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4)

밤새 자료를 뒤적이다 새벽에야 겨우 눈을 붙인 이원은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까페로 내려갔다.

“벌써 나가?”

주인 할머니가 따끈한 차와 빵을 준비해주며 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볼일이 있어서요. 오후에는 니콜라이 씨의 일을 해결해야 하고.”

“볼일이라니, 그 일 때문에?”

할머니는 이원이 러시아에 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넌지시 던진 말에 이원은 선뜻 대답했다.

“네, 간신히 예전 어머니가 살던 집 주인을 찾았는데 주소를 확인하려고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집었다.

“이번에는 찾을 수 있으면 좋겠구먼.”

이원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래야죠.”

곧 그는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벌써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자신도 그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아는 것은 흔해빠진 이름뿐이다.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아도 희망까지 포기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원은 지레짐작으로 미리 지치지 않기 위해 생각을 떨치고 평소보다 더 힘을 주어 마른 빵을 씹었다.

시내의 새로 지어진 건물에 위치한 시의원의 사무실은 위치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을 실감하게 만든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이상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 남자는 이전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주요한 인물이었다. 재력과 권력, 모든 것을 포함해서. 물론 거기에는 빼놓을 수 없는 조력자가 함께 있었다.

“어떻습니까. 일단 유리히의 말로는 순조롭다고 합니다만.”

아첨하듯 부드러우면서도 속을 떠보는 듯한 즈다노프의 물음에 카이사르는 입으로 가져갔던 시가를 떼어내고 대신 길게 연기를 뱉어냈다. 창을 통해 비쳐 들어온 느린 햇살이 넓은 사무실 안으로 길게 늘어져 남자의 잘 닦여진 수제구두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는 방문한지 20분이 지났는데도 여지껏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애초에 시간이 없다고 거절한 카이사르를 부득불 사무실로 부른 것은 즈다노프였지만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자신을 여기까지 불러낸 데 대한 불쾌감을 그는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즈다노프는 카이사르가 피우고 있는 시가를 모두 태울 때까지 남은 한 시간 가량의 시간을 필사적으로 활용해 어떻게든 확답을 받아내야 했다.

“사샤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었죠. 서로가 정말 떼놓을 수 없는 관계였달까.”

슬쩍 아버지에 대한 말을 꺼내 동태를 살폈지만 여전히 그는 미동조차 없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 무심한 태도다. 즈다노프는 내심 울컥하는 기분이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남자는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러시아에서 저 남자의 비위를 거스른다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시체가 되어버린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적당히 기분을 맞춰주며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아마 사샤도 알 겁니다. 전 약속은 꼭 지키죠. 이번 일도 분명 사례는 섭섭지 않게 드릴 것이니 모쪼록 신경 써주십시오.”

이번에는 말을 돌리거나 하지 않고 제법 직선적으로 청탁을 넣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그는 반응이 없었다. 조바심이 난 즈다노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차르, 전 확답이 필요합니다. 뭔가 말을 해보란 말입니다, 자꾸 늦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드디어 감정을 드러내며 불만을 표시한 즈다노프에게 그 때까지 말이 없던 남자는 시가를 입으로 가져갔다가 길게 연기를 뱉어냈다. 마치 휘파람을 불듯 공기를 가르고 그어지는 희뿌연 연기에 즈다노프는 움칠 놀라고 말았다. 그제야 비로소 카이사르는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여전히 미소의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서늘한 표정으로.

“전 바쁜 사람입니다, 즈다노프 의원. 절 여기까지 불러놓고 기껏 하는 말이 투정을 부리는 겁니까.”

“뭐라고요?”

즈다노프는 그의 오만한 물음에 기가 질릴 정도였으나 다행히도 카이사르가 더 빨랐다.

“책임지지 못할 거래였다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제게 청을 넣었을 텐데요. 틀렸습니까.”

“그렇지만…”

즈다노프는 망설이다 푸념하듯 말을 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그만 조바심이 나서. 예정에 없던 녀석이 끼어들어 일을 귀찮게 만들고 있어요. 차르께서 손을 써준다면 바로 해결이 될 일입니다만…”

카이사르는 천천히 시가를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그 변호사 말입니까.”

딩동.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에 이원은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최신식 고속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섬뜩할 정도로 잘 닦인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원과 할머니가 살고 있는 낡은 건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식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층수를 누르는 이원의 얼굴이 환히 비칠 정도로 차갑고 정교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밀봉한 서류봉투를 쥔 채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머리도 슈트도 완벽하다. 이 일은 사소한 일에도 흠집을 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더욱이 상대를 생각하면 더더욱.

며칠 동안 이원은 늦게까지 니콜라이의 푸념 섞인 정황을 들어줘야 했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피땀 흘려 세운 공장을 거짓 서류를 만들어 빼앗아가려 한다’라는 것이 전부이지만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대가 나쁘다. 서류만으로 본다면 명백히 위조였다. 굳이 이원이 나서지 않더라도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할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 서류를 위조한 상대다.

게오르그 즈다노프. 전직 K.G.B.에다 현직 시의원. 막대한 재산과 연줄로 그는 온갖 부정부패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었다. 이런 조잡한 서류만으로도 즈다노프는 충분히 공장을 가로채고도 남는다. 이원 역시 크게 승산이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빼앗기는 것은 억울하다. 하는 데까지 싸워보지 않으면.

다시 벨소리가 울리고 잠시 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의 내부와 마찬가지로 광채가 흐르는 복도를 보며 이원은 혐오감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는 말에 그는 선뜻 대답했다.

“즈다노프 의원님께 볼 일이 있습니다. 이 서류를 직접 전달하려고 하는데요.”

똑똑.

노크소리에 즈다노프는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들어온 비서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있어서.”

“손님?”

즈다노프의 물음에 그녀는 난처한 듯 대답했다.

“그게, 저…”

“실례합니다, 의원님. 연락 없이 찾아왔지만 절 쫓아내지는 않으시겠죠. 시에 사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의원님을 만날 자격이 있는 걸로 아는데 제가 틀렸습니까?”

청산유수처럼 말을 흘려보내며 비서의 뒤에서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모습에 즈다노프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고 말았다. 검은 머리의 변호사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전달해드릴 물건이 있어서. 약속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이미 준비했던 말인 양 주저 없이 흘러나오던 말이 곧 멈춰버렸다. 사무실 곳곳에 길게 늘어진 햇살이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비춘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남자의 백금발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핀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진한 은색의 슈트를 입은 남자는 긴 다리를 꼬고 앉아 굵은 시가를 피우며 이원을 보고 있었다. 특유의 진한 은회색의 눈동자가 이원의 전신을 꿰뚫듯 서늘하게 그를 응시했다. 이원은 그를 알고 있었다. 아니,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들 감히 잊을 수 있을까, 저런 강렬한 남자를.

은빛이 감도는 백금발과 역시 진한 은회색의 눈동자로 인해 시베리아의 은빛 늑대를 연상케 만드는 그는 며칠 전 우연히 마주쳤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처음 그를 마주쳤을 때 느꼈던 위화감과 압박감을 이원은 새삼스럽게 전신으로 깨달았다. 단 몇 초간의 침묵이 얼어붙은 공기를 매섭게 가르고 지나간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면 그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지고 말았을 것 같은 묵직한 고요가 흐르고 난 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원이었다.

“실례합니다, 결례를 저질렀군요.”

대범하게도 이 숨 막히는 긴장감을 망설임 없이 깨뜨려버린 이원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일찍부터 자리 잡은 바리톤 베이스의 음성이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말없이 그의 검은 눈을 응시하는 늑대의 시선에 이원은 두려워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전해드릴 서류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지만 아직 답변이 없으셔서 제 쪽에서 먼저 일을 진행시키려 합니다. 이쪽은 이의제기 신청서, 또 이쪽은 법원의 집행중지 명령서입니다. 관련서류도 함께 동봉했으니 시간이 나실 때 천천히 훑어보시죠.”

선뜻 봉투를 내밀며 덧붙이는 설명에 즈다노프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살기마저 머금는 눈빛으로 이원을 노려보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원은 오히려 대담하게 웃어보였다. 그것은 분명 즈다노프를 도발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즈다노프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햇병아리 변호사인 주제에 지금 나랑 해보겠다는 건가?”

협박이나 다를 바 없는 물음에 이원은 오히려 태연하게 대답했다.

“햇병아리인 저도 아는 사실을 의원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으니 공장에 관한 건은 곧 마무리가 되겠군요. 잘 됐습니다.”

즈다노프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저런, 혈압이 높다고 하던데 큰일 나겠군. 그가 쓰러진다고 해도 별로 유감스러울 일은 없지만 귀찮아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이원은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편안한 고급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시가를 피우고 있는 은빛의 사내였다. 

그 때까지 카이사르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이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줄곧 자신을 직시하는 그의 은회색 눈동자를 이원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하게 인식했다. 즈다노프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척 일부러 그를 무시하고 있던 이원이지만 더는 어쩔 수 없다. 

처음으로 그와 똑바로 마주 서자 그때까지 시선을 머물고 있던 카이사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색한 웃음이라거나 모른 척 시치미를 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이제 어쩔 거냐는 듯이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은회색의 눈동자로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를 무시하고 나가버릴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러나 이원은 선뜻 그에게 말을 거는 쪽을 택했다.

“안녕하십니까. 정이원이라고 합니다, 변호사죠.”

일부러 똑똑한 발음으로 자신에 대해 설명했던 이원은 슈트의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싱긋 미소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부탁합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원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굳이 우연찮은 짧은 만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생각은 없었다. 고작 1분도 되지 않았을 부딪침으로 상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지조차 미지수였으니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남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즈다노프 의원과 단 둘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정도의, 게다가 갑작스럽게 난입한 이원의 행동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지켜볼 정도의 남자라면 대체. 혹시 즈다노프와 손을 잡은 마피아인가?

재빨리 생각을 굴린 이원은 자신의 생각에 대강 확신을 가졌다. 즈다노프의 비리는 알려질 대로 알려진 데다 러시아 내에서 힘과 부를 가진 세력치고 마피아와 연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알고 싶은 건 이 남자가 어느 조직의 누구냐는 것이었다. 당신 누구야, 라는 듯이 꼼짝 않고 남자를 바라보는 이원의 시선에, 그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카이사르라고 하지.”

말과 함께 건넨 얇은 명함을 받으며 이원은 외국인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는 숨길 수 없는 러시아인이었다. 명함에 적힌 이름 역시 정확하게 차르czar가 아닌 카이사르ceaser였다. 카이사르라니 신기하군, 하고 생각하며 다음을 기다렸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카이사르는 그저 시가를 입으로 가져가며 부연 연기 너머로 이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조롱하는 듯한 시선에 이원은 발끈하는 대신 정중하면서도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그럼, 하고 짧은 목례를 마지막으로 이원은 이번에야말로 사무실을 나갔다. 즈다노프에 대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탁, 하는 절도 있고 조용한 문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정적.

“저 건방진 자식! 어딜 감히 내 앞에서…!”

즈다노프가 분노를 폭발시킨 것은 그 뒤였다. 거친 고함소리와 함께 이원이 가져온 서류봉투를 내던져버린 그는 곧바로 카이사르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보시오, 저런 녀석이라고! 감히 내게 도전하고 있지 않소, 진작에 손을 봐줬어야 했는데! …듣고 있소? 빌어먹을, 카이사르! 그냥 내버려두면 저 녀석은 틀림없이 일을 엉망으로 만들 거라고!”

흥분해서 마구 이름을 불러버린 즈다노프였지만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말을 쏟아내고 만 다음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카이사르는 별달리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즈다노프의 말 따위는 한 귀로 흘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황급히 헛기침을 하고 말투를 가다듬은 즈다노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차르, 저 녀석을 그냥 두고만 볼 겁니까? 아마 곧 골칫덩이가 되어버릴 겁니다. 그 전에 어떻게든 기를 꺾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몰라요. 앞으로도 분명히 성가시고 귀찮게 굴 텐데, 미리 없애버리는 게 좋겠소.”

애써 침착하게 그를 설득하는 즈다노프지만 카이사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긴 시가의 끝을 전부 태운 그가 마침내 마지막 연기를 천천히 뱉어내며 속삭이듯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시선은 이원이 나간 문으로 고정시킨 채.

“그렇군요.”

사무실에서 나온 이원은 곧바로 복도 끝의 화장실로 향했다. 건물 전체 어디나 그렇듯 최신식으로 설비 된 청결하고 사무적인 화장실에 들어간 그는 곧바로 찬물을 틀어 팔을 걷어붙이고 얼굴을 씻었다. 몇 차례 찬물을 뒤집어쓴 다음에야 비로소 정신이 든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검은 눈이 평소보다 더 어둡게 물들어있다.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던 이원은 고개를 돌려 벽에 비치된 종이수건을 뽑아 손을 닦으려다 멈칫했다. 팔의 솜털이 일어나 있다. 그제야 이원은 자신이 처음으로 느꼈던 묘한 감정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 순간 또다시 소름끼치는 섬뜩함이 전신을 가로지르며 뇌에 차가운 한기가 불어들었다. 단지 그 남자를 마주 보았을 뿐인데 전신에 소름이 돋다니. 이원은 창백한 얼굴을 황급히 종이수건으로 닦아내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정말로 쉽지 않겠군…”

일반인들보다 몸이 가벼운 이원이지만 낡은 계단은 어김없이 둔탁한 비명을 지르며 불평을 해댔다. 한 발을 딛기가 무섭게 다음 발을 내딛으며 날아오르듯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습관이 몸에 붙어버린 것은 그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딱하게 여겨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느 때처럼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보다 훨씬 가벼운 발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던 이원은 자신의 방문 앞에 서있는 중년남자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니콜라이 아저씨, 언제 오셨습니까?”

친밀하게 말을 건네며 다가가자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남자가 조바심을 내며 묻는다.

“오늘 즈다노프를 만나러 갔었다면서? 어떻게 됐나, 얘기는 해봤어? 뭐라고 하던가.”

초조한 마음은 알겠지만 현관에서 나눌 얘기는 아니다. 이원은 대답 대신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내 뻑뻑한 구멍에 밀어 넣었다. 이곳저곳 다 낡아버린 건물은 문의 열쇠구멍 또한 예외는 아니라서, 이미 다년간의 경험으로 익숙해진 이원이 아니고서는 열쇠가 있다고 해도 문을 여는 데에는 상당? 어려움이 있었다. 두어 번의 짤각거리는 소리에 이어 문을 연 이원은 선뜻 니콜라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에서 얘기하시죠, 마침 홍차가 생겼는데 잘 됐군요.”

니콜라이는 주저하다 곧 이원의 뒤를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방 하나와 거실, 욕실 겸 화장실이 전부인 좁은 맨션을 이원은 거실은 사무실로, 방은 침실로 사용하고 있다. 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이어지는 사무실 겸 거실로 니콜라이를 안내한 이원은 좁은 주방에서 포트를 꺼내 물을 올리고 찻잔을 준비했다. 손님용의 찻잔과 자신의 머그잔을 꺼내 한 차례 뜨거운 물로 안을 데운 뒤 홍차를 따랐다. 지난 번 행패를 부리는 깡패들을 쫓아준 데 대한 대가로 받은 티백 홍차는 값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제법 향은 좋았다. 적당히 브랜디를 섞고 우유를 넣으면 꽤 괜찮을 것이다.

“밀크를 드릴까요?”

“됐네, 레몬만 부탁하지.”

냉장고에서 레몬을 꺼내 슬라이스한 조각을 넣고 니콜라이의 몫으로 뜨거운 홍차를 한 잔, 자신의 몫으로 브랜디와 우유를 넣은 밀크티를 한 잔 만든 이원은 곧 니콜라이가 기다리는 거실로 돌아갔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즈다노프 쪽에서 숨겨둔 카드가 있더군요.”

“카드라니?”

이원이 건네준 홍차를 마시지도 않은 채 니콜라이가 물었다. 이원은 자신의 밀크티를 맛보고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브랜디를 너무 넣었군.

“즈다노프 쪽에서 쉽게 손을 떼지 않을 모양입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처음부터 어떤 타협도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최소한의 보상금도 없겠죠.”

“무슨 얘긴가, 도대체 누가 뭘,”

성급하게 말을 잇던 니콜라이가 일순 멈칫한다.

“…설마 마피아인가…?”

반신반의하며 숨소리조차 가라앉혀 묻는 그의 음성에 이원은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심상치 않은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봤습니다. 카이사르라고 하던데, 혹시 아십니까?”

니콜라이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으나 이미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원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전부터 즈다노프 의원의 뒤에 마피아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확실한 모양입니다. 주변에 좀 알아봤습니다만… 세르게예프 쪽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마 그 남자는 간부일 겁니다.”

이원은 남자에게서 받은 명함을 꺼내 뒤를 보여주었다. 금박으로 찍힌 문장을 보는 순간 니콜라이의 잦아들었던 숨소리는 아예 멎어버렸다. 바로 핏기가 가셔버리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이원은 안쓰러운 기분과 함께 당혹감을 느꼈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즈다노프만으로도 버거운데 러시아의 최대 조직 중 하나인 세르게예프라니. 명함에 당당하게 찍혀있는 세르게예프의 문장은 그가 조직 내에 고위급 간부라는 것을 의미했다. 간부가 직접 사무실에 와 얘기를 나눌 정도라면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난 셈이다. 니콜라이는 전부를 잃게 될 것이다.

니콜라이의 후들거리는 손이 찻잔을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적당히 높이를 맞춘 홍차가 출렁이며 쏟아졌지만 그는 깨닫지 못했다. 소리내어 홍차를 마신 뒤에야 비로소 그는 어느 정도 충격을 가라앉힌 모양이었다. 세르게예프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니콜라이는 이미 모든 투지를 잃어버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를 묻는 것이다. 아직 어린 딸과 만삭이 된 아내, 그리고 몇 명 되지 않는 공장의 근로자들까지 모두가 그의 눈앞을 스쳐가는 것을 이원은 보았다.

“공장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대신에―”

“대신?”

대안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듯 니콜라이의 눈이 커졌다. 이원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빼앗길 수는 없으니 돈을 달라고 해야죠.”

“돈이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니콜라이는 놀라 이원의 말만 되풀이했다. 이원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부당취득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겁니다. 물론 즈다노프 쪽은 절대 타협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쪽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하지만…”

“하지만?!”

니콜라이는 성급하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피아 쪽은 다를 겁니다.”

“즈다노프 의원이 보내온 선물입니다.”

유리히가 내민 것은 작게 포장 된 직사각형의 물건이었다. 세심하게 둘러져 있는 끈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카이사르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최근 한정판매 된 유명회사의 만년필이 들어있었다. 100개 한정으로 한 시간 만에 예약판매가 끝나 현재는 구할 수도 없고 경매에서는 원가의 10배에 가까운 가격으로 팔리지만 그나마도 거의 볼 수가 없는 물건. 

자신의 이니셜까지 금장으로 새겨져있는 만년필을 내려다보는 카이사르의 모습에 유리히가 입을 열었다.

“구하시던 물건이군요. 즈다노프 의원이 용케 알았습니다.”

카이사르가 만년필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서 들었음에 틀림없다. 그 중에서도 그가 모으지 못한 몇 개 안 되는 컬렉션 중 하나를 기가 막히게 꿰뚫어 구해왔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카이사르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도 된다. 

흘긋 자신에게로 향하는 은색의 눈동자에 유리히는 자신도 모르게 움칠 놀라고 말았다. 아뿔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유리히는 자백을 한 셈이나 다름없다. 물론 시치미를 뗐다고 해도 카이사르는 간파하고 말았을 테지만.

“말이 많은 사내는 싫다고 했을 텐데.”

카이사르는 낮은 음성으로 말하며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유리히는 황급히 사죄하며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즈다노프 의원이 차르에게 뭘 선물하면 좋을까 물어오기에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그만…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카이사르는 반응이 없었다. 주저하며 눈치를 보던 유리히는 사이를 두었다가 덧붙였다.

“이건 인사일 뿐이고 일이 해결되고 나면 별도의 사례를 한다고 했습니다. 혹시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 마음에 들어.”

카이사르는 선뜻 본심을 말했다.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내 밝아진 유리히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카이사르는 펜촉의 끝을 내려다보며 입가를 비뚤어뜨렸다.

“그래서 불쾌해.”

순간 뇌수가 얼어붙는다는 기분을 유리히는 실감했다. 동시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 그는 아첨하는 말도 변명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 남자를 화나게 했다.

입안이 바짝 마르는 공포에 묵직한 숨을 삼켰을 때, 둔탁한 노크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사무실 앞을 지키는 부하가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차르. 누가 찾아왔는데요. 약속을 했다고.”

타이밍 좋은 방문객에게 유리히는 내심 감사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며 유리히는 황급히 화제를 돌려 물었다.

“누구라고 하던가. 오늘 차르의 스케줄은 점검했을 텐데.”

“네, 보니까 연락을 하긴 했던 모양인데 스케줄에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하는 말이, 즈다노프 의원에 관한 건이라면서 니콜라이 어쩌고 하는 남자의 변호사랍니다. ‘카이사르’ 를 찾는다고 하는데요.”

조심스러운 덧붙임에 유리히는 재빨리 카이사르를 돌아보고 설명을 하려 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없다고 해.”

카이사르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유리히의 말을 막아버렸다.

“그 건에 대해서는 들을 말도 할 말도 없어. 하고 싶은 만큼 발버둥 쳐보라고 해,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카이사르의 냉정한 말에 부하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유리히는 서둘러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 말을 꺼냈다.

“즈다노프 의원의 말로는 저희 쪽에서 이제 앞으로 나서주었으면 하더군요. 어떻게 할까요.”

“이건 돌려보내.”

유리히가 물었던 질문의 답은 아니었다. 유리히는 카이사르가 내려놓는 만년필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특별주문품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는 받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즈다노프 의원이 성의를 무시했다고 불쾌해할 수도 있고…”

갑자기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유리히는 더 말을 할 틈이 없어졌다. 깜짝 놀란 유리히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카이사르 또한 문으로 시선을 향했다. 발로 문을 걷어차는 난폭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곧바로 품에서 베레타를 꺼낸 유리히가 정면으로 총구를 향했다.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본 그는 그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바쁘신 모양이군요, 카이사르 씨.”

그 말과 함께 빙긋 미소를 짓는 고혹적인 미인 변호사의 얼굴을, 유리히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넓은 사무실 안에 정적이 흐른다. 이원은 예상했던 격투 끝에 얻은 흐트러진 매무새를 보란 듯이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저 역시 바빠서 항상 시간을 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군요. 미리 전화를 드렸는데 없다고 거짓말을 하시니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싱긋 웃는 이원의 얼굴을 카이사르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유난히 새까만 머리카락은 빛을 받는 부위만이 오묘하게 블루블랙으로 물들어 윤기를 냈다. 가늘고 긴 외꺼풀의 눈은 미소를 짓자 금세 초승달처럼 기울어져 지독히도 외설스럽게 보였다. 

넥타이를 고쳐 맨 긴 손가락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나자 흐트러졌던 그의 매무새는 곧 말끔히 되돌아갔으나 오히려 그래서 그는 더욱 퇴폐적으로 보였다. 차라리 엉망으로 옷이 구겨져있는 쪽이 더 나았다. 그렇다면 저 단정한 셔츠를 찢고 넥타이로 손목을 묶어버리고 싶은 강렬한 욕정은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던 유리히는 뒤늦게 현실을 자각하고 황급히 베레타를 품에 넣었다.

“차르.”

어떻게 할까요, 하듯이 그를 부르는 음성에 그 때까지 이원을 응시하고 있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만나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전 지금밖에 시간이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유리히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카이사르의 말에 답한 이원은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겨 똑바로 허리를 펴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난번에 인사를 드렸었죠. 즈다노프 의원이 빼앗으려고 하는 공장에 대한 건입니다. 아마 당신이 그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데, 틀렸습니까?”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 묻자 1인용의 가죽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카이사르는 무심한 얼굴로 품에서 시가케이스를 꺼냈다.

“글쎄, 난 모르는 얘기군.”

시가의 끝을 자르는 그의 모습에 황급히 라이터를 꺼내 끝에 불을 붙여주는 유리히를 흘긋 내려다보았던 이원이 말했다.

“즈다노프 의원의 사무실에서 만났었는데 기억나지 않습니까? 분명히 명함을 드리고 제 소개를 했었습니다만.”

절도있게 딱딱 끊어지는 발음으로 묻는 말에 카이사르는 일부러인지 생각을 더듬는 건지 즉각 대답하지 않고 시가의 연기만 깊숙이 들이마셨다. 몇 초의 공백이 흐른 뒤, 그는 연기를 길게 뱉어낸 뒤에야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안 됐군, 기억나지 않아. 동양인들의 얼굴은 다 거기서 거기라서 말이지.”

그 말에 유리히가 풋,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사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원을 무시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이원이 한 일은 그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

곧바로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만년필을 낚아채듯 가져간 이원을 유리히는 미처 제지할 틈도 없었다. 그야말로 눈을 깜박한 다음 순간 모든 건 끝나버렸다. 만년필의 날카로운 끝이 두터운 소파의 가죽을 난폭하게 뚫어버리고, 공기가 터지듯 둔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라 숨을 삼킨 유리히의 창백한 시선 너머에는 여전히 가죽 소파에 기대어 있는 카이사르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시가를 입에 문 채 자신을 노려보는 암흑처럼 검은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시야에는 눈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관자놀이 옆에 꽂힌 만년필과 아직 그것을 세게 쥐고 있는 이원의 긴 손가락이 함께 비치고 있었다.

대담하다는 말로는 모자랄 이 겁 없는 사내는 감히 카이사르 알렉산드로비치 세르게예프의 얼굴 바로 옆에 만년필을 꽂은 것이다.

유리히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릴 정도로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때 카이사르의 위를 덮치듯 몸을 숙이고 있던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이제 기억하겠지.”

낮은 그의 음성에 유리히는 입을 벙긋거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말이 없던 카이사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아.”

은회색의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다.

“확실히 알 것 같군.”

낮은 음성은 몸 전체를 은밀히 훑고 지나가는 듯 했다. 조용히 그를 노려보던 이원이 허리를 들었다. 똑바로 선 채 카이사르를 내려다본 그가 갑자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유리히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방금 전 일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 이원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카이사르를 바라보았다.

“그럼 얘기를 계속할까요?”

침묵이 흘렀다. 아무 말 없이 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이사르를 마주 한 채 이원은 말을 이었다.

“즈다노프 의원이 제 의뢰인에게서 강탈해 가려는 공장과 토지 때문에 왔습니다. 제 짐작이지만, 도움을 주고 계신 것 같은데요.”

일부러 말을 끊었지만 카이사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듯 묘한 표정으로 이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원은 오래 끌지 않고 용건을 덧붙였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즈다노프 의원은 다년 간 계속 된 비리와 부정으로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당에서도 의원의 위치는 상당히 불안한 상태고, 당의 입장에서는 곧 있을 선거를 위해 인심을 잃은 시의원 정도는 얼마든지 잘라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만.”

여전히 말이 없는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면 조만간 즈다노프 의원이 구속되는 것도 시간문제가 아닐까요?”

문득 뒤쪽에서 유리히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원은 카이사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약속한 대가는 고사하고 불미스러운 뒷조사까지 받게 될 겁니다. 조직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은 결코 아닐 텐데요.”

이원의 음성이 유혹하듯 낮게 가라앉았다.

“마피아의 간부나 되면서 조직에 이득이 안 되는 일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사무실 안에서 이원과 카이사르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은 채 집요하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입을 연 것은 이원이었다.

“필요한 서류와 조건은 안에 있으니 보고 연락주십시오. 사흘 이내에 연락이 오지 않으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더할 수 없이 청량한 음성이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왜 저 말이 협박처럼 들리는 건지는 아직 의자에 박혀있는 만년필을 보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었다. 이원은 그렇게 자신의 말만 하고 가져온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인사 대신 짧은 미소를 남긴 채 나가버렸다. 

다시 찾아온 정적은 이전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뭐, 뭡니까 저 자식은! 감히 누구에게 저런 행패를 부리고, 괜찮으십니까 차르? 다치신 곳은 없는 겁니까?!”

정신을 차린 유리히가 부산을 떨며 고함을 질러댔지만 이미 타이밍은 한참이나 늦었다.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기만 한 자신을 자책하며 펄펄 뛰던 유리히는 지금이라도 이원을 끌고 와 머리에 총알을 박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제라도 서두르려 황급히 돌아섰던 유리히가 뒤늦게 물었다.

“당장 잡아올까요?”

어서 명령을 내려달라는 듯 조바심을 내며 기다렸지만 카이사르는 그를 무시한 채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카이사르의 시선이 처음으로 소파에 박혀있는 만년필로 향했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라고는 없는 그의 얼굴을 보며 유리히는 당황해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유리히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카이사르의 긴 손가락이 차가운 만년필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애무라도 하듯 그것을 감아쥐는 유려한 손가락에 유리히는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다. 다음 순간, 단번에 그것을 뽑아낸 카이사르가 곧바로 그것을 내던져버렸다. 섬뜩할 정도로 매서운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만년필은 벽에 처박히고, 곧 완전히 망가져 바닥을 뒹굴었다.

“돌려줄 수 없게 됐군.”

여전히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메마른 음성에 유리히는 소름이 쫙 돋았다. 카이사르는 의자를 회전시켜 곧바로 창밖으로 시선을 향하며 말했다.

“저 남자에 대해서 알아 봐. 가족 관계, 고향, 출신학교, 가지고 있는 책이 몇 권인지 까지 전부 다.”

“저 변호사에 대해서 말입니까? 하지만…”

뜻밖의 명령에 어리둥절해져 이유를 물으려던 유리히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카이사르의 은회색 눈이 묘한 광채를 띠며 기울어졌다.

“전부터 호랑이를 한 마리 키우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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