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34)

까페를 복원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청소를 하는 것만으로도 꼬박 이틀을 잡아먹고 난 뒤, 이원은 직접 재료를 구해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기로 했다. 할머니의 좌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줄곧 시련과 맞싸워온 러시아인의 기질답게 그녀는 분연히 일어나 새롭게 삶을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인테리어를 바꾸는 게 좋겠어.”

엉망이 된 까페 대신 이원의 사무실로 찾아와 꼬깃꼬깃한 종이를 내밀며 그녀가 말했을 때, 이원은 흔쾌히 동조했다. 오래 된 나무테이블은 여기저기 금이 간 데다 다리 길이가 맞지 않아 매번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할머니는 이번에는 철물로 된 튼튼한 의자와 테이블을 원했다.

“만들 수는 있는데, 겨울엔 목재가 따뜻하지 않을까요?”

심사숙고해 건넨 디자인에 대해 이원이 주의 깊게 충고를 하자 이내 그녀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러시아의 겨울은 인테리어에 대한 욕망을 간단히 짓밟아버릴 정도로 혹독했다. 1년의 반이 넘게 북풍이 몰아치는 러시아에서 이원의 조언은 상당히 유효했다. 결국 이원은 할머니가 필요로 할 때는 얼마든지 새로 가구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뒤 목재로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실컷 맞아 사흘을 내리 앓았던 니콜라이도 겨우 기운을 내 작업에 동참했다.

“저 때문인 걸요, 죄송해요 이바나 할머니.”

금세 눈시울을 적시는 니콜라이에게 할머니는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네, 깨진 보드카나 사내든가.”

그 날 저녁 니콜라이는 가진 돈을 탈탈 털어 할머니를 위해 고급 보드카를 사왔다. 두려움에 차마 나서지 못했던 다른 주민들도 일손을 돕고 모금을 해 얼마간 돈을 보탰다. 고된 삶에 힘겨운 매일을 연명하면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돕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덕분에 할머니의 까페는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며칠 째 눈은 오지 않았고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좋은 징조라며 할머니에게 덕담을 했다. 이원은 산뜻한 기분으로 일어나 바로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매일 같은 일과의 반복이었다. 낮에는 까페의 재건을 돕고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니콜라이와 재판을 준비했다. 

현재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재판을 통해 상황의 부당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승산은 거의 없었지만 이원은 마지막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니콜라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똘똘 뭉쳐 니콜라이와 할머니를 도왔다. 하지만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 또한 너무 많았다. 즈다노프의 비리를 파헤쳐 부당하게 토지와 공장을 빼앗겼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관건이었지만 발이 닳도록 뛰어다녀도 유효한 증거는 찾기 어려웠고 이원이나 니콜라이의 편에서 증언을 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재판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저녁이었다. 이원은 마지막 테이블을 만들기 위한 나무를 자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즈다노프를 상대로 한 재판을 떠올리고 있었다. 단지 서류가 위조되었다는 사실만 증명하는 걸로 모든 게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보아도 위조된 것이 분명한 서류만으로는 증거가 되지 않다니. 다시 생각해도 답답한 마음에 부아가 치밀었다. 홧김에 마구 나무를 썰어댔을 때였다. 덜컥, 하고 낡은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영업은 중지했지만 수시로 마을 사람들이 오고갔기 때문에 이원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멈칫하고 말았다. 눈에 띄게 장신인 그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현관문을 머리를 숙인 채 엉거주춤하게 통과했다. 덕분에 이원은 그의 얼굴보다 먼저 가마를 보고 말았다. 물론 특유의 머리칼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지만.

카이사르.

이원은 그가 똑바로 허리를 펴고 한 차례 가게를 둘러보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목재를 자르고 붙이느라 먼지투성이인 까페 안은 그래도 제법 구색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원이 직접 만든 나무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카이사르가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그는 가게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이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오랜만이군.”

짧게 인사를 건넨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마주 인사를 하는 대신 적대감을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볼일이야?”

무심코 거친 말투로 내뱉었던 이원은 그러나 굳이 그것을 수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반항적으로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카이사르는 별다른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줄 것이 있어서. 아마 가지고 싶어 할 것 같은데.”

그제야 이원은 그가 들고 있는 서류봉투로 시선을 향했다. 제법 두툼한 봉투는 안을 볼 수 없도록 단단히 밀봉이 되어 있었다. 썩 내키지 않은 얼굴로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즈다노프를 상대로 재판을 하고 있지?”

“그래서?”

이원은 짜증스럽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긋하기만 했다.

“시의원이 상대라면 꽤 힘들 텐데. 게다가 고위급 공무원과도 연줄이 있고.”

“용건만 말해.”

이원은 노골적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뜸을 들이면 쫓아내버리겠다는 듯이. 카이사르의 은회색 눈동자가 즐거운 듯 부드럽게 물결쳤다.

“증거, 필요하지 않아?”

낚시꾼이 미끼를 드리우는 것처럼 유혹적인 음성에 이원은 멈칫했다. 카이사르는 편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모든 비리에는 증거가 남기 마련이지. 상대가 배신을 할까봐 서로 약점을 잡아놓거든.”

카이사르는 가볍게 서류봉투를 들어보였다.

“바로 이럴 때 사용하는 거지.”

이원의 표정이 바뀌었다. 저 봉투 안에 즈다노프의 비리가 숨겨져 있다고?! 배심원들마저 매수되었을 확률이 높은 불리한 재판에서 증거는 무엇보다 절실했다. 

저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하는 의문은 그 다음이었다. 정말이라면 저것은 이원이 원하던 바로 그것임이 틀림없었다. 순간 갈망하는 표정을 짓자 카이사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갖고 싶으면 20분 내로 옷 갈아입고 내려와, 그 차림으로는 곤란하니까.”

이원이 입고 있는 먼지투성이의 낡은 진과 셔츠를 흘긋 본 카이사르가 말했다.

“예약시간이 다 되었거든.”

“예약?”

어리둥절해하며 그의 말을 되물은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선뜻 대답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얘기하지.”

이원이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지만 카이사르의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보란 듯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9분 남았어.”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같은 수법을 두 번 쓰진 않아.”

간단히 이원의 의혹을 넘겨버린 카이사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 필요 없는 건가?”

두툼한 서류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낮은 욕설과 함께 돌아서는 이원을 향해 카이사르가 덧붙였다.

“욕을 했으니 10분으로 줄여주지.”

“망할, 웃기지 마. 누가 멋대로…”

“5분.”

즉각 응답한 카이사르가 선뜻 몸을 돌렸다.

“정확히 5분 뒤에 난 떠날 거니까 증거가 필요하다면 알아서 해. 그리고 그 볼품없는 옷도 질색이야,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최고급으로 입고 나오라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이원의 전신을 훑어본 카이사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정확히 5분 뒤에 난 떠날 거니까.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곧바로 대기해있는 승용차로 향하는 모습에, 이원은 치미는 욕설을 삼키며 급히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정확하게 5분 뒤 시동을 거는 자동차에 가까스로 올라탄 이원이 향하게 된 곳은 시내의 웅장한 레스토랑이었다. 지나가면서 몇 번 건물을 보긴 했지만 레스토랑이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무엇이건 ‘큰 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답게 건물이고 구조물이고 눈에 띄게 거대한 것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렇게 규모가 큰 레스토랑은 처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차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남자는 한 눈에 보기에도 레스토랑의 간부로 보였다. 지배인이나 그에 버금가는 위치의 남자일 것이다. 그런 그가 직접 입구까지 나와 자리로 안내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에 버금가게 석연치 않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그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는 카이사르의 태도였다. 

하긴 거대 조직 마피아의 눈밖에 나면 추운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호수 안에 처박혀 봄이 될 날만 기다려야 할 처지가 될 테니 당연하겠지.

내심 비꼬아 생각했던 이원에게 지배인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뒤따라온 직원이 꺼내준 의자에 앉자 곧바로 메뉴판을 나눠준 지배인이 직원과 함께 사라졌다. 밖에서 보았던 규모만큼이나 거대한 레스토랑 안에는 식사를 즐기기 위해 온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 가득히 앉아 있었다. 

메뉴 옆에 적힌 숫자는 이원의 한 달 생활비와 맞먹을 정도였지만 이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저 한 끼 식사에 불과한 숫자일 것이다. 이원은 식사보다 먼저 와인을 고르는 카이사르의 익숙한 모습을 흘긋 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재빨리 다가와 몸을 숙였다. 

82년 산 페트루스 와인을 주문한 카이사르가 이원을 흘긋 보았다. 마음에 드냐는 듯이. 이원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게 전부였다. 사실 몇 천 루블짜리 와인을 마시나 맹물을 마시나 그에겐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 남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였다. 도대체 그 서류봉투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궁금했지만 레스토랑 입구에서 코트를 맡긴 뒤 돌아보니 어느새 카이사르의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원은 초조해졌지만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대단찮은 것이면 나이프로 찔러주겠어.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를 흘긋 내려다보는데,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루지야 와인도 좋지만 내 취향은 프랑스 와인이지.”

넌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 카이사르가 이원을 응시했다. 이원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난 와인은 잘 몰라서.”

“그루지야 와인이 인류 최초의 와인이라는 설도 있던데, 어떻게 생각해?”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알고 먹으면 맛이 달라지나?”

카이사르는 선뜻 말했다.

“감각의 다양성은 지식의 양에 비례하니까. 아는 만큼 더 예민해 지는 거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였다. 이원은 평생 와인 따위 구분하지 못하고 살아도 좋으니 당장 봉투를 내놓으라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원을 끌고 여기까지 온 이유를 까맣게 잊은 듯 계속 와인에 대한 말만 떠들어댔다.

“나란히 놓고 마셔보면 확실히 맛의 차이가 느껴져. 와인에도 각각의 성격이 있지 않나? 프랑스 와인은 우아하지만 까다롭지. 미국 와인은 거칠지만 강해. 그루지야 와인은 뭐랄까, 처음은 고집 센 숫처녀처럼 밋밋하고 딱딱하지만 익숙해지면 천하의 둘도 없는 요부와 같달까…”

때마침 직원이 페트루스 와인을 가지고 돌아왔다. 라벨을 확인한 카이사르는 가볍게 테이스팅을 마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직원은 이원의 글라스에도 와인을 따라준 뒤 다시 물러났다. 카이사르는 건배하듯 가볍게 글라스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즐기라고, 요리도 예술이니까.”

예술이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군.

내심 생각하며 이원은 묵묵히 와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불행히도 러시아에서 스포츠카는 그리 쓸모가 없어. 수시로 눈이 내리고 강풍이 몰아치는데 지붕이 없으면 정말 곤란하지. 하지만 자꾸 사게 된단 말이야, 타지도 않을 차 때문에 차고를 넓히면서까지.”

알았으니까 어서 봉투를 내놓으라고!

전에도 느꼈지만 인내의 끝을 시험하는 남자였다. 벌써 한 시간 째 이어지는 식사 시간 동안 카이사르는 단 한 번도 서류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와인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축구 얘기에서 유전과 최근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옮기더니 이젠 평생에 한 번 볼까말까한 수퍼카 얘기다. 

이원은 냅킨의 귀퉁이를 힘주어 잡고 카이사르를 향해 마구 나이프를 휘둘러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눈은 자꾸만 카이사르의 주변을 얼씬거렸다. 도대체 어디에 둔 거야?! 이원은 카이사르의 페라리에 대한 예찬을 한 귀로 흘리며 당장 봉투를 내놓으라고 멱살을 잡고 싶은 자신을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썼다.

와인에 이어 축구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는 멈칫했지만 일단 넘어갔다. 식사에 응했으니 어느 정도의 대화에 호응을 해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인내심의 극에 달한 이원은 카이사르가 또다시 새로운 화제로 엉뚱한 얘기를 꺼내 시간을 끌면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디저트입니다.”

이제 끝인가, 했지만 착각이었다. 불행히도 레스토랑의 특별메뉴인 디저트는 자그마치 다섯 번에 걸친 코스였다. 첫 번째 디저트인 아이스크림이 나오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아이스크림의 근원은…”

동시에 이원은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에 얹어두었던 냅킨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무시했다. 말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는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서류를 주지 않겠다면 당신과 이런 식으로 시간 끌 이유 없어.”

애초의 결심대로 돌아가려는데, 저쪽에 서있던 직원이 즉각 다가와 카이사르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원이 멈칫하고 바라보는 사이 카이사르는 한 손으로 봉투를 받아들고 그를 응시했다.

“여기 있어.”

이원이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그것을 빼앗으려 하자 카이사르는 간단히 팔을 빼 그것을 수포로 만들었다.

“공짜로는 안 되지.”

지금껏 당한 고문으로는 부족한 건가? 이원이 미간을 모으고 그를 바라보자 카이사르가 말했다.

“나에게 키스하면 주겠어.”

가장 붐비는 저녁 시간의 유명 레스토랑 안에는 식사를 하는 사람들과 직원들로 꽉 차 있었다. 묘한 분위기의 둘을 흘긋거리며 훔쳐보는 사람들의 시선 또한 적지 않았다. 어떻게 하겠어, 라고 말하듯 카이사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원은 망설이지 않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선 채 그대로 허리를 숙인 이원이 카이사르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었다. 탄력적인 부드러운 입술이 카이사르의 단정한 입술에 닿는가 싶더니 곧 지그시 눌러왔다. 무심코 카이사르는 눈을 감았다. 

탄성과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을 때, 이원의 손이 카이사르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낚아채듯 빼앗아갔다. 그리고 키스 또한 끝이 났다. 선뜻 몸을 일으킨 이원은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이사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만.”

짧은 인사를 남긴 뒤 그는 곧바로 돌아서서 레스토랑을 나가버렸다. 남겨진 것은 카이사르와 놀란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던 사람들뿐이었다. 가만히 이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이사르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망설이며 눈치를 보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빈 그릇을 치우고 카이사르의 앞에 다음 디저트를 내려놓았다. 와인에 절인 탐스러운 젤리가 그의 앞에 놓여졌다. 카이사르는 디저트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재킷 안쪽에서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폐 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역시 넌 재미있어.

차분하게 연기를 뱉어내는 그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남아있었다.

“세상에, 정말 자네 대단하네!”

첫 공판이 끝난 뒤 법정을 나오자마자 니콜라이는 감격에 차 소리쳤다. 절대적인 패배를 예감하며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던 그에게 오늘의 공판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다. 이원은 마주 웃으며 섣불리 안심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내심으로는 복잡한 심정이 남아있었다.

카이사르가 준 서류는 놀라운 것이었다. 벌써 10년 전의 것이었지만 즈다노프는 이번과 똑같은 수법으로 다른 이의 땅과 건물을 빼앗아갔다. 악행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명백히 남아있었다. 

조작한 서류를 만든 사람과 아무 의심도 없이 순식간에 처리 된 절차, 그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은 일가족까지, 모든 증거가 명백했다. 물론 당시에 이 모든 서류를 갖추고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명백히 승리를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깊고 깊은 터널 속에서 바늘 구멍만한 햇살이 흘러들어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마음을 더 강하게 먹으십시오. 앞으로 상상도 하지 못할 위협이 있을 테니까요.”

“음, 알았네.”

니콜라이는 여전히 상기 된 얼굴로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즈다노프가 변호사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한 차례 무서운 눈으로 니콜라이와 이원을 노려본 그는 곧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자, 그럼 오늘은…”

“그래, 수고가 많았네. 어서 아내에게 가서 말해줘야지. 고마워, 정말 고맙네.”

연거푸 인사를 한 니콜라이는 황급히 돌아서서 나는 듯이 달려갔다.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원은 곧 씁쓸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다음 재판에 대한 준비를 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뭐, 하루쯤은 괜찮겠지. 이원은 생각하며 곧 뒤를 따라 법원을 나왔다. 

이제 시작인 셈이지만 스타트치고 나쁘지 않다. 문제는 앞으로가 더 큰일이라는 것이다. 준비한 증거는 그것이 전부였다. 과연 그걸로 법원은 니콜라이 씨의 편을 들어줄까…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던 이원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화창한 햇살이 부서지는 대로변에 우아한 세단이 서있었다. 짙게 선탠이 된 차창은 그 안에 사람이 있는지 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이원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차가 낯익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어느새 발걸음이 느려진다. 천천히 다가간 이원의 앞에서 소리 없이 차창이 내려갔다.

“안녕, 변호사 씨.”

느긋한 음성으로 말을 건넨 은빛의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재판의 결과가 좋지 않았나?”

이원은 썩 달갑지 않은 표정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저런, 갈 길이 멀군.”

짐짓 애석하다는 듯 말투를 꾸며낸 카이사르가 뭔가를 들어보였다.

“이런 게 있다면 도움이 될 텐데.”

이원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멈춰 섰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니콜라이에게 너무나 절실히 필요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닫힌 차안에서 도어가 열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게 열린 차의 문을 이원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이사르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켜보았다. 어떻게 하겠느냐는 듯이.

탁.

잠시 뒤 차의 문이 닫히고, 이원은 카이사르의 차에 탄 채 자리를 떠났다.

  

똑똑.

노크소리에 이원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문을 연 것은 주인 할머니였다.

“좀 쉬었다 해.”

할머니는 손수 만든 쿠키와 홍차를 들고 직접 들고 와 이원에게 내밀었다. 이원은 서둘러 일어나 트레이를 받아 들었지만 정작 내려놓을 곳이 없었다. 서류와 자료와 책들로 엉망진창인 책상과 바닥들을 난처한 얼굴로 내려보자, 할머니 역시 혀를 끌끌 차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쏟아질 잔소리를 예감하며 무심코 어깨를 움츠리는데, 뜻밖에도 할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이거 좀 치워도 되나?”

침대까지 가득한 서류를 가리키며 할머니가 물었다. 이원은 서류의 위치로 내용을 기억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밀어놓으시면…”

할머니는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서류를 밀어냈다. 겨우 트레이를 놓을 자리를 마련한 이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錫? 내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투박한 쿠키는 제대로 된 모양이 얼마 없었다. 그 중 손이 가는 것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이원에게 할머니가 물었다.

“많이 남았나?”

이원은 그녀가 가져온 따뜻한 홍차를 마셔 입안을 비운 뒤 대답했다.

“재판 과정이 기니까요…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니콜라이는 많이 지친 모양이더구먼.”

할머니의 말에 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재판과정에서 지쳐 떨어지죠.”

아직 판결까지는 요원했다. 즈다노프는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명백한 증거로 혹독하게 그를 몰아세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해.

이원은 심각한 얼굴로 천천히 쿠키를 곱씹었다.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뿐이었다.

카이사르.

매번 재판이 끝날 때마다 그는 나타나 한 가지씩 필요한 실마리나 결정적인 증거를 건네주곤 했다. 마치 습관처럼 계속 된 그의 행동은 어느새 이원으로 하여금 다음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것이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즈다노프의 비리와 갖은 부조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지.

세상의 모든 것은 대가를 치른다. 살면서 수없이 해왔던 경험이다. 이원은 이번에도 역시 카이사르가 알려준 즈다노프의 해임 된 비서의 행방을 쫓아 단서를 찾았다. 그는 이미 해외로 떠났지만 남은 가족들은 그와 즈다노프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말았다. 이것을 이용해 좀 더 파들어가면 뇌물 수수에 대한 정황상의 증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고민해 봐도 니콜라이의 일을 속 시원하게 해결할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챔피언은 잽에 무너진다고 하지만 잽만으로는 효과가 없다.

마지막 카운터가 필요해.

이원은 생각하며 다시금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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