가 있는 쪽으로 몸을 확 기울이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자 무릎이 닿았다. 정우는 그렇게 몸을 기울인 채 하진의 얼굴을 살폈다. 하진은 숨도 쉬지 못하고 연약한 빛 속 가까이 다가온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민 있는 것 같은데.”

“…고민은 무슨. 요즘 고민 같은 거 할 시간도 없는데.”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은 짙고 깊은 눈동자, 눈동자 위를 덮고 있는 눈꺼풀과 짧지 않은 속눈썹. 매끄러운 콧날과 멋진 목소리를 내는 입술. 누구라도 이 얼굴을 보면 한 번씩은 뒤돌아보았다.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하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제 얼굴 가까이에 정우가 있었다. 어쩐지 조금은 걱정하는 얼굴로, 또 조금은 변해버린 저에게 서운한 모습으로. 이 어둠 속에 존재하는 모든 빛들이 다 정우에게 닿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진은 다시 추락하는 마음을 외면한 채 늘 그랬던 것처럼 밝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내가 무슨 고민이 있다고. 그냥 데뷔 얼마 안 남았잖아. 그래서 그렇지.”

“정말 그게 다예요?”

“그럼 더 있을 게 뭐가 있어.”

“음,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시간이 어디…….”

하진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인데 갑자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하진을 보며 정우가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어, 뭐야. 진짜예요?”

“말도 안 되잖아. 그럴 시간이 어디 있다고.”

“원래 연애는 없는 시간 쪼개서라도 하는 거잖아요.”

“경험담?”

“그건 노코멘트.”

씩 장난스럽게 웃은 정우가 긴 다리를 올리며 침대에 누웠다. 하진이 그런 정우를 보고 작게 웃었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후드 지퍼를 내렸다. 그렇게 제법 두꺼운 한 겹을 벗어낸 하진이 자신의 공간으로 몸을 기울였다. 벽을 보고 눕자, 등 뒤에서 정우의 목소리가 닿아왔다.

“잘 자요, 형.”

“…….”

너도 잘 자. 오늘 고생했어. 늘 하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은 벌어졌는데 결국 소리는 맺히지 않았다. 하진은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벌써 자요?”

다시 한번 목소리가 닿아왔지만, 하진은 결국 그 어떤 굿나잇 인사도 소리 내지 못했다. 그리고 새벽의 시간이 흐르는 내내 잠들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거나.」

그 말도 안 되는 정우의 말이 내내 머리 안을 빙빙 돌았다. 하진의 생각을 흡수하는 작은 생각이 점점 큰 원을 그리며 돌고 또 돌았다. 완전히 그 궤도 안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밀려드는 피곤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

좋아하는

“…….”

사람. 말도 안 되는 생각, 생각할 필요도 없는 말. 온갖 부정을 다 해보아도 자꾸만 등 뒤가 묵직하고, 화끈대며 잠들 수 없는 최초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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