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34)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이 밝았다. 엉망이 된 방 대신 다른 객실로 안내 된 이원은 밤새 뒤척이며 선잠에 빠졌다 겨우 눈을 떴다. 

부석부석한 눈을 문지르며 밖으로 나가자 복도에 슈트를 입은 남자가 서있었다. 한명이 아니었다. 드문드문 남자들이 주변을 오가며 살벌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본 그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방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따라붙은 집사가 직접 그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루스키들의 따끔한 시선 속에 그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걸어갔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이원에게서 등을 돌린 채 앉아있는 카이사르의 뒷모습이었다. 그의 옆에 서서 귓속말로 뭔가를 보고하고 있던 남자는 이원의 모습을 보자 즉각 허리를 펴고 입을 다물었다.

이원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모른 척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원이 자리에 앉자 지켜보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경비를 강화했어."

이미 알고 있다. 복도를 오가는 서너 명의 남자들은 기본에다 식당에도 귀퉁이마다 슈트의 남자들이 서있었다. 이원은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꺼림칙한 얼굴로 식사를 시작했다. 

종일 이런 남자들이 집안을 서성거릴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묵묵히 빵을 잘라 입으로 가져가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말했다.

"그렇게 짜증스러운 얼굴 할 거 없어,경비를 강화한 건 저택의 외부니까. 저택 안은 예전과 똑같을 거야."

이원이 시선을 향하자 카이사르가 덧붙였다.

"외부인의 소행일 테니까 저택의 밖과 정원에 대한 경비만 확실하게 하면 걱정할 건 없어."

이제 됐냐는 듯이 카이사르가 미소를 지었다. 이원은 따라 웃지 않았지만 부동의 자세로 서있던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흠칫 놀라는 것은 여과없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 주변의 동요에는 아랑곳없이 자신을 향해 미소짓고 있는 카이사르의 얼굴에, 이원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카이사르가 출근을 위해 떠나고 나자 과연 그의 말대로 저택 안을 돌아다니던 남자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대신 저택의 밖과 정원을 감시하는 인원은 더 늘어난 것 같았지만 이원은 일단 눈앞에 그들이 보이지 않는데에 만족했다.

어차피 자신은 서재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테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서재에서 나갈 때마다 그런 일을 겪는다고 상상하면 차라리 일이 전부 끝날 때까지 안에 갇혀 있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불편한 상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젓는데,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대답을 기다리듯 잠시 사이를 둔 뒤 문이 열리고, 집사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슬며시 얼굴을 내밀던 그는 이원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듯했다. 이내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 집사가 입을 열었다.

"잠시 쉬었다 하시죠."

그는 이원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트레이를 가지고 들어와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여느 때처럼 차를 놓고 나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의 그는 달랐다.

집사는 이원이 앉아있는 바닥에 트레이를 내려놓더니 똑바로 허리를 펴고 그와 마주 앉았다. 뜻밖의 행동에 이원이 놀란 눈을 뜨자 그는 이원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었다. 

이원은 또 한번 놀랐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언제나 흰 눈으로 이원을 곱지 않게 흘겨보던 그가 갑자기 내비친 태도의 변화에 이원은 선뜻 적응을 하기가 어려웠다. 멀거니 보고만 있는 이원의 반응에 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는, 정말 놀라셨죠?"

쪼르륵, 찻잔에 홍차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사는 잘 우려낸 홍차를 적당히 따른 뒤 이원의 앞에 놓아주었다.

"상처까지 입으시다니,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과를 하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집사님께서 잘못한 일은 없죠. 다행히 없어진 물건도 없으니까..."

집사는 처음으로 이원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집사가 밀어준 홍차를 들고 이원이 말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집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권유를 대신했다. 이원이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이 싸움을 그렇게 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볍게 건넨 칭찬의 말에 이원은 호의를 받아들이고 마주 웃어보였다.

"그냥 몸을 지키는 정도죠. 운이 좋았습니다."

이원의 대답에 집사는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없어진 물건은 없었습니까?"

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중요한 서류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행이죠."

집사는 가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렇습니까..."

이원은 다시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문득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홍차를 너무 우렸나. 집사가 끓이는 홍차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카이사르를 떠올렸을 때,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이원이 미간을 모은 채 눈을 깜박였다. 섬뜩한 침묵이 흐르고, 집사가 미소를 지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문득 현기증이 느껴졌다. 눈앞의 집사가 둘로 보였다. 순간 그는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갈색의 홍차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이게 대체...?

일어서려던 이원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아차, 하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찻잔을 떨어뜨린 다음이었다. 뜨거운 홍차가 흥건히 쏟아지며 서류위로 길게 퍼져나갔다. 아, 이래서 일하면서 먹는 건 안하려고 했는데.

문득 그는 흐릿한 의식 너머로 생각했다. 곧이어 눈이 감기고, 그는 그대로 서류 위에 쓰러졌다.

정원의 한쪽에 주차한 검은 세단은 시동을 끈 채 침묵하고 있었다. 숨막히는 침묵은 차 안에도 가득했다. 잔뜩 긴장한 채 숨을 죽이는 남자의 뒤로 매캐한 시가의 연기가 퍼져들었다.

운전석에 앉아 예민하게귀를 기울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흠칫 놀랐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통해 상황을 들은 그가 룸미러를 통해 뒤를 보았다.

"차르, 쥐가 치즈를 물었습니다."

후, 하고 길게 연기를 뱉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룸미러에 비친 백금발의 남자가 희미한 냉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좌석에 깊숙이 앉아 시가를 피우고 있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쥐를 잡으러 가볼까."

어디야, 어디 있지, 분명히 이 안에 있을 텐데.

집사인 이고르는 서둘러 서류를 뒤적였다. 닥치는 대로 서류를 집어헤치고 서랍을 뒤적였다. 분명 어딘가에 숨겨놨을 텐데, 황급히 몸을 돌리던 이고르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정강이를 움켜쥐고 웅크린 그의 시선은 원망스레 이원에게로 향했다.

이원은 아직 의식을 잃은 채였다. 독한 약을 썼으니 쉽게 정신을 차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고르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모두 이 남자 때문이다. 처음부터, 죄다 이 남자때문인 것이다.

어서 이 저택을 떠나야 한다. 이고르는 미친듯이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를 뒤졌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튜체프는 진노할 것이고, 자신의 생명은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문득 이고르는 소파 밑에 봉투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고르는 힘껏 몸을 숙여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종이의 두터운 감각이 느껴졌다.

간신히 봉투를 꺼내 황급히 안을 들여다본 이고르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다.

이고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을 때였다.

철컥.

머리 위에서 무거운 쇳소리가 들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이고르는 순간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크게 열린 시야에 삽시간에 주위를 에워싸는 남자들의 긴다리가 비쳐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십여 개의 총구가 똑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사색이 되어 얼어버린 이고르의 귀에 조용한 구둣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고르."

재빨리 옆으로 비켜난 남자들 사이로 카이사르가 걸어 들어왔다. 은빛의 차르가 그를 향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꼬리가 잡히는군."

이고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바럴음소리가 들린다. 몸이 흔들리는 진동 또한 전해졌다. 문득 어릴 때 배를 탔던 기억이 떠올랐다. 엷은 미소를 짓는데, 누군가 머리에 부드러운 키스를 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머니...?

이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부연 사이에 누군가 비쳐들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누군지를 깨닫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깼어?"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이원은 몽롱한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흔들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뭐지...?

상황을 깨달은 것은 얼마간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멍하니 시선을 옮겼던 그는 모포에 감겨 있는 자신의 몸을 먼저 발견했다. 뒤이어 뺨에 닿는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졸린 눈을 들었을 때, 마지막으로 이원은 바로 눈앞에 있는 카이사르의 얼굴을 확인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모포에 휩싸인 몸은 잠시 꿈틀한 것이 전부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이원을 안고 걸어가던 카이사르가 멈칫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당신이... 왜,"

이원은 급하게 물었지만 그것은 생각뿐이었다. 온통 발음이 새고 입이 무거웠다. 말을 하는 게 이렇게 어려웠었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몽롱하고 몸은 자꾸만 가라앉았다.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느라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이원은 신음을 뱉었다. 단편적으로 끊기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했지만 쉽지 않았다. 가는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는 이원의 모습에, 카이사르가 말했다.

"괜찮아, 더 자도 돼."

이원은 억지로 정신을 일깨우며 입을 열었다.

"내릴, 거야..."

"그래, 그래."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주듯 선선히 말하는 카이사르의 대답에 이원은 짜증이 났다. 하지만 더 기분이 상하는 것은 꼼짝도 하기 힘든 자신의 몸이었다.

"어디... 가는, 거야..."

모포에 감긴 채 힘없이 중얼거리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대답했다.

"내 방에."

이원은 반쯤 뜬 눈을 깜박이며 속삭였다.

"몸이, 이상해..."

가늘게 속삭이는 음성에 카이사르가 말했다.

"괜찮으니까 쉬어, 며칠은 그럴 거야."

당연한 듯한 대답에 이원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문득 마지막에 마셨던 홍차가 떠올랐다. 그 안에 뭔가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지독하게 쓴 맛이 나더라니.

이원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며 안간힘을 써 카이사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집사가..."

이원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차를 줬는데..."

"그래, 다 알고 있어."

카이사르는 자신의 팔을 움켜쥔 이원의 손을 놓고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고 자, 처리했으니까. 서류도 무사해."

문득 이원은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뭘까, 이 불쾌감은. 카이사르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 설마, 그런.

"당신... 이미 알고 있었어...?"

힘겹게 꺼낸 말에 카이사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웃었을 뿐이다. 순간 그는 깨달았다. 모두 이 남자가 꾸민 짓이라는 것을.

갑자기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이원은 미끼로서 이 남자에게 이용 되어진 것이다. 배신자를 끌어내고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 도구로서.

그것을 깨닫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더 말이 안 나오는 것은 이런 남자 때문에 고민한 자신이었다. 아이의 머리에 당당하게 총을 꽂을 수 있는 남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태연히 도구로 쓰는 남자. 거기에 이번에는 자신이 이용당했을 뿐이다.

웃으면서 사람을 바보취급하다니.

이원은 화가 치밀어 카이사르의 가슴을 밀어버렸다. 순간 방심한 카이사르가 이원을 놓치고, 놀란 이원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봐!"

카이사르가 외치는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그는 그저 눈을 크게 뜬 채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세상에.

이원은 탄성도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나동그라졌는데도 어떤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순진하게 속아 약을 먹고 이런 꼴이 되다니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숨을 삼키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급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짓이야, 갑자기."

카이사르가 그를 다시 안아들으려 했지만 이원은 힘을 다해 그를 뿌리쳤다. 순간 현기증과 함께 눈앞이 핑 돌았다.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지는 이원을 카이사르는 급히 붙잡았다.

날카롭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크게 꺾인 이원의 머리를 카이사르의 손이 감싸 안았다.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같았다. 이원은 뺨에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에 간신히 눈을 떴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바쁘게 뛰는 맥박이 전해졌다. 마치 마라톤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맙소사, 뇌진탕이라도 일으키는 줄 알았어."

카이사르가 말했다. 하지만 이원은 계속 그에게 안겨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원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그를 밀어냈다.

"놔."

"자꾸 어딜 간다는 거야, 말 좀 들어."

카이사르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현기증으로 뇌가 온통 뒤흔들리면서도 이원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항상 이런 식이지.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당연하고 모두가 옳고 이원은 온힘을 다해 카이사르의 어깨를 밀어내고 간신히 그에게서 벗어났다.

얼떨결에 밀려난 카이사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이원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하지만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있었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몸을 한사코 버텨 이원은 일어섰다. 힘이 풀린 다리가 자꾸만 꺾이려 했다. 이원은 이를 악물고 견디며 한 발을 내디뎠다.

순간 비틀거린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원은 그것을 날카롭게 쳐냈다. 놀란 카이사르의 눈에,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원의 얼굴이 비쳤다.

"혼자... 갈 수, 있어."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되지도 않는 소리하지 마."

이원은 카이사르가 내민 손을 다시 뿌리쳤다. 타오르는 것처럼 붉게 충혈 된 눈과는 달리 평상시와 다름없는 서늘한 음성으로, 그는 입을 열었다.

"정도껏, 해."

악 문 잇새로 이원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필요한 만큼, 썼잖아. 또... 이용할 데가, 남았어?"

카이사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원은 그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본 뒤 다시 고개를 돌린 것이 전부였다. 비틀거리며 천천히 발을 끌고 가는 이원의 모습에, 멍하니 지켜보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 상황에서 네가 가장 적절했을 뿐이야."

이원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입가에는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그래, 어차피.. 너에게, 나란 존재는... 체스의, 말일, 뿐일 테니까."

카이사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원은 시선을 거둬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화가 치미는 것은 카이사르가 자신을 이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차피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않은가.

그걸 알면서도 카이사르 때문에 고민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지. 거친 숨을 내쉬며 간신히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을 때였다.

불쑥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에 이어 긴 팔이 그의 앞으로 뻗어왔다. 곧바로 난폭하게 허리를 붙잡히고, 미처 놀라 숨을 삼킬 여유도 없이 카이사르가 이원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아."

카이사르의 음성은 탁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목덜미에 카이사르의 거친 숨결이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이원이 눈을 깜박이자 그의 어개에 이를 세웠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이 아니었어."

마치 탄식처럼 떨리는 음성이 귓가에 울려왔다. 이원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놓았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카이사르가 고개를 들었다.

황폐한 은회색의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띠고 이원을 응시했다. 이원은 자꾸만 멀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카이사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

간신히 내뱉은 뒤, 카이사르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몸 깊은 곳에서 기어이 토해내듯 힘겹게 말한 카이사르가 입술을 깨물고 이원을 응시하는 것을, 이원은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이용당한 것은 이원인데 오히려 카이사르 쪽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원은 그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보같이.

이원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후회할 짓은 애초에 하지 말란 말이야.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다리에서 별안간 힘이 빠졌다. 놀란 카이사르가 소리치는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원은 곧바로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고요한 방안에 조용한 숨소리가 쌔근쌔근 이어졌다. 약에 취해 아이처럼 잠들어있는 남자의 얼굴을,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득 만지고 싶어져서, 가만히 손을 들어 이마 위에 흩어져있는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때마침 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만지지 말라고 짜증을 내는 것 같아서, 카이사르는 무심코 웃음을 지었다. 그 때였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리자 문밖에서 남자의 음성이 이어졌다.

"차르, 보고 할 게 있습니다."

사무적인 남자의 음성에 카이사르는 가만히 이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다리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차르, 들어가도 됩니까?"

다소 긴장한 음성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카이사르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이원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기다려."

짧게 응답한 카이사르는 남자가 더 이상 자신을 채근하지 않도록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카이사르의 얼굴에서는 가면처럼 미소가 사라졌다. 철저히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부하가 서둘러 허리를 숙이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보고라니, 뭐지?"

부하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명령하신 대로 깨끗이 처리했습니다.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부하의 물음에 카이사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잘라서 튜체프와 다른 녀석들에게 선물로 보내, 카드를 넣어서."

"메시지는 뭐라고 적을까요?"

남자가 다시 묻자 카이사르의 입가에 냉소가 깃들었다. 순간 흠칫한 조직원에게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놓고 간 물건을 돌려준다고."

조직원은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조직원이 이내 모습을 감추자 카이사르는 돌아서서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푹 잠들어있는 이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의 얼굴 가득히 미소가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