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68화 (68/122)

#68

“하진이 왜 이렇게 못 먹어. 쉽게 돌아오는 기회가 아냐.”

“저 진짜 잘 먹고 있어요. 정우가… 계속 챙겨줘서 먹기 바쁜데…. 형들도 많이 드세요.”

“우린 지금 술 마실 시간이 없어. 고기를 쉴 수가 없어서. 내일 실장님, 아니 사장님 호출받는 거 아냐? 회식을 금지한다고.”

해성의 말에 영우가 코를 막고 사장님 성대모사를 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평소보다 목소리가 높아진 인규가 크게 웃었고, 성대모사를 하던 영우도 참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하진은 웃는 형들을 보며 멍하니 그 웃음소리를 바라보았다. 느낌은 나지 않지만, 꼭 같이 즐겁게 웃고 있는 기분이라 좋았다.

한 잔만 더 마셔도 취할 것 같은 기분으로 하진은 계속 술잔을 기울였다. 멤버들과 있는 이 장소가 저에게 가장 편해야 하는데,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고, 움츠러들어야 한다는 게 싫었다. 분명 이렇게 다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았던 때가 있었다. 마냥 푸르고, 행복하기만 하던 날이 분명 있었다.

“…….”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진은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룸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에 붙은 화장실 마크를 보자마자 미친 듯 복도를 달려갔다.

또 텅 비어버렸다. 얼마 먹지도 못한 음식은 물론이고,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또 취하고 싶어 마신 술까지 전부 다 쏟아버렸다. 하진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끝으로 레버를 눌러 물을 내렸다.

“안 그래도 왔다는 말 듣고 어떻게 불러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의지와는 상관없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른 하진이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문가에 기대어 선 유세주가 늘 짓는 그 미소를 묻힌 채 저를 보고 있었다.

“어디 아파? 몸살?”

“…아니요.”

손을 내미는 유세주를 무시한 채 혼자 일어난 하진이 문을 막고 선 유세주의 앞에 섰다. 비켜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도 꺼내지 못할 만큼 힘이 없었다.

“이 새끼가 왜 안 비키고 지랄이야. 이런 얼굴이네.”

“…….”

“아니라고도 안 하네. 세졌어, 그 사이에.”

“…비켜 주세요.”

“야, 하진아.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나 지금 너 여기 처박고 맘대로 할 수 있어. 알잖아. 나 그런 취향인 거. 토한 애한테 설마 그러겠나 싶지. 상관없어. 난 더 더럽거든.”

평소라면 무서웠을 것이었다. 이 사람한테 정말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몸이 막 떨리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두렵지도 않고, 두려워할 힘도 없었다. 하진은 무거운 눈을 깊게 감았다가 들어 올려 여전히 제 앞을 막고 선 유세주를 바라보았다.

“…저 정말 선배님이랑 이럴 힘 없어요. 여기 처박고 하신다고 해도 거부 못 할 거예요.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으니까.”

멍하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입술만 달싹이는 하진을 본 유세주가 재밌다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졸려 보이네.”

“…….”

“너 잠 못 자는구나.”

유세주의 말에 조금 놀란 하진이 다시 눈을 마주했다. 그 놀란 반응을 본 유세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고 친 모양이네. 작은 사고는 아닌 것 같은데. 뭐… 아포제 아직 잘나가는 거 보면 나처럼 겉으로 빵 터진 일은 아닌 것 같고.”

문에서 비킨 유세주가 세면대로 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비틀대며 걸음을 옮겨 세면대를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는데, 먹기만 하면 게워내는 탓에 정신도 건강도 모두 한계에 달해 있었다.

“나도 그랬거든. 기사 터뜨릴 거라고 기레기들이 회사에 전화해서 딜을 하는데 그때부터 몇 달 동안 잠을 못 잤어. 자려고 누우면 댓글을 누가 내 귀에 대고 읽는 소리가 나는 거야. 눈만 감아도 그 사고를 치고 어떻게 잘 수가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잘 수가 없더라고.”

듣고 싶지 않았다. 저는 유세주와 다르니까. 하진은 그 덤덤한 목소리를 피해 차가운 물을 세게 틀었다. 얼굴 위에 몇 번이나 차가운 물을 끼얹고 또 끼얹었다.

“멤버들은 괜찮다고, 다 조작된 거 아니냐고 이럴수록 힘내자고 엄청 잘해줬어. 너도 알지. 나 우리 팀 에이스였잖아. 전체 팬의 반은 내 팬이었어.”

“…듣고 싶지 않아요. 선배님이랑 전 달라요.”

“똑같은 것 같은데. 회식 중에 달려 나와서 토하고, 비틀대고, 잠 못 자는 그 얼굴까지. 상담 선생한테 말이나 해 보지. 수면유도제라도 줄 텐데.”

“…….”

보지도 않았으면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줄줄 순서를 읊어대는 유세주를 무시한 채 벽에 붙은 가글액을 종이컵에 담은 하진이 아플 만큼 입안을 계속 헹구었다.

“안 듣지, 그거 가지고 이제.”

“…….”

“처음에는 와, 신세계네. 진작 먹을걸. 나도 이제 잘 수 있구나 싶은데, 며칠 못 가잖아. 너도 알지, 하진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좋은 거 줄까? 먹으면 진짜 바로 잘 수 있어.”

“…필요 없어요.”

“뭐가 필요 없어. 계속 그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무대에서 추락이라도 할 거야? 아니면 잠에 취해서 예능 나가 헛소리하고 평생 기사에 그 댓글 달리는 거 보고 살래?”

“…….”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괜찮냐고 묻고 멤버들은 늘 푹 쉬라고, 잘 먹고 잘 자면 컨디션도 좋아질 거라고 말했었다. 착하고, 아프지 않은 멤버들은 저의 깊은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세주는 너무나도 정확했다. 이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게 죽을 만큼 싫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기다려. 선물 줄 테니까.”

“…….”

“금방 올 거야.”

그대로 화장실을 나서는 유세주를 거울 안으로 본 하진이 눈을 감았다. 왜 저런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 걸까. 저도 제정신이 아니라서? 결국, 설명할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유세주는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며 아직 세면대에 선 하진을 보고 웃었다.

“너 진짜 힘들구나, 요즘.”

“…….”

“이렇게 된 거 무슨 일인지 말이라도 해 봐. 궁금한데. 왜, 너도 나처럼 남자 좋아해?”

“멋대로… 넘겨짚지 마세요.”

그대로 화장실을 나가려는 하진의 팔을 잡은 유세주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진은 얼른 그 손을 뿌리쳤다.

“알았어, 알았어. 선물이나 받아 가. 자.”

하진은 유세주가 내미는 손가락 하나 정도 길이의 작은 약통을 바라보았다. 유세주는 그런 하진의 눈앞에서 약통을 흔들었다. 불투명한 하얀 약통 속에서 자잘하고 딱딱한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게… 뭔데요?”

“수면유도제 다음, 또 다음, 또 다음에 먹는 거.”

“…….”

“한 알 이상 먹지 마. 매일 먹지도 말고. 나처럼 중독되면 이거 없이 못 살게 돼.”

“…됐어요. 저 이런 거 안 먹어요.”

“마약인 줄 알아? 멀쩡한 약이야. 처방받기 힘들어서 그렇지. 난 잘 받을 수 있어서 특별히 주는 거야. 너 정도 되면 이거 절대 안 줘.”

억지로 하진의 손에 약통을 쥐게 한 유세주가 씩 웃었다. 그리고 열린 화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맞다. 나 이거 가지고 나오는데 너희 팀 그 싸가지 없는 새끼가 너 찾더라.”

“…….”

“그 새끼는 널 왜 그렇게 과잉보호해?”

“…그냥…… 같은 팀이니까요.”

“팀 좋지. 서로가 서로한테 플러스가 되면 참 좋지. 뭐 됐고, 그 약 절대 많이 먹지 마. 그러다 죽어. 영원히 잠드는 수가 있어.”

“…….”

“다음에는 좀 쌩쌩하게 보자. 난 같이 달려드는 애가 좋더라.”

하진의 어깨를 한 번 쥐었다가 놓은 유세주가 화장실을 나섰다. 하진은 손에 들린 작은 약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런 위험한 건 왜 준 걸까. 많이 먹으면 죽을 수도 있고, 중독까지 되는 그런 약을 도대체 왜.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하진은 갑자기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정우를 보며 저도 모르게 주머니 안으로 약통을 집어넣었다.

“유세주 여기서 나오던데.”

“어? 아… 응. 여기서 마주쳤어.”

“그 미친 새끼랑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정우를 본 하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무슨 짓이라니?”

“먹다 말았다고 아쉬워하던데요.”

“…아무 일도 없었어.”

“저 새끼랑 같이 있지 말아요. 아직도 소문 안 좋게 나는 거 몰라서 그래요? 마주쳐도 먼저 나오라고. 같이 있지 말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주머니 안이 무거웠다. 미처 버리지 못한 약의 무게일까. 저를 향해 쏟아진 정우의 목소리가 몸에 흡수되어 담긴 무게일까.

“정우 너는… 나나 유세주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

“…다를 게 없잖아.”

“그렇게 똑같은 사람 되고 싶어?”

“……네 눈엔 이미 된 거 아냐? 유세주도 싫어하고, 넌 나도 싫어하잖아. 더럽다고 생각하잖아.”

머릿속으로 잠시 잊고 있던 정우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죽어요, 그럼.」

죽어요. 그 소리를 낼 때 정우의 눈빛과 입 모양을 기억하고 있었다. 말만 하지 말고 그냥 죽어버리라는 귀찮고 화가 난 눈빛, 짜증이 묻은 목소리. 또렷한 모양을 만들던 입술.

“…….”

몸이 떨릴 때마다 주머니 속 약들도 따라 떨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하진은 주머니 위를 손바닥으로 꽉 쥐며 감쌌다.

“…선배랑 엮여서 팀에 피해 안 가게 할게.”

“지금 팀 얘기 하는 거 아니잖아요.”

하진은 정우의 어깨에 두었던 시선을 올렸다. 매끄럽고 짙은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또 울고 싶어졌다.

“…정우 너는 늘 팀 얘기만 하잖아.”

“…….”

“걱정하는 일… 없게 할게. 가자. 형들이 찾겠다.”

취해 흔들리던 머릿속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개어버렸다. 하진은 또렷한 눈동자로 정우를 잠시 눈에 담다가 먼저 화장실을 나섰다. 닫힌 문들 속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가득했다. 하진은 그 출처 모를 웃음 사이에 갇힌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들 웃고 있는데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죽어요.」

저에게만 닿아오는 너무나도 선명한 그 소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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