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너 우는 거야?”
“안 울어요.”
“고개 들어, 그럼.”
“…….”
안 운다면서 고개도 들지 않는 정우를 보던 하진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지금까지 알던 정우가 아닌 것만 같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처음에는 투정을 부리고 화를 내다가 결국 울어버리는 그런 어린애를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어린애들이라고 다 그러는 것도 아니지만.
“네가 왜 우는데. 울어도 내가 울어야지. 그동안 나 힘들었을 거라는 걸 너도 알았다는 거잖아. 그럼 그걸 이제야 네가 알아줬구나 하고 내가 울어야지, 왜 네가 울어.”
“…미안해서요.”
“서운하고 억울하고 그래서 그런 것 같은데.”
“…아니에요. 형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에요.”
“곧 음식 나올 텐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네 얼굴 알 사람은 다 알아. 길에서 싸웠다고 말 나올 텐데 이제 식당에서 한 명이 울고 있었다는 말까지 나오게 할래?”
하진의 말에 옆에 놓인 티슈를 한 장 집어 든 정우가 눈가를 닦고 고개를 들었다. 숨을 깊게 내쉬며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자 조금 붉어진 눈가가 보였다. 하진은 그 얼굴을 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할 말은 다 한 거야?”
“…미안해요. 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형은 그냥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화풀이도 많이 했고… 일부러 형 상처 받으라고 더 심하게 말한 적도 많았어요.”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정우의 고해성사를 듣고 싶은 생각도 또 사과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굳이 한다면 그것은 정우의 자유이니 말릴 수는 없지만, 솔직히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것도 불편했다.
“다음에는 그러지 마.”
“…다음?”
“나중에 너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는 그러지 말라구.”
“…….”
“물론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안 그러겠지만.”
“…….”
“너한테 뭐라고 하려고, 비웃으려고 하는 말 아니야. 그때 일 하나하나 들추면서 그래, 너 그랬었지. 왜 그랬어? 나 이것도 마음 아팠어, 이러고 싶은 마음 없어.”
테이블 밑에 놓인 정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초조한 듯 다리를 움켜쥔 정우가 어떻게든 하진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 입을 열려는 그때 하진의 말이 먼저 나왔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았던 게… 죄는 아니잖아. 네 마음이 그랬던 건데 탓할 수는 없지.”
“…몰랐어요. 사랑한다는 게 뭔지….”
정우의 말이 흐름과 동시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하진은 자신의 기분을 짐작하려 애썼다. 정우가 하는 말은 지금까지 제가 그토록 듣고 싶던 말들과 결을 같이 하고 있었다. 제발 나를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고 내내 바라고 또 바랐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세팅해드리겠습니다.”
침묵을 가르고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직원이 들어와 둘의 앞에 보기 좋게 음식들을 놓아 주었다. 초밥과 장국, 튀김과 회, 소바 같은 것들이 푸짐하게 놓였다. 하진은 잠자코 앞에 놓이는 음식들만 바라보았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인사하고 나가는 직원에게 묵례한 하진이 젓가락을 들었다. 그냥 먹으면서 대충 시간을 보내다가 숙소에 들어가는 것에만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초밥을 하나 들어 회 끝에 간장을 살짝 찍은 하진이 입에 넣었다. 아주 부드럽고 맛있었다.
“안 먹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뭐가?”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게 없고, 잠도 안 오고,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의욕도 없어요.”
하진은 초밥을 하나 더 들어 입에 넣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다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고 싶은데 잠들 수가 없고, 주변의 걱정이 싫어 뭔가를 먹기는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차라리 자고 싶은데 잘 수가 없고….”
자지 못하고 마주한 해가 진 시간들은 하지 않아도 될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빨리 아침이 오면 좋겠는데 시간은 참 더디게 흘렀다.
“시간도 잘 안 가요. 자꾸 이상한 생각만 들고.”
정우는 왜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그날 내가 술을 조금만 덜 마셨더라면, 그래서 잠든 정우에게 키스하지 않았더라면, 들키지 않았더라면… 생각의 끝은 결국 자책이었다.
“그날 형한테 그 말만 안 했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형은 지금도 날 좋아할 텐데.”
날이 선 생각들은 더 상처가 날 곳이 없는 마음을 할퀴고, 사랑을 난도질했다. 해서는 안 될, 아주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발에 힘을 주고 설 수도 없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연약한 발밑은 너무도 쉽게 무너져 더 긴 어둠을 선사했다.
“…알아요. 지금도 난 형 괴롭히고 있다는 거. 이러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요.”
그래도 사랑받고 싶었다. 그 긴 어둠을 버티고 또 어둠이 올 것을 알면서도 하루를 끈질기게 버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더 길게 나를 봐 주지 않을까. 오늘은 웃어 줄 수도 있잖아. 오늘은 마법처럼 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 헛된 기대라는 이름을 앞으로 내세우며 또 그 기대에 기대었다.
“그래도 내가 한 번만 더 말하면, 진짜인 걸 형이 알아주면… 형 마음이 풀릴지도 모르니까, 내 얼굴 봐 줄지도 모르니까.”
저의 사랑은 이기적이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기어이 더 가까이 다가가 구걸하는.
“…형 말이 맞아요. 나 이기적이에요.”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관둘 수가 없어요.”
사랑하니까.
“…형을 사랑하니까.”
기가 막힌 복수였다. 하진은 기다란 젓가락을 든 채 실소를 터뜨렸다. 복수하기로 제대로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정말 기가 막힌 복수를 했다. 끝나고 나서야, 더는 난도질당할 수도 없이 너덜너덜한 마음이 먼지처럼 흩어진 후에야 듣는 사랑이라니.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었을 때 솔직히 몰랐어요. 나도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이랑 더 친해 보이면 질투 나는 그런 단순한 질투라고도 생각했어요. 아니면 어제까지만 해도 날 좋아한다더니 갑자기 다른 사람이랑 웃고 있는 걸 볼 때 드는 그런 신경 쓰임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맞을 거야.”
“아니… 아니에요.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그 정도 마음으로 이렇게, 이렇게까지 괴로울 수는 없어요.”
하진은 하얗게 질린 정우를 바라보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직 배도 고프고, 초밥도 참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게 됐다.
“나 봐.”
“…….”
고개를 들어 저를 보는 정우와 눈을 맞춘 하진이 아무 말도 없이 그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날 사랑한다고?”
“…….”
“대답해. 마음 풀려고 그냥 한번 대충 뱉은 말 아니면 말할 수 있잖아.”
“…그런 말 아니에요. 아니니까, 아니라서 말하기가 어려웠어요. 쉬운 말이었으면, 형 말대로 내가 형 한 번 흔들어서 마음 풀 생각이었으면 진작, 진작 말했을 거예요. 알잖아요. 나 형 입원한 병원에 가서도 형한테 연애해 주겠다고 말한 놈이에요.”
대충 어그러진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그냥 던진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울지는 않지만 내내 매끄럽게 젖은 눈동자도 그렇고, 평소와 다르게 한풀 꺾인 태도도 그랬다.
“알아. 너 연기 못하잖아. 네가 그런 거 잘했으면 나랑 연애해 줄 때도 더 잘했겠지. 내가 매분 매초 아, 이건 진짜가 아니지… 생각도 안 들 만큼.”
“…미안해요.”
“그래, 네 말은 이제 네가 날 사랑하는 걸 알게 됐다는 거고……. 그래서 그 뒤는?”
“…….”
정우의 이런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당당하고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던 반짝반짝 빛나던 얼굴이 아파 보였다. 상처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외롭게 보이기도 했다. 그대로 겪어보니 어떻냐고 쏘아대고 싶은데,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내가 너랑 연애해 주면 돼?”
“…….”
“바라는 게 있을 거 아냐. 그냥 나한테 말하고 싶었던 거야?”
“…형 마음 알 것 같아요.”
하진은 마지막으로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맛이 쓰게 느껴졌다.
“어떻게 연애해 주겠다는 말에도 그렇게 좋아할 수 있나 싶었는데.”
“…….”
“…하고 싶네. 그렇게라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내리깐 채 가만히, 그저 가만히 머물 뿐이었다. 하진은 그 무거운 공기 속에서 같이 침묵을 지키다가 정우를 불렀다.
“밥 먹어.”
“…….”
“얼른.”
하진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냥 가버릴까 했는데 따로 움직여서 좋을 것도 없고, 이런 상태의 애를 혼자 두고 갔다가 들어오지 않으면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아 가지 않기로 했다.
“나 보지 말고 먹어.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전부.”
“…네.”
젓가락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고 아주 느리게 움직이지만, 그래도 혼자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진은 그저 음식들에만 시선을 둔 채 최대한 맛있다는 생각만 하려고 애썼다.
「…형을 사랑하니까.」
사랑. 움직이던 하진의 젓가락이 잠시 멈추었다. 생각은 언제나 이렇게 갑자기 들어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말인데, 정말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말인데 왜 하필 지금인 걸까.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하지 않았을까.
“…….”
아니, 차라리 지금이 나을지도 몰랐다. 의심이 작아졌으니까. 정우의 모든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어도, 그래도 어쩐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저렇게 상황을 모면하려고 연기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저에게 정말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훨씬 더 다정했을 거고, 가짜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차정우라는 사람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면 탈인 애였지, 이렇게 서툰 목소리로 속에 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애가 아니었다.
도대체 네 진짜 모습이 뭐야? 하진은 제가 먹으라고 해서 마지못해 먹고 있는 게 보이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축 처진 어깨나 의욕이 없는 손의 움직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켜버리는 것과 흐릿한 시선이 보였다.
“…….”
사랑한다는 말에 기뻐하기에는 너무나 지쳐버렸다. 사랑 때문에 다친 마음이 너무 커서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하진에게는 흉기였다. 그런 지금, 닿아온 말은 너무나도 낯설어서 피하고 싶었다. 하진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결국, 남는 말도, 또 파악할 수 있는 것도 단 하나였다.
차정우가 저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