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90화 (90/122)

#90

눈앞에서 닫힌 문을 본 정우는 들어가려고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그만두었다. 대화한다고 해도 또다시 같은 말만 반복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냉정하게 굴고, 단지 섹스만 좋아서 봐주고 있는 사람처럼 굴어도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그 감정이 끝났다는데,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데 당연히 좋은 일이 아닌가.

애초에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여러 번 대화를 시도해봤자 어차피 같은 말로 서로 화만 낼 뿐이니 더 대화를 시도할 필요도 없었다. 정우는 대충 생각을 정리하며 소파에 아무렇게나 앉아 몸을 뒤로 기대었다.

“…….”

그런데 이 기분은 도대체 뭘까. 왜 하나도 기쁘지 않고, 후련하지도 않은 걸까. 누가 보면 제가 매달리던 사람이 저를 떠나가는 줄 알 것이었다. 지금 제가 그렇게 굴고 있었다. 정우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충격받을 일도 아니고,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 드디어. 그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감정도 끝이 나기는 나는구나, 역시 사랑이라는 건 단단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가라앉은 눈동자와 목소리도, 제 손을 잡아 던지던 것도 전부 다 놀랄 일이었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 저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표정. 색이 사라진 것처럼 창백해진 얼굴 위로 떠오른 얼어붙은 감정들.

「난 너랑 달라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섹스해 주고 그런 거 못 할 것 같아.」

섹스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솔직히 그 이야기를 홧김에 꺼낸 것은 미친 짓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밑바닥을 보이며 하진이 질리기를 기다렸는데, 왜 기쁘지 않은 걸까. 이번에 내보인 저의 밑바닥을 보고 드디어 질려 관둔다는데 도대체 왜, 왜 후련하지가 않은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하진이 원하는 사랑까지 한 건 아니지만, 정말 하진을 좋아했다. 제가 지금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하진과의 모든 관계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랑이 끝나면, 좋은 관계로 지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섹스를 앞세워 말한 것은 저의 잘못이었다. 실수라고 할 수도 없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이상하리만치 덤덤한 하진을 흔들고 싶었다. 차라리 평소처럼 울면 달래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진은 끝내 울지 않았다.

「앞으로 괴롭히는 일 없을 거야.」

흔들수록 침착하게 가라앉았고

「이제 제정신이거든.」

또렷한 눈빛을 보였다. 늘 흐릿하게 머물며 흔드는 대로 마구 흔들리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말을 내던진 그다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질문은 던져졌는데, 어느 쪽으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우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깊게 감았다.

***

양손 가득 물건이 가득 찬 장바구니를 들고 온 인규와 해성은 곧바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적막하던 집 안으로 여러 소리가 섞여들었다. 가스레인지 불꽃이 올라오는 소리, 물이 떨어지는 소리, 봉지가 부스럭대는 소리,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인규와 해성이 사 온 것을 냉장고에 정리한 정우가 박수를 치며 다가오는 해성을 바라보았다.

“얼른 박수 쳐, 정우야.”

“뭐 좋은 일 있어요?”

해성을 따라 느릿하게 박수를 친 정우가 분주한 인규를 한 번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 월남쌈이야. 맛있겠지. 우리 송인규 월남쌈 전문가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어렵게 모셨다.”

“축하할 일 맞네요.”

전혀 그럴 기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의 감정을 멤버들에게 다 알리고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우는 해성의 말에 장단을 맞추며 한참이나 부엌에 머물렀다.

“하진이는 자?”

“그런 것 같아요.”

“깨워서 데리고 나와. 이영우도 엘리베이터 앞이래. 같이 먹어야지.”

“네.”

등을 두드리는 해성에게서 멀어진 정우가 닫힌 방문 앞으로 가 섰다. 늘 하진에 대한 일은 저의 몫이었다. 연습생 때부터 유별나게 친했고, 같은 팀으로 데뷔하기를 누구보다도 바랐고, 내가 잘되는 것보다 상대가 잘되는 것을 더 좋아하던 그 끈끈함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그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심호흡한 정우가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에는 고요함만 넘쳐 흘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하진에게 다가간 정우가 살짝 그 이불 끄트머리를 잡아 내렸다. 하진의 귓속에 든 이어플러그가 보였다. 더 이상 저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이어플러그까지 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정우는 하진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몸이 흔들리자 하진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조금 더 세게 흔들자 천천히 얇은 눈꺼풀이 올라갔다. 몇 번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하진이 고개를 조금 돌려 정우를 바라보았다.

“…….”

“…….”

적당히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마주친 매끄러운 하진의 눈동자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런 정우를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몸을 일으킨 하진이 이어플러그를 빼냈다.

“왜?”

“…저녁 먹어요.”

“알았어.”

“형.”

“불편한 얘기 하지 말자. 아까 다 했잖아.”

불편한 얘기라고 딱 선을 그은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만지고, 정우의 옆을 지나 방을 나갔다. 정우는 멍하니 제 앞을 지나쳐 나간 하진을 보다가 얼른 그 뒤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막 들어온 영우를 보며 웃고 있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아, 우리 밥 먹고 케이크 먹자. 카페 갔는데 케이크 완전 맛집이래서 내가 거기 있는 거 하나씩 다 사 왔어.”

“봐도 돼요?”

“그럼.”

케이크 박스 안을 들여다보는 하진을 귀엽게 본 영우가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맛있겠다.”

“그치. 아까 먹고 싶었는데 친구 놈이 고민 상담하러 온 거라 케이크 시키기도 그래서 참았어. 이따 케이크 폭식해야지. 근데 월남쌈 비주얼 실화야? 와, 새우랑 고기랑 베이컨도 있어.”

감탄하는 영우를 보며 웃은 인규가 얼른 와 앉으라며 손짓했다.

“저 옷 빨리 갈아입고 손 씻고 올게요.”

방으로 뛰어가는 영우를 본 하진이 빈 욕실로 들어갔다. 정우는 열린 문 사이로 하진이 손을 씻는 것을 바라보다가 인규의 부름에 식탁으로 갔다. 조금 뒤에 나와 정우의 옆에 앉는 하진에게서 핸드워시의 레몬 향이 났다.

“저 깨우지 그러셨어요. 이어플러그 하고 자느라 소리를 못 들었어요. 죄송해요, 형.”

“아니야. 오늘 내가 저녁 해주고 싶어서 한 건데. 월남쌈은 뭐 거의 생으로 썰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 어렵지도 않았어. 속은 괜찮아?”

“네. 멀쩡해요.”

인규를 보고도 평소처럼 웃는 하진을 본 정우가 앞에 놓인 탄산수 한 모금을 마셨다.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영우야, 얼른 와서 앉아. 이제 먹자.”

영우가 와서 앉는 것과 동시에 식사가 시작되었다. 하진은 라이스 페이퍼를 들어 뜨거운 물에 적셔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넣고 돌돌 말았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내용물이 빠지는 참사가 일어나는데 하진은 파는 것처럼 예쁜 모양을 만들었다.

“진짜 맛있어요, 형.”

“다 소스 맛이지 뭐. 난 진짜 한 것도 없어. 새우랑 닭가슴살에 간 좀 한 게 다야.”

“그래도 형이 한 거잖아요.”

하진은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다. 시리얼을 조금 먹기는 했지만,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텅 비어버린 느낌은 분명 허기였다. 하진은 이것저것 다양하게 넣어 아주 맛있게 식사했다.

“정우는 왜 그렇게 못 먹어? 뭐 다른 거 해줄까? 볶음밥도 있는데.”

“아니에요. 잘 먹고 있어요. 저 이런 거 잘 못 말아서 좀 느려서 그래요.”

그런 정우의 앞으로 예쁘게 말린 월남쌈이 하나 놓였다. 정우는 시선이 닿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진이 저를 보며 웃는 게 보였다. 정우는 그 얼굴을 보고도 전혀 웃지 못했다.

“내가 해줄게.”

“…괜찮아요. 형 먹어요.”

“아니야. 우리 정우 내가 해줘야지.”

방에서 본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정우는 저를 보고 웃는 하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진은 정우를 보다가 라이스 페이퍼를 들어 다시 물에 넣어 부드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역시 정우 챙기는 건 하진이밖에 없다. 우리는 말로나 많이 먹으라 그러지 저렇게 도움 되게 챙기는 건 역시 강하진이지. 우리가 절대 못 이겨.”

감탄하는 해성을 보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브이를 그린 하진이 다시 정우를 보며 먹으라고 웃음 지었다. 정우는 그런 하진을 보며 앞에 놓인 것을 집어 들었다. 정말 괜찮아진 건가 싶기도 한데 여전히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디저트는 영우가 사 온 케이크와 진한 커피였다. 열 조각이나 되는 케이크를 예쁘게 세팅해놓고 사진 찍은 해성이 SNS에 ‘아포제 케이크 파티!’라는 말과 함께 글을 올렸다.

“와, 1분 만에 지금 어디 케이크인지 정보 올라왔어. 대단하다, 이걸 사진만 보고도 아는구나.”

“여기 케이크 맛집이래.”

“가격이랑 종류랑 위치 다 떴어, 지금.”

“팬들 정보력 장난 아니야. 진짜 빠르다니까.”

하진은 앞에 놓인 케이크들을 바라보다가 진해 보이는 초콜릿 케이크를 포크로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 동그래진 눈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야, 이거 먹어 봐. 진짜 초코 진하고 맛있어. 커피랑 딱이야.”

“…….”

“빨리. 진짜 맛있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하진을 보던 정우가 케이크를 조금 떠 입에 넣었다. 하진의 말대로 정말 진하고 달았다.

“어때?”

“맛있어요.”

“역시 우리 정우는 나랑 다 비슷하다니까.”

웃으며 커피를 마시는 하진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정우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쪽이 꿈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만두자고 하던 하진이 꿈일까, 지금 저를 보고 웃고 있는 하진이 꿈일까. 막연하지만, 그만두자던 하진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크를 먹고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인규가 SNS에 사진을 올리는 동안 하진은 다 먹은 것들을 정리했다. 음식 준비를 돕지 못했으니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팔을 걷고 설거지를 하려는 하진의 옆으로 정우가 와 섰다.

“제가 할게요.”

“아니야. 내가 할게.”

“형 가서 쉬어요. 내가 할게요.”

“오늘 계속 쉬었는데 뭘.”

정우는 평소처럼 하진의 뒤로 가 팔을 양쪽에서 잡았다. 그렇게 옆으로 가게 하고, 제가 하진의 자리에 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손이 닿는 순간 하진의 몸이 확 그 손을 뿌리치며 돌아갔다. 놀라서도 실수도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거부였다.

“내가 한다니까.”

“…….”

가라앉은 시선으로 정우를 본 하진이 다시 돌아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정우는 잠시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진을 바라보았다.

“정우야, 이것 좀 봐. 월남쌈 사진이랑 단체 사진 올렸더니, 팬들이 월남쌈 팬 미팅하자고 난리야. 미치겠다. 최초 아니야? 아포제의 특급 셰프 송 셰프님과 함께하는 월남쌈 팬 미팅!”

웃는 멤버들을 봐도 웃을 수가 없었다. 정우는 무거운 입꼬리를 겨우 끌어올렸다. 등 뒤에서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꾸만 고개가 돌아갔다.

영우와 인규, 그리고 해성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하진의 설거지도 끝났다. 하진은 깔끔하게 모든 정리를 다 한 뒤에 방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정우가 하진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따라 들어갔다.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예요?”

앞뒤 다 자르고 묻는 정우의 말을 알아들은 하진이 정우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정우의 등 뒤에 살짝 열린 문을 눌러 닫았다. 잠금장치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게임 하며 웃는 소리가 조금 더 작아졌다.

“우리 늘 그랬잖아.”

“…….”

“지내던 대로 지내면 돼. 형들 앞에서는 늘 똑같았잖아.”

“이러는데도 복수가 아니라고?”

“복수는 아니지만, 복수하려면 할 수 있을 정도로 힘든 일이기는 했어.”

“…….”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다정하고, 둘만 남으면 내 눈도 보지 않는 너랑 그 상황에 적응하는 거. 그런데 우리는 다른 상황이잖아.”

당해보라고 놀리는 것 같지도 않고, 비웃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히 말하는 하진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난 널 사랑했으니까 그 상황이 힘들었지만, 넌 아니었던 거잖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넌 어려운 일 아니잖아.”

“…….”

“그러니까 정우야. 지금은 좀 낯설겠지만, 견뎌. 우리 늘 이런 사이였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대로 돌아선 하진이 서랍에서 옷을 꺼내 들었다.

“쉬어, 그럼.”

하진은 그렇게 방을 나갔다. 정우는 눈앞에서 닫히는 문을 또다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국, 그 어느 쪽도 꿈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분명한 확인에 실소가 터졌다. 그리고 그 약한 실소에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폐허의 전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