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22화 (122/122)

#122

세 번째 만남은 아주 늦은 밤 내부가 넓은 카페에서 만났다. 집에서 봐도 되지만, 그냥 이렇게 탁 트이고 사람들이 일상을 사는 바깥에서 만나고 싶다는 정우의 말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고, 또 안 좋은 말이라도 올라 괜히 열심히 사는 멤버들에게 피해를 주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만, 따뜻한 카페, 여기저기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따뜻한 커피와 맛있는 케이크 같은 것들이 그 모든 걱정을 녹여 주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는 원래대로 하진의 집에서 만났다. 부모님이 계신 날에는 따뜻한 전골을 끓여 같이 저녁을 먹고, 디저트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반대로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날에는 같이 영화를 보거나 새로 나온 좋은 음악들을 들었다. 하진의 기다란 속눈썹이 꼭 음악을 따라 흔들리는 것 같아 너무 예뻐 자꾸만 넋을 놓게 되었다. 그 분명한 시선에 하진이 고개를 돌릴 때면 입술이 맞물렸다. 얘가 원래 이렇게 키스를 좋아했었나 싶을 만큼 정우는 눈만 마주치면 키스해 왔다.

일곱 번째 만남은 조금 색다른 곳이었다. 하진은 파인 다이닝을 예약했다는 정우의 말에 간만에 보기에는 좋지만, 조금은 불편한 옷을 차려입고 정우를 만났다. 먹기가 아까울 만큼 멋지게 세팅되어 나오는 음식들을 먹으며 근사한 야경도 바라보았다. 정우는 음식을 먹고, 야경을 보며 감탄하는 하진의 얼굴을 보느라 솔직히 얼마나 맛있는지 또 야경이 얼마나 멋진지도 잘 알지 못했다.

여덟 번째, 아홉 번째. 그리고 마지막. 하진이 보고 싶어 나중에는 하루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스케줄이 있는 날은 어쩔 수 없었지만, 비는 날에는 무조건 하진을 찾아갔다. 어제 보고 또 봐도 좋고, 그냥 같이 앉아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어색함 속에 파묻혀 있어도 좋았다.

그저 그 마주하는 매끄러운 눈동자가 좋고, 감겼다가 뜨일 때마다 흔들리는 속눈썹이 좋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하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도 정우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 열 번째라는 것도 잊을 만큼 하진을 보면 웃음만 났다.

“사실 오늘 뭘 해야 좋을지 엄청 고민했어요.”

“왜?”

“열 번째잖아요.”

“아…….”

“마지막.”

“아, 오늘이구나. 안 세고 있어서 몰랐어.”

오늘의 만남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정우는 밤새 눈도 붙이지 못한 채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진의 마음이 더 저에게 다가올 수 있을까 말을 고르기도 하고, 멋진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에 고백의 말들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또 다른 파인 다이닝을 예약할까 생각도 하고, 선물을 살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고 하진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정우는 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뭘 해야 좋을지 진짜 고민했는데 그냥 평소처럼 몸만 왔어요.”

“…….”

“나한테 맡겨 보려구요. 다른 거 끼워서 더 좋게 보이는 거 말고 그냥 원래 나 하나로도 충분해지고 싶었어요.”

“그거 알아?”

“…….”

“처음에는 얘가 많이 달라지려고 노력하는구나 싶었고, 몇 번 만난 뒤에는 아, 얘가 달라졌구나 싶었어.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그런 생각이 안 들어.”

“…….”

“잘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의 너 같아. 가끔 다 잊고 그냥 너랑 원래 내내 이렇게 지내면서 데이트하는 기분이었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엉망으로 굴었던 저의 지난 일들을 잊고 데이트하는 기분이었다니. 하진은 천사가 아닐까. 정우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하진을 바라보았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니까 기분이 이상해.”

“…시원섭섭해요?”

“시원하지는 않고, 섭섭하기는 하네.”

“…그거면 됐어요. 난 형이 이제야 좀 편히 살겠다 싶을까 봐 무서웠거든요.”

“내가 그동안 그렇게 보였어?”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그냥 하진을 이대로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내가 귀찮게 군 건 맞으니까요. 내가 너무 자주 와서 형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이제 와서 이런 생각하는 것도 웃기지만.”

“너 스케줄 있어서 못 보는 날 시간이 진짜 느리게 갔어.”

하진은 아예 소파에서 몸을 돌려 정우를 보고 앉았다. 아빠 다리를 하고 올라앉은 하진을 본 정우가 그마저도 귀여워 작게 웃었다.

“뭘 해도 집중도 잘 안 되고 부모님 외출하시면 집도 텅 빈 것 같고.”

“…….”

“스케줄 늦게 끝났다고 네가 새벽에 톡 하면 그때가 아침 같고, 낮 같은 거야. 나도 너 기다렸어. 기다려서 만난 건데 뭐가 귀찮았겠어.”

“…….”

“열 번 다 좋았어.”

정우는 그 다정한 목소리를 마음에 전부 담았다. 하진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따뜻함을 다 끌어모아 사랑으로 뭉치면 하진이 될 것 같았다. 내내 따뜻하고 다정하게 해주고 싶어서 나도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사람. 보고만 있어도 한 번씩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나도 정말 좋았어요. 좋았다는 말로 다 표현이 안 될 만큼 행복했어요. 형이 없는 시간도 이 시간이 지나야 형 보러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냥 다 좋았어요. 이 시간이 끝나면 형이 있다는 거 아니까.”

“좋았다면 다행이야.”

“그런데 앞으로도 좋을 수 있을까요?”

“…….”

“…열한 번째가 없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꾹 참았다가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참지 못했을 것이었다.

“…열한 번째는 안 줄래.”

“…….”

“서운해?”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애초에 열 번의 기회도 하진의 넓은 마음 덕분에 얻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이상 보채서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진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아, 열 번 만나면 형이 대답해 주기로 했었는데 기억나요?”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우가 물었던 말이 머릿속을 뒤흔들며 지났다.

「아까는 애 같았는데, 지금은 또 어른이네.」

「…형은 어느 쪽이 더 좋아요? 내가 애인 거랑 어른인 거랑.」

「그 대답은 열 번 더 보면, 그때 할게.」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진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시무룩해진 정우를 보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마를 덮은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다음에.”

“…….”

“언젠가 다시 보면 그때.”

‘언젠가’라는 불투명한 말에도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는 말보다 불투명해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이 더 좋기 때문이었다. 정우는 그렇게 기대와 희망을 놓지 못하며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저를 보며 웃었다.

“왜 웃어?”

“…제가 좀 웃겨서요. 전에 형이 내가 그렇게 나쁘게 구는데도 계속 기대하고, 희망 가지고 그랬잖아요. 난 솔직히 그것도 이해가 안 됐거든요. 나도 내가 형한테 개새끼처럼 구는 거 아는데… 기대하지 말라는데, 희망 품지 말라는데… 그렇게 아프게 하고, 울리는데 왜 기대를 버리지 못할까. 그 무모한 희망 같은 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궁금했었어요.”

“…….”

“…그래야 살 수 있는 거였어요.”

“…….”

“그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어서 그런 거였어. 이제 알았어요. 형이 말한 언젠가…라는 말에 그래도 다시 보지 말자는 말보다는 훨씬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날 보면서… 형 마음 또 알았어요.”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이는 정우를 본 하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정우는 제 몸을 가득 끌어안는 따뜻함에 하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마주 끌어안았다.

“…잘 지내야 해요.”

“…너도. 너도 잘 지내.”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마주 닿은 체온도 품 안에 가득한 따뜻함도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그렇게 하진은, 또 그렇게 정우는 서로를 한참이나 끌어안았다.

***

인사는 담백했다. 정우는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하진은 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잘 자요.’와 ‘조심해서 가.’가 마지막 인사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시선이 마주했고,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가 1에 도달해 그대로 멈출 때까지 하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꽤 길 거라고 생각했던 열 번의 만남이 끝났다. 내내 어색하기만 한 날도 있었고, 조금은 무모하게 감정만 앞서 몸을 겹치기도 했었다. 무서운 영화를 보기도 했었고, 만나지 못하는 날 아침까지 통화를 한 적도 있었다. 이건 솔직히 만난 걸로 쳐야 하는 거 아니냐는 하진의 말에 절대 아니라며 혹시라도 한 번이 줄어들까 긴장하던 정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

농담인데 농담인 줄도 모르고 바보 같았어. 그때 그 목소리가 떠올라 하진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뺨을 타고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사랑해요, 형.」

상기된 얼굴.

「사랑해요.」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듯 마구 넘치던 말.

「하루 종일 이 말만 해도 모자랄 만큼… 사랑해요.」

더 오래 듣게 하루가 몇백 시간쯤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던 그 순간들. 하진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혼자 있고 싶었다. 다시는 혼자 있고 싶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

“…….”

그렇게 하진의 다시 외로워진 밤이 기울었다.

***

샵이 발칵 뒤집혔다. 화보 촬영을 해야 하는데 눈이 부었다며 온 스태프가 냉찜질 기구들을 들고 정우에게 달라붙었다. 내내 얼려두었던 동그란 찜질 기구로 정우의 눈을 덮고, 차갑다고 하는데도 떼어주지 않았다. 눈이 얼얼해져 더 이상 느낌이 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메이크업 담당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눈이 부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진의 집 앞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까지 오는 동안 내내 울었고, 숙소에 와서도 자는 척을 하며 밤새 울었기 때문이었다. 정우는 제가 이렇게 잘 울고, 오래 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또 새삼 깨달았다. 잘 운다는 건 그래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밤새 울 수 있는 건 처음 안 일이었다.

하진이 없어 외롭고 괴로웠다. 전화하고 싶고, 메시지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보고 싶다는 이기심 때문에 하진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괴로워도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웃었다. 눈이 부어 화보 촬영을 할 수 있겠냐며 온 스태프가 걱정한 아침과 달리 정우는 아주 멋지게 촬영을 마쳤고, 역시 차정우라며 칭찬을 받았다.

줄줄이 내일부터 잡힌 스케줄을 설명 들으면서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하진이 없는데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 걸까. 이대로 어느 날 갑자기 일 년, 오 년, 십 년이 지나 있으면 어쩌지. 정우는 내내 휴대폰에 보이는 오늘의 날짜를 확인했다.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몇 년은 하진을 보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텅 빈 하진의 침대가 있는 방이 싫어서 정우는 내내 거실에서 잤다. 아무 영화나 틀어 재미가 있든 없든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내내 화면만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용을 볼 게 아니라 잠들기 전까지 틀어둘 게 필요한 거라 그게 뭐든 상관없었다.

“…….”

어떤 마음이든 그 무게가 그 기대가 어떻게 흐르든 시간은 갔다. 낮이 저물고 밤이 찾아오고 시간을 버티려고 해도 이길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언제일까. 내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우는 눈을 감았다가 뜨면 하진이 제 앞에 있는 상상을 했다. 물론 그렇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진이 말한 ‘언젠가’가 되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기에 늘 하루의 끝은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아파도, 또 외로워도, 하진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어떤 날은 택시를 타고 그 집까지 가 아파트만 멍하니 보다가 다시 돌아와도 정우는 하진이 묻은 그 날들이 좋았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매번 눈을 깜빡이는 것도 다 좋았다.

언젠가는 멈춘 저의 시간도 하진을 향해 달려갈 것을 알기에.

***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연일 한파주의보가 이어지고, 세상을 전부 얼려서 없애버릴 것 같은 추위가 찾아들었다. 겨울에는 다섯 명의 아포제가 좋은 소식을 들려줄 거라고 기대한 팬들의 마음 역시 겨울처럼 차가웠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강하진. 이제는 소속사가 인정해야 할 때.’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잠잠해질 것 같으면 또 올라오고 또 올라왔다.

처음에는 그런 기사를 볼 때 화가 났지만, 이제 정우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아무것도 인정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추측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추측만으로 기사를 쓰겠지만, 정작 ‘강하진’이라는 사람과 함께해 온 사람들은 누구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정우는 물론이고 멤버들도 지치지 않았다.

“날 진짜 많이 풀렸다. 그렇게 춥더니.”

“그러게요. 아까 뉴스에 나오던데 올여름은 또 더울 거래요.”

“뭐야. 우리가 무슨 냉동만두야 뭐야. 고온에 쪄서 급냉 하는 거잖아. 우리 이제 또 쪄지는 거야?”

“형은 만두 중에서도 제일 잘생겨서 괜찮아요.”

“뭐 그럼 까짓거 한 번 더 쪄지는 걸 보여주지.”

턱에 손을 대고 세기의 미남인 척 눈을 가늘게 뜨는 해성을 보고 웃은 정우가 기겁한 얼굴로 나오는 영우를 바라보았다.

“만두 상한 거 아냐?”

“상한 건 네 얼굴이지.”

“성격 상한 것보다는 낫지.”

청소기를 들고나온 영우가 그대로 해성에게 청소기를 휙 밀었다. 날렵하게 청소기 대를 잡은 해성이 걸레를 들고나오는 인규를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에 다들 대청소 좀 하자. 창도 다 열고. 오늘 날씨 진짜 봄이네.”

“벌써 3월이잖아요.”

창을 활짝 열며 말하는 영우를 본 정우가 3월이라는 말을 가만히 중얼거렸다. 3월, 3월. 봄과 어울리는 계절.

“지창이 형은요?”

“아, 형 아침에 미팅 가셨어. 뭐 받아올 게 많다고 하던데. 혼자 가지고 올라오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전화하면 주차장으로 내려오래. 곧 오실 거야. 점심 전에 오신댔거든. 정우야. 넌 너희 방부터 치워.”

인규의 말에 3월이라는 말에서 빠져나온 정우가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진과 저의 방으로 들어갔다. 계절이 바뀌어 가는데 하진의 침대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정우는 하진이 나간 그 날, 그 계절에 멈춘 빈 침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단정히 덮인 이불을 걷었다. 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매번 가장 예쁜 침대 시트로 늘 깨끗하게 갈아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렇게 춥지 않으니 조금 얇은 이불과 밝은색 시트로 갈아줄 생각이었다.

하진과 제 침대의 시트를 다 벗겨 뭉친 정우가 바닥으로 놓았다. 그리고 베개 커버를 벗기는 그때 밖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정우는 현관 바로 앞에 있어 제가 제일 가깝다는 생각에 얼른 현관으로 나갔다. 지창이 형이 가지고 올 게 많다더니 혼자 문을 못 열어 벨을 누른 모양이었다. 정우는 그대로 문을 열었다.

“…….”

그리고 문밖에 선 사람을,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각하지 못한 얼굴은 아니었다. 늘 생각하고 있으니까. 기대하지 않은 만남도 아니었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늘 기대했었으니까. 그래도 너무나 놀라웠다. 하진이 눈앞에 있다는 게.

“……형.”

“잘 지냈어?”

“…….”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가로저었다. 그런 정우를 보며 하진이 미소 지었다.

“나도 잘 못 지냈어. 보고 싶었거든.”

“…….”

“차정우 네가.”

“…….”

“그리고 이제 대답도 해 주고 싶어져서 왔어.”

“…….”

“네가 물었지. 네가 애인 거랑 어른인 거랑 어떤 게 더 좋냐고.”

정우는 고개도 끄덕이지 못하고 멍하니 제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대답까지 놓치고 싶지 않아 온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냥 네가 좋아.”

“…….”

“어떤 너여도 좋아. 애 같은 차정우도, 어른스러운 차정우도 전부.”

“…….”

“너면 돼.”

“…….”

“…더는 혼자 있기 싫어서 왔어.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어디를 봐도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그런데… 너는? 너는 지금 어때?”

쏟아진 하진의 고백에 내내 한 곳에 멈춰 있던 정우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끝났다고 하는데도 혹독하게 춥던 정우의 계절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겨울이 끝났다.

“늘 형이랑 같아요.”

“…….”

“…보고 싶었어요.”

눈가가 젖어 들어가는 정우를 보며 하진이 웃었다. 웃으며 접힌 눈에서 숙소까지 다시 오는 동안 내내 참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우의 등 뒤에서 왜 이렇게 안 들어오는지 궁금해서 나온 멤버들의 소리가 들렸다. 커지는 눈,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하진의 이름, 손에 든 청소도구들을 아무렇게나 던진 멤버들이 현관으로 마구 달려 나왔다.

하진은 저를 향해 열리는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랑했고, 사랑할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사랑할 정우가 있는 그곳으로.

그렇게 두 사람의 열한 번째 만남이 시작되었다. 영원히 열두 번째는 없을 그 길고 길 두 사람의 시간이.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