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65화 (65/122)

#65

하진은 10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 아직 잠이 묻은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진은 그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내리감으며 작게 미소지었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이 들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깼으면 얼른 옷 입어요.”

갑자기 들려오는 정우의 목소리에 하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확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너무 빠르게 몸을 움직인 건지 허리와 다리 사이가 아팠다.

“…정우야. 잘 잤어?”

“네. 밖에서 인규 형이 브런치 만들고 있어요. 다 되면 문 열고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옷부터 입어요.”

“아… 그럴게.”

하진은 뻐근한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정우와 새벽 내내 섹스했던 게 생생하게 떠올랐다. 확 밀려들던 잠도, 퓨즈가 확 나가는 것처럼 잠에 빠지던 그 순간도 너무나도 또렷했다.

“네 덕분에… 나 정말 잘 잤어. 얼마 만에 이렇게 정신이 맑은 건지 모르겠어. 한동안 잠을 못 자니까 자꾸 멍하고… 생각도 잘 안 나고, 컨디션도 안 좋고 그랬거든.”

서랍에서 바지와 티셔츠를 꺼내 입은 하진이 침대에 걸터앉은 정우를 보며 다가갔다. 휴대폰을 보고 있던 정우가 그런 하진을 무심하게 올려 보았다.

“곧 상담할 텐데 그때 말해 봐요. 잠 못 잔다고. 그 정도면 치료받아야 하지 않나.”

“…응. 그러려고. 나도 좀 무서워서.”

“잘 자라고 매일 박아주는 것도 웃기잖아요. 스케줄이 많으니 그러기도 힘들고.”

“어제는 내가 너무… 정말 제정신이 아니라 그랬어. 기억이 나기는 하는데 중간중간 끊기는 거 보면 진짜 미쳤었나 봐. 놀랐지.”

다시 휴대폰 화면을 한 번 본 정우가 침대에서 일어나 하진과 눈을 맞췄다.

“형한테 하루 이틀 놀라는 것도 아닌데요, 뭐.”

온기가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방을 나서는 정우를 본 하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잔뜩 흐트러진 제 침대를 내려 보았다.

“…미쳤지,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닌데 중간중간 흐릿한 부분이 분명 있었다. 기억이 나는 곳도 이렇게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창피한데, 필름이 끊긴 것처럼 없는 그 부분은 도대체 얼마나 더 심한 걸까. 하진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머릿속을 가득 뒤덮고 있던 안개가 걷힌 기분이라 좋았다.

“하진아! 어! 일어났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하진은 얼른 뒤돌아 문 사이로 보이는 해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빨리 나와. 인규 형이 팬케이크 만들었는데 진짜 예술.”

“아, 맛있겠다. 맛있는 냄새 나요.”

“한입 먹어봤는데 진짜 장난 아니야. 가자.”

그대로 해성에게 잡힌 하진이 방을 나섰다. 식탁에는 이미 정우와 영우가 앉아 있었다. 망고를 먹던 영우가 하진을 보며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하진아, 냄새 죽이지. 인규 형 큰일 났어. 지금 빨리 브런치 가게 차려야 될 것 같아.”

“진짜 맛있는 냄새 나요. 갑자기 막 배고프다.”

“주문받는 중이야. 하진이 몇 장?”

“어… 저 두 장이요.”

“형! 하진이는 두 장이요. 전 네 장!”

손가락을 네 개 펴는 영우를 본 해성이 혀를 끌끌 차며 옆으로 앉았다.

“한 조각이라도 남기면 벌금 백만 원.”

“안 남기면 네가 나한테 백만 원. 배 찢어져 죽어도 어떻게든 다 먹어야지.”

“인성 보소.”

장난스럽게 티격태격대는 해성과 영우를 보고 웃은 인규가 노릇노릇 잘 익은 팬케이크를 하진의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자, 하진이 한 장.”

“잘 먹을게요, 형.”

잠을 잘 자서 그런 걸까. 시럽 향도 달콤하니 좋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팬케이크의 향도 너무 좋아서 입맛이 돌았다. 하진은 얼른 앞에 놓인 시럽을 한 번 동그랗게 둘러 뿌린 뒤, 나이프로 팬케이크를 잘라 호 불어 입에 넣었다.

“어때?”

“진짜 맛있어요. 넣기만 했는데 진짜 녹아요, 막. 형 진짜 브런치 가게 해야겠다.”

“그래? 그럼 나중에 하지 뭐. 서른다섯? 마흔쯤 됐을 때 차릴까. 너희랑 같이하면 좋겠다.”

인규의 말에 해성이 손을 번쩍 들며 답했다.

“전 청소할게요!”

“아, 미친 늦었어. 전 형 차 매일 세차할게요!”

“세차장이라는 전문 공간이 있는데 네가 뭔 세차를 해. 우리 인규 형님의 소중한 차를 어?”

“청소도 로봇 청소기라는 전문가 있거든?”

다소 유치한 시비를 걸며 장난치는 두 사람을 본 하진이 웃으며 팬케이크 조각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그리고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

“많이 먹어요.”

식탁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정우가 보였다. 하진의 입술에 머물고 있던 웃음이 느릿하게 사라졌다. 언제인가부터 정우를 보면 웃을 수가 없었다.

“묻었다. 시럽.”

“…그래?”

하진의 손보다 정우의 손이 더 빨랐다. 정우는 하진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입술 위에 살짝 묻은 매끄럽게 반짝이는 시럽을 손끝으로 살짝 문질러 닦아주었다.

“…….”

“닦아요.”

해성과 영우가 장난치는 소리가 뒤에서 여전히 크게 들려왔다. 그래서 정우의 이 낮고 입 모양에 가까운 작은 소리는 전부 묻혀버렸다. 하진은 제 입술 위를 여전히 누르고 있는 정우의 손끝을 향해 살짝 혀를 내밀었다. 긴장감과 야릇한 기분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

“…….”

뒤에서는 다른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정우뿐이었다. 하진은 살짝 내민 혀끝으로 제 입술을 누른 정우의 손가락을 할짝댔다. 제 몸을 만져주는 것도 아니고, 직접적인 자극이 오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다리가 오므라들고, 아랫배가 확 당겼다.

“둘이 눈싸움해?”

영우의 목소리에 놀란 하진이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려 영우를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손을 내린 정우가 웃으며 다가오는 영우를 향해 빈 접시를 들어 올렸다.

“잘 먹을게요, 형.”

“많이 먹어. 반죽 엄청 많이 해놨으니까. 해성이랑 영우도 이제 줄게. 너무 느려서 프라이팬 두 개 더 꺼냈어.”

하진은 시럽에 폭 절여진 팬케이크를 포크로 건드렸다. 뾰족한 포크 끝이 폭신한 위를 찌르는 순간 숨어 있던 시럽이 투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

정우의 손에 묻어 있던 시럽의 단맛이 아직 혀끝에 남아 있었다. 정우의 체온과 뒤섞인 달콤한 맛 하나로 심장이 미친 듯 뛰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하진은 잔뜩 뜨거워진 입술을 꾹 문 채 다시 조각난 팬케이크를 포크로 꾹 찔렀다.

“먹어둬요. 또 오후에 스케줄 가면 저녁 언제 먹을지도 모르는데.”

“…아, 응. 그럴게.”

낮게 흐르는 정우의 목소리에 하진은 얼른 들고 있던 팬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시럽이 스며들어 씹을 때마다 달콤함이 입안으로 퍼졌다.

“하진아. 왜 그렇게 못 먹어. 컨디션 안 좋아?”

영우의 시선이 먼저 닿고, 그다음은 해성이었다. 하진은 지난밤 정우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영우 형이 형 걱정해요. 그 형이 눈치 빠르잖아요.」

정우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분명 영우가 저에 대한 걱정을 소리 냈을 것이었다. 하진은 더는 영우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고, 또 더 깊은 것을 들키고 싶지도 않아서 입술을 끌어올려 환히 웃었다.

“너무 맛있어서 아껴 먹는 거예요.”

“하진아, 여기 네 거 거의 다 됐어. 걱정 말고 팍팍 먹어.”

“네, 형.”

다행히 인규의 목소리가 들어오며 상황이 정리되었다. 하진은 얼른 남은 팬케이크를 크게 조각내어 입에 넣었다. 입안을 달콤함이 가득 채우고, 향긋한 향이 감각을 뒤덮은 그 순간에도 혀끝에 남은 가장 짙은 단맛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상담이 있는 날은 반나절 정도 꼭 스케줄을 비웠다. 바쁠수록 돌아가야 길게 갈 수 있다는 회사의 생각 덕분이었다. 하진은 제 차례를 기다리며 연습실에 앉아 리패키지에 실릴 곡들을 연습했다.

“하진 고, 하진 고!”

해성이 연습실 안으로 들어오며 하진의 이름을 불렀다. 하진은 머뭇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실을 나섰다. 오늘 정말 할 말이 많았다. 상의하고 싶은 것도 많고, 털어놓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상담실로 올랐다.

“어서 오세요. 또 한 달이 지났네요.”

“안녕하세요.”

상담실 안으로 노크하고 들어간 하진이 조용히 의자를 당겨 앉았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제 마음을 알고 있는 선생님과 마주하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정말 바쁘게 지내셨죠? 저도 티비 보면 아포제가 많이 나와서 좋더라구요. 그런데 저나 시청자들, 팬들은 아포제가 이렇게 화면에 많이 나오고, 활동을 열심히 해서 참 좋은데, 아포제 강하진의 마음은 어때요? 활동이 많아서 좋기만 한가요?”

“…힘들기는 한데 좋아요. 연습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돌아온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 관심이 또 힘이 돼서 더 열심히 하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하진에게는 바빠서 좋은, 아니, 바빠야 좋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바빠야 하니까요.”

“그 일은 하진 씨를 괴롭히나요?”

“…그 일이 아니라 제가 저를 괴롭혀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어떤 일도 제 의지로 못 한 일은 없었거든요. 성적도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면 올릴 수 있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되는 거니까. 체력이 약해졌으니까 체력을 좀 기르자 생각하면 그것도 할 수 있었어요. 매일 운동을 조금이라도 하면 됐거든요.”

“그랬군요.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른가요?”

“…의지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하라는 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만 포기하면 되는 건데… 자꾸 다른 걸 포기하게 돼요.”

자존심, 나의 가치,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지키고 싶은 가장 기본적인 감정들.

“…그 애를 안 좋아하면 되는 건데, 그럴 방법은 모르겠고… 좋아하는 걸 멈추지 못하는 저 자신만… 포기하게 돼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정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눈물부터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담담한 목소리가 흘렀다. 눈물까지 포기해버린 걸까. 늘 마음에 찰랑대며 고여 있던 눈물 소리가 이제는 나지 않았다.

“하진 씨가 포기하고 달라진 게 있을까요?”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잠이 오지 않는 건가요?”

“…자고 싶은데, 분명 피곤한데 머릿속이 너무 시끄럽고, 내가 자는 사이에 그 애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까 봐 겁이 나고… 그런 거에 겁을 먹느라 잠을 못 자는 내가 한심하고… 계속 반복되고, 불안하고, 겁이 나고… 힘이 빠져요.”

“어떻게 해야 하진 씨가 잠들 수 있을까요?”

최대한 솔직하게 전부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솔직하게 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애와 섹스해야 잘 수 있어요. 그 체온이 전부 나에게 옮겨오고, 그 숨을 내가 전부 흡수하고, 내 힘을 전부 빼앗겨 그 황홀한 탈력감과 마주해야 잠들 수 있어요. 하진은 그 어떤 부분도 소리 낼 수 없었다.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잠을 못 자니까 예민해지고, 컨디션도 안 좋고, 활동하는 것도 더 힘이 들고… 제가 이상해져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미친 말들을 해대고… 수치도 모르고, 밑바닥으로 떨어져서…….”

“하진 씨, 이거 마셔요. 따뜻해서 좀 나아질 거예요.”

“…….”

하진은 창백해진 채 몸을 벌벌 떨었다. 따뜻한 차가 담긴 컵을 쥐는데도 손이 마구 떨리고, 손끝은 차가웠다. 따뜻하고 향이 좋은 차를 한 모금 넘긴 뒤에야 떨림을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다.

“수면유도제 처방해드릴게요. 무거운 건 아니고 가벼운 건데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잠들 수 있겠다 싶은 날에는 안 드셔도 되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날에만 드세요. 그렇게 한 달 뒤에 다시 얘기해요.”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하진 씨를 포기하지 말아요. 하진 씨가 똑바로 중심을 잡고 서 있어야 감정이 붙어 있을 수 있어요. 이리저리 흔들리면, 포기해서 무너져버리면 감정이 마구 뒤섞여버리죠.”

“…엉망이에요.”

“네. 엉망이 되는 거예요. 좋은 건지, 슬픈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다 섞여버렸으니까. 그래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사이에서 하진 씨가 다시 바로 서면 감정들은 제자리를 찾아 분리되어 돌아올 거예요.”

“…고맙습니다.”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따뜻한 미소를 바라보다가 상담실을 나섰다.

“…제자리.”

금세 마른 입술 사이로 낯선 말이 숨처럼 흘러나왔다. 제자리. 하진은 고개를 숙여 제 발밑을 바라보았다. 휘청이는 저에게서 떨어진 감정들이 제멋대로 섞여 알아볼 수 없는 탁한 색이 되어 있었다.

“…….”

너를 처음 사랑한 그때 내가 본 감정의 색은 조금 두렵기는 해도 정말 예뻤는데.

“…….”

언제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린 걸까. 하진은 한참이나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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