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음료수를 가지고 오겠다고 해놓고 너무 오랜 시간을 써버렸다. 얼른 휴게실로 들어간 하진이 이온음료 다섯 병을 꺼내 양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연습실로 달려갔다.
“…어?”
문을 열자 정우를 제외한 세 명의 형들이 모두 바닥에 죽은 듯 누워 있는 게 보였다. 하진은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목말라서 죽었다고 전해 달래요.”
“아……. 죄송해요! 너무 늦었죠.”
하진은 얼른 연습실 바닥에 뻗은 멤버들에게 가 이온음료를 한 병씩 손이 놓아주었다. 그제야 해성과 영우, 인규가 차례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난 해성이랑 영우가 하도 누우라고 해서 누웠어.”
“아, 형. 의리 없이!”
갑자기 해성과 영우가 시켜서 누운 거라고 실토하는 인규에게 야유가 쏟아졌다. 하진은 금세 시끌시끌해지는 멤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온음료 한 병을 정우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음료를 마시는 정우를 보던 하진이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저의 이런 시선조차 정우에게 부담이 될 거고, 그 부담이 결국 또 아픈 말들을 만들어 내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돌이킬 수는 없다고 해도, 더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대로 제가 마음만 접으면, 팀에 문제가 없도록 잘 하면, 정우도 조금씩 나아질 것이었다. 완전히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그래도 멤버들 앞에서만 괜찮은 척 연기를 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진은 정우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저절로 드는 생각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행동은 제가 제어할 수 있었다.
보지 말자, 손대지 말자, 놀라지도 말고, 관심을 가지지 말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났다.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지금 이 자리를 지키는 것 그 하나뿐이었다.
“자, 정각부터 다시 연습하자. 내일부터 리얼리티 촬영하고 하면, 아무리 셀프 캠 위주여도 시간 은근 뺏길 거야. 할 수 있을 때 해두자.”
인규의 말에 씩씩한 대답이 연습실 안으로 울렸다. 하진은 마개를 열어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울 앞으로 가 제가 앞으로 나오는 파트 쪽 움직임을 보며 연습하기 시작했다. 아파서 쉰 거기는 하지만, 그래도 뒤처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 때문에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딜레이 되는 것은 더 싫었다.
“강다정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으, 형!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저 지금 완전 소름 끼쳤어요.”
“익숙해질 때도 됐으면서 그런다. 그럼 강스윗? 강댕댕?”
놀리듯 웃으며 말하는 해성과 영우의 별명 배틀에 하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얼른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그런 하진을 본 멤버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진은 거울을 통해 보이는 멤버들의 웃는 얼굴을 보다가 옆에 앉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웃음이 묻은 입술을 한 채 저를 보고 있는 그 눈은 그리 살갑지 않았다. 하진은 얼른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숙였다.
“자, 우리도 같이 다 하자.”
그리고 멤버들이 전부 가까이 온 뒤에야 그 안에 섞여 숨을 쉴 수 있었다. 정우와의 이런 관계도 익숙해질 수 있는 걸까. 언젠가는 이런 사이로 지내는 것도 숨 쉬듯 당연해지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아니, 올 것이었다.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결국 적응을 하고야 마니까. 적응이 아니더라도 체념 같은 것을 하게 될 것이었다.
“…….”
하진은 저의 뒤에 와서 선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기 전 또다시 시선을 먼저 피했다. 적응이든 체념이든 그게 뭐가 되어도 좋으니 괜찮아지기를 바라며.
***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갔지만, 숙소에서도 곧바로 편히 쉬지 못했다. 다음 주에 할 녹음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규앨범은 미니앨범과 달리 트랙이 많았다. 미니앨범에 많아야 세 곡 또는 네 곡이 실렸었지만, 이번 정규앨범에는 총 열 곡의 신곡이 실릴 예정이었다.
모두 너무나도 좋고, 무엇 하나 뺄 수 없이 멋진 곡들이지만, 녹음 준비를 하는 것은 몇 배로 더 힘든 게 사실이었다. 하진은 타이틀곡인 호스티지 외에 가장 좋아하는 수록곡인 ‘뒤척’이라는 곡을 부르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가사지를 보고 있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야. 배 안 고파? 시리얼 먹을래?”
“괜찮아요.”
“그럼 같이… 연습할까?”
“맞출 부분 생기면 말할게요.”
“…응. 알았어. 그럼 연습해. 난 거실 가서 할게.”
“네.”
시선 한 번 마주하지 않은 채 대화가 끝나버렸다. 하진은 문가에 선 채 가사지만 바라보는 정우를 눈에 담다가 돌아서 거실로 나갔다. 각자의 방에서 곡 연습을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저만 갈 곳을 잃고 서 있는 것만 같아 혼란했다.
하진은 두 시간이 넘도록 거실에서 곡들을 연습했다. 물을 가지러 나온 형들이 한마디씩 말을 걸어 주기도 하고, 같이 맞춰 주기도 했지만, 그 시간 동안 정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방으로 들어간 하진은 침대에 기대어 이어폰을 꽂고 있는 정우를 한 번 보고 침대에 올라 벽을 보고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아 괴로울 때마다 정우의 허밍 소리가 들려왔다. 하진은 딱딱한 벽을 바라보며 작게 들려오는 그 낮고 듣기 좋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그 소리에도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그냥 좋았다. 정우의 목소리를 이렇게라도 들을 수 있는 그 자체로 좋았다.
“…….”
너는 내가 이렇게 네 목소리를 듣고 있는 그 자체로도 싫겠지. 이런 나를 알면 더 질려버릴 거야. 경멸하고, 혐오할 거야. 너한테 미움 받고 싶지 않은데, 더 최악이 되고 싶지 않은데, 널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지가 않아. 어쩌지.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하진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방을 나섰다. 같은 공간에 있다가는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진은 쿠션을 들고, 소파 한쪽에 있는 담요를 끌어당겼다.
“…잘했어.”
잘했어. 잘 나왔어. 잘한 거야. 강하진, 정말 오랜만에 잘했어. 하진은 정우의 목소리를 피해 나온 자신을 향해 잘했다고 중얼거렸다. 그냥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잘하고 있다고, 이러다 보면 감정은 옅어지고, 멀리 떨어진 관계는 다시 가까워질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잘했어. 다시 한번 잘했다고 억지로 생각한 하진이 소파에 누운 채 깊게 눈을 감았다.
정우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깊고 아픈 새벽이었다.
***
<아포제 라이프> 시즌2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멤버들에게 각각 하나씩 총 다섯 대의 캠코더가 지급되었고, 무엇이든 좋으니 멤버들의 모든 것을 서로 담으면 된다는 게 지시사항이었다. 물론 너무 자극적이거나, 방송에 나가기 부적절한 언행 같은 것은 삼가 달라는 부탁도 들어가 있었다. 그 외에 방송사에서 나온 메인 카메라 두 대가 있었다. 멤버가 다섯이다 보니 나눠서 이동을 하거나, 뭔가 일이 있을 경우 각각 나눠 촬영을 하기 위함이었다.
최대한 자유롭게 촬영이 진행된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지켜보는 눈이 생기다 보니 행동을 더 조심하게 되고, 말수가 줄어드는 게 사실이었다. 방송사 측에서는 없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적응을 하는 데에는 꼬박 사흘이나 걸렸다.
“다음 주에 녹음인데 미치겠다. 다 되는데 사이드 이펙트 랩이 안 붙어. 열 번 하면 일곱 번은 틀려. 비트가 예술인데, 마음만 앞서고 혀가 따라가지를 못해.”
“한 번 해보세요, 형. 제가 들어볼게요.”
해성이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는 것에 하진이 얼른 그 옆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해성과 함께 가사지를 바라보았다. 해성은 흠흠 목을 가다듬고 가장 어려운 랩 부분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의욕이 앞서 꼬여버린 혀에 고개를 저었다.
“미치겠다, 진짜.”
“음, 형. 중간까지는 좋은데 뒤가 꼬이는 거잖아요. 여기 나의 선택은 잘못, 너를 마신 뒤에 따르는… 여기부터 형이 숨을 안 쉬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나의 선택 앞에 잠깐 비는 것 같은데 쉬어도 되지 않을까요?”
“내가 이상하게 쉬나 봐. 뭐지. 그럼 여기서 한 번, 그다음은 네가 말한 것처럼 여기서 끊어서 해볼게.”
두 사람의 앞으로 인규의 카메라가 다가왔지만, 이제 누구도 카메라를 부담스럽게 의식하지 않았다. 해성은 가사지에 다시 체크를 한 뒤 하진이 말한 곳에서 숨을 뱉으며 랩을 해보았다.
“어! 됐다!”
“아, 이거였네. 대박. 진작 너한테 물어볼걸. 야, 하진아. 네가 나 살렸다. 와, 난 내가 잘 쪼갠 줄 알았어.”
“다 형이 잘하셔서 되는 거예요. 그리고 원래 이게 맞는 것 같으면 바꿀 생각 잘 안 들잖아요. 저도 매번 그래요.”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하진을 보던 해성이 그대로 인규의 카메라를 바라보며 하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하진의 머리칼 위에 쪽쪽 크게 소리가 나도록 입 맞췄다. 저 멀리서 영우가 경악하며 달려와 얼른 하진을 떼어냈고, 영우가 당겨 바닥으로 거의 눕게 된 하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너 왜 우리 하진이 오염시켜?”
“자기한테 안 해줘서 화났구나?”
“와, 진짜 미쳤다. 와, 이거 제정신으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닌데.”
“널 오염시키겠어, 이영우.”
“아, 미쳤어. 형! 얘 좀 어떻게 해 봐요!”
인규는 그저 웃으면서 그 상황을 다 촬영할 뿐이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 무책임한 말을 하는 인규를 원망스럽게 본 영우가 일어나 저에게 다가오는 해성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진은 몸을 겨우 일으켜 그런 해성과 영우를 보고 계속 웃었다. 너무 웃어 배가 아프고, 눈물이 다 났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낸 하진이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정우 어디 갔어요?”
“정우? 리얼리티 개인 인터뷰 하러 미팅룸에. 몰랐어?”
“아……. 네.”
“정우 어디 갔는지 네가 모르는 건 또 처음 보네.”
“…그러게요.”
늘 정우의 소식은 제가 가장 먼저 알았었다. 정우가 항상 저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늘 같이 붙어 있어 서로의 모든 일을 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우의 일을 인규에게 전해 듣게 되다니 기분이 너무 이상하고,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정말 정우와 확 멀어진 것만 같아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저기 오네.”
가라앉은 기분에 가만히 있던 하진은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연습할 때 춤 동선이나 닿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 외에는 정말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에도 그랬었다.
“정우야, 하진이가 너 찾더라. 왜 말 안 했어? 차정우 일을 강하진이 모르는 게 말이 돼?”
인규의 말에 가볍게 웃은 정우가 하진을 바라보며 다가왔다. 그리고 하진의 옆으로 앉아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형이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해서요. 형이랑 연습 사이에 제가 들어갈 틈이 없던데요.”
갑자기 확 끼치는 정우의 향에 하진은 목에 한 번 걸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애써 웃음 지었다.
“내가… 그랬나.”
“내가 말 안 하고 가서 서운했어요?”
“…서운까지는 아니고…….”
“앞으로는 다 말할게요. 내가 우리 형한테 말 안 하면 누구한테 해. 그러니까 연습하다가도 나 한 번씩 봐줘요.”
하진은 인규의 카메라가 저와 정우를 담고 있는 것을 보며 다시 웃음 지었다. 그리고 전처럼 손을 들어 제 어깨에 기댄 정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알았어.”
“아, 졸려. 형이 만지면 졸리더라.”
“…….”
정우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싶었다. 좋아하는 감정이 없는 사람은 이게 되는 걸까. 저는 아직 정우를 사랑해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정우를 보는 게 힘든 걸까. 하진은 폐허가 된 마음 위로 또 한 번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