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34)

"어서 오십시오. 차르"

입구에서 정중히 인사를 한 남자가 양해를 구한 뒤 카이사르의 몸을 조사했다. 저택의 문앞에 금속탐지기가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언제나 암살에 주의해야 하는 조직의 총수로서는 생일파티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었다.

간단히 조사를 마친 조직원이 깊이 허리를 숙이고, 카이사르는 걸음을 옮겼다. 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있었다. 

정재계의 유력인사는 물론이고 그들의 배우자, 혹은 애인, 혹은 관계를 정의할 수 없는 온갖 사람들이 뒤엉켜 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물론 그 중에서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제법 규모가 되는 조직의 수장들이다.

카이사르는 단신으로 왔지만 부인이나 자식을 데리고 온 경우도 종종 눈에 띄었다. 다른 이도 아닌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생일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날을 위해 이곳에 참석했을 것이다. 러시아 내에서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존재를 무시하고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카이사르 또한 여기에 온 것은 어떤 의미에선 같은 이유였다. 다만 그의 경우는 미하일의 건강을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속셈 또한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손에 든 샴페인 글라스를 천천히 흔들었다. 이성적으로는 정확한 계산을 굴리고 있었지만 이원이 사라진 뒤 제대로 잠을 잘수도 없을 만큼 불안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이 그토록 풍부한 줄은 처음 알았다. 온갖 모습의 이원이 떠올라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도 카이사르는 당장 파티장을 박차고 나가 이원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었다.

조만간 찾게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드미트리의 힘을 빌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최후의 선택이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자 마침 유력 정치인의 딸이 말을 걸어왔다.

카이사르는 건성으로 그녀의 말을 넘기며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어딘가를향해 흘긋거리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카이사르는 그대로 굳어졌다. 설마, 이건 환상인가.

우아한 클래식 턱시도에 화려한 다이아몬드 시계를 차고 말끔하게 머리를 넘긴 그의 훤칠한 모습은 누가 봐도 눈에 띄었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든 샴페인에서는 끝없이 기포가 올라오고, 슬쩍 잔을 기울일 때마다 황금빛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갔다.

이원은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모여 있는 공작새들을 무심한 눈길로 훑어보았다.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왠지 놀랍거나 신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입으로는 웃으며 눈으로는 상대를 탐색하기 바쁘고 농담처럼 상대를 깎아내리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교만을 드러냈다.

이원은 이런 속물들의 자리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빨리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빈티지 라벨이 붙은 샴페인보다 할머니가 직접 담근 시큼한 정체모를 술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내가 그쪽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겠지.

무심히 생각하던 이원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레프라는 이름의, 미하일의 오른팔과 같은 남자였다. 누가 보아도 과잉충성이나 다름없을 만틈 열렬한 존경심을 드러내는 그는 이 자리가 누구보다 기뻐보였다.

"도련님."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온 레프가 짧게 머리를 숙였다.

"곧 로모노소프 씨의 연설이 있을 겁니다. 혹시 찾으실지 모르니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이원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프는 이원의 대답을 확인한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누가 봐도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섞여있으니 당연히 이상해보이겠지. 이원은 나름대로 그들을 이해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샴페인을 입안으로 기울였을 때였다.

갑자기 난폭하게 어깨를 붙잡혔다. 이원은 순간 놀라 글라스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길쭉한 잔이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하고, 그와 함께 황금빛의 투명한 액체가 파도처럼 일렁이며 공기 속을 유영했다.

유리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를 들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사람들이 놀라 그들을 돌아보았지만 이원은 깨닫지 못했다. 사색이 된 남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이사르?"

무심코 이름을 부르자 그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이원은 영문을 모른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 남자가 여기 있는 걸까? 무슨 볼일로 마피아 가문들도 파티에 참석한 모양이지만 간부도 초대가 되었나? 멍하니 생각을 떠올리는데 카이사르가 악 문 잇새로 내뱉었다.

"너 뭐야?"

다짜고짜 내지른 음성에 이원은 의아해하며 눈을 깜박였다. 카이사르가 계속해서 빠른 말투로 그를 다그쳤다.

"어떻게 된 거냐고. 왜 여기 있어?!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감쪽같이 없어졌다 싶더니 이런 곳에서 대체 뭘하고 있는 거냐고!"

거칠게 내뱉는 질문에 이원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뒤늦게 자신이 그에게 전화 한 통 없이 며칠 동안 잠적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이원은 눈앞의 남자가 이렇게 화를 내며 펄펄 뛰는 이유를 이해했다.

"미안해. 사정이 있어서..."

미처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을 정도의 급박한 사정이었지만 카이사르에게 이해를 시키기엔 무리였다. 게다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까지 연이어 떠올랐다. 

이원은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아들인 것이다. 이원이 그것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수시로 목숨의 위협을 받아왔다는 카이사르. 그리고 그를 노려왔던 로모노소프.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원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황급히 상황을 정리한 이원은 서둘러 카이사르의 팔을 잡았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중요했다.

"얘기는 나가서 하고..."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

카이사르는 이원의 손을 뿌리치며 다짜고짜 화를 냈다.

"게다가 그 꼴은 뭐야? 왜 네가 그런 꼴을 하고 여기 있어, 여기가 어떤 곳인지는 알아?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냐고!"

다그치듯 묻는 카이사르의 말에 이원은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실랑이를 할 때가 아니었다. 이원은 속을 눌러 참고 다시 한번 말했다.

"나중에 하자니까, 그보다 넌 여기 왜 온 거야? 볼일 다 봤어? 별 거 없지? 나가자."

카이사르보다 더 빠르게 말을 이은 이원이 그르이 팔을 붙잡았다. 그대로 사람들을 뚫고 나가버릴 생각이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 순간 홀의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많은 조명 중 하나가 반짝 빛을 내더니 좀 안 쪽의 낮은 무대를 비췄다. 곧이어 모습을 보인것은 미하일이었다.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이원은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를 놓고 박수를 쳤다. 카이사르 또한 내키지 않는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미하일이 마이크를 받아 인사말을 시작했다.

"바쁘신 와중에 이 자리에 와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더욱 뜻 깊은 생일이 될 것 같군요..."

이원은 어두운 틈을 타 홀을 나가기로 했다. 다시 카이사르의 팔을 붙잡는데, 불현듯 미하일의 음성이 귀에 들어왔다.

"...그간 제 건강을 염려해주신 분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미하일은 무대를 내려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반비례해 작아졌다. 이원은 똑바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미하일의 모습에 놀라 숨을 죽였다.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미하일의 걸음에 맞춰 그를 비추는 조명이 따라 움직였다. 순간 달아나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을 때, 미하일이 이원의 앞에 섰다. 

곧바로 조명은 이원과 미하일의 위로 쏟아졌다. 당황해 그를 보고 있는 이원에게 환한 미소를 지은 미하일이 갑자기 두 팔을 내밀어 그를 끌어안았다.

사람들이 놀란듯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고, 이원은 그대로 굳어졌다. 미하일이 한 팔로 이원을 안은 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숨겨왔습니다만, 실은 제게도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위험이 있어 다른 나라에서 자랐지만, 앞으로 저와 이곳에서 지낼 예정입니다."

뭐라고?!

이원은 상상도 못했던 일에 놀라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은 카이사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 채로 돌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는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는 가운데 미하일은 장승처럼 굳어져 서있는 카이사르를 발견했다.

"마침 세르게예프의 후계자도 있었군."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이고, 이원 또한 보았다. 멍하니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얼굴을, 미하일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아들의 좋은 경쟁상대가 되어주게. 차르."

...뭐?

이원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미하일이 자신을 당치도 않은 말로 소개할 때보다 더 놀라웠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는 이원의 앞에서 카이사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은 이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하일이 활짝 웃으며 이원의 어깨를 자랑스럽게 두드리는 동안, 둘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망할 영감탱이.

이원은 이를 갈며 어두운 거리를 퍽퍽 걸어갔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바보같이 이용당하다니, 노인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자신이 나빴다. 결심했을 때 바로 나왔어야 했는데.

이원은 욕설을 내뱉으며 난폭하게 걸음을 옮겼다. 파티가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이원은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과 시선 속에 당황하다 간신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나마 그곳을 벗어난 것은 다행이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남아있었다.

얼굴에 한 방을 먹여줬어야 하는 건데.

이원은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갑작스럽게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몰린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미하일 근처에도 사람들은 바퀴벌레처럼 모여 있었다.

결국 움켜쥔 주먹이 허무하게 그대로 나와버렸다. 등뒤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무시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속이 끓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씩씩거리며 걷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이원은 어느새 천천히 생각에 잠겨 걷고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 걸까? 이원은 생각을 되짚어봤다.

자신이 느끼는 것은 미하일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대한 분노만은 아니었다.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은 다른 이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축하를 해줄 셈이었던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 이원은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가늘게 내뱉었다.

난, 조금은 기대했던 건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가로등 밑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공동주택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싫건 좋건 이 길을 지나치지 않으면 안 됐다.

누군가 작정을 한다면 얼마든지 여기서 마주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카이사르가 그렇듯이.

이원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발소리에 고개를 돌린 카이사르가 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이사르였다.

"...어떻게 된 거야?"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이원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안도감과 함께 불안이 찾아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원은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긴, 들은 대로지. 미하일 로모노소프가 내 아버지야."

순간 카이사르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원은 그가 지금까지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두터운 가죽장갑을 낀 손을 천천히 쥐었다 편 카이사르가 말했다.

"언제부터?"

우스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원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글쎄, 태어나면서부터겠지."

예리하게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카이사르가 이를 악물고 이원을 노려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한 거였어?"

뜻밖의 말에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로모노소프의 후계자였다니, 전혀 몰랐어. 지금껏 날 보면서 비웃고 있었겠군, 안 그래?"

"비약하지 마."

이원의 신경질적인 응대에 카이사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가 싶더니 곧바로 그가 손을 뻗었다. 강한 손이 갑자기 이원의 목을 움켜쥐고, 순간 이원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럼 변명해 봐."

이원의 목을 한 손에 거머쥔 채 카이사르가 날카롭게 내질렀다.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날 설득할 수 있게. 뭐든 믿어줄 테니까."

목을 쥔 손은 진심이었다. 당장 힘을 줘 이원의 숨통을 끊어버릴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카이사르의 무서운 시선만으로도 이원은 충분히 그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위협과 예감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이원은 로모노소프의 아들이었고, 후계자는 아니지만 이제 와서 그런 얘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일부러 숨기려고 했던 건 아냐."

이원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단지 말할 기회가 없었어.  ...그게 다야."

카이사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어두침침한 가로등 아래에서 이원을 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문득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이원의 목을 졸라 버릴 것인지, 그냥 둘 것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카이사르의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졌다. 이원은 생명의 위기를 느끼면서도 그저 카이사르를 발라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카이사르가 손끝에 힘을 주었다. 무심코 통증에 이원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카이사르는 입술을 깨물더니 갑자기 이원을 밀어내버렸다.

갑작스럽게 밀쳐져 중심을 잡지 못한 이원이 크게 비틀거렸다. 카이사르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돌아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통증이 느껴지는 목을 문지르며 이원이 고개를 들었을 때, 벌써 카이사르는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콰앙!

거칠게 문을 열어 제치고 들어오는 소리에 벽난로 앞에서 불을 쬐고 있던 드미트리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개량 된 응접실의 문 너머로 카이사르가 난폭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카이사르."

반갑게 응접실을 뛰쳐나간 드미트리였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미처 카이사르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똑바로 앞을 보고 걸어가는 그의 얼굴은 그 어느때보다 무시무시했다.

드미트리조차도 심장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사이였지만 그에게 말조차 걸어보지 못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다급하게 ㄱ의 뒤를 쫓아가며 시중을 드는 집사의 얼굴조차 고드름처럼 얼어있었다.

울음을 터뜨릴것처럼 사색이 되어 열심히 달려가는 집사의 모습을, 드미트리는 어리둥절해져 바라보았다.

저렇게 전신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카이사르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무심코 팔을 문질렀던 드미트리는 뒤늦게 카이사르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황급히 방에서 뛰어나오는 집사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밤 악몽을 꿀 게 분명한 집사의 뒷모습에 드미트리는 조의를 표했다.

방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아마 집사가 미처 닫지 못하고 가버린 것이 분명했다. 드미트리는 열린 문틈으로 카이사르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카이사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가에 우뚝 서서 밖을 바라보고 섰을 뿐이었다. 그의 손에 위스키 스트레이트가 담긴 글라스가 들려있는 것을 본 드미트리는 슬쩍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집사가 하얗게 질려서 나가던데."

평소처럼 놀리는 말투가 아닌 사뭇 진지한 말투로 물었지만 카이사르는 대답이 없었다. 이를 악문 채 창밖을 노려볼 뿐이었다.

"거기 뭐가 있어?"

드미트리가 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카이사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용건은?"

서늘한 음성에 드미트리가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보고를 할 게 있어서 왔어. 그런데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군."

드미트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농담을 했다.

"항상 옆에 끼고 있는 변호사는 어딨어? 안 보이던데."

그 순간 갑자기 카이사르가 무서운 눈으로 드미트리를 노려보았다. 사람을 눈빛으로 죽일 수 있다면 너덧은 가뿐이 죽여 버릴 것 같은 눈빛에 흠칫 놀란 드미트리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알았어, 간다고. 간다니까."

손까지 흔들어 보인 드미트리가 재빨리 방에서 나가싿. 슬쩍 문을 닫으며 돌아본 카이사르의 두시모습은 분노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드미트리는 복도를 걸으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휴대전화의 버튼을 눌렀다.

"그래, 알아 봐. 오늘 로모노소프의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엇는지. ..그래."

잠시 뒤 드미트리가 접하게 된 소식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빠르고 간결하게 상황을 전한 부하는 생각지 못한 정보를 내놓았다.

"뭐라고?!"

드미트리는 무심코 날카롭게 내질렀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는 잠시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유능한 부하는 간략하게 로모노소프의 아들에 관한 정보도 제공했다.

ㅡ 로모노소프의 아들이 차르의 일을 돕던 바로 그 변호사입니다. 

아마 변호사는 최근에야 그런 사실을 안 게 분명했다. 깊이 생각에 잠겨있던 드미트리가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꽤 쓸만하겠군...

드미트리의 가늘게 뜬 눈이 섬뜩하게 빛을 냈다.

밤새 잠을 설치고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이원은 부석거리는 눈을 문지르며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매트리스가 딱딱한 침대는 제법 익숙한 것이었지만 오늘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단 며칠 동안 머물렀던 침대의 부드러움에 벌써 몸이 적응한 걸까? 나름으로는 상황에 대한 분석을 해보지만 그것은 그저 습관에 불과할 뿐,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이원은 침대에 앉은 채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생각은 있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유는 그가 밤새 잠을 설친 이유와 같았다. 이원은 한동안 멍하니 그렇게 앉아 있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켜봤지만 기어이 숨결은 입가로 비집고 나왔다.

한숨을 쉬는 것은 취미가 아닌데도 최근 한숨이 늘었다. 역시 이유는 뻔했다.

밤새도록 자신을 괴롭히던 카이사르의 눈동자가 되살아났다. 그는 명백한 증오를 담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변명을 했더라면 좀 나았을까.

이원은 뒤늦게 후회를 해봤다. 달라질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세수를 했지만 여전히 정신은 몽롱할 뿐이다. 거울 속의 자신이 그를 마주 보았다. 흥건히 젖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어딘지 일그러져 보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소리에 이원은 고개를 돌렸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머리를 내밀었다.

"손님이 왔어."

"네?"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섰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보고서야 비로소 이원은 자신이 되지도 않을 기대를 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하일은 처음 봤을 때처럼 말쑥한 신사처럼 꾸미고 그의 앞에 서있었다. 이원은 급격히 미소가 사라지는 자신의 얼굴을 느끼며 그를 마주 보았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여기로 오지.

미하일의 말대로 미술관은 묘하게 사람을 진정시키는 장소였다. 이원은 미하일과 함께 그림에서 그림으로 걸음을 옮기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걷고 있던 미하일이 걸음을 멈춘 곳은 렘브란트의 그림이 있는 장소였다.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이 작품에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

이원은 그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무릎을 꿇은 아들과 그런 그를 위로하는 아버지의 그림이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이원에게 미하일이 말을 이었다.

"어둠속에서 혹독한 시선을 향하고 있는 형들과 빛을 받으며 아들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대조가 상당히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역시 빛과 어둠이 있으면 죄와 용서가 있는 법..."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원은 그림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림을 보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아직 화가 많이 나있는 모양이구나."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시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심코 퉁명스럽게 나오는 음성에 미하일은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원은 내심 무안해졌지만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너마저 날 떠날까봐 그랬다."

조용한 음성에 이원은 멈칫했다. 미하일은 여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계속 돌아가겠다고 하니까, 딴에는 강경책을 쓴다는 게 그만 지나쳤나 보구나. 미안하다.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었단다."

풀이 죽은 노신사의 모습을 보자 이원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혹시 일부러 알고서 이러는 게 아닐까, 이런 모습에 내가 흔들린다는 걸.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가 탐나기도 했었고."

뜻밖의 말에 이원이 눈을 깜박이자 미하일은 말을 이었다.

"너에 대해 많은 걸 들었단다. 무척 탁월한 변호사라고 사람들이 말하더구나. 직접 데리고 있어보니 소문보다 더 훌륭한 청년이었지."

미하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내 뒤를 이어줬으면 했다...."

"싫습니다."

즉각 거절하자 미하일은 호탕하게 웃었다. 어딘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웃음소리에, 이원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미하일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역시 네 엄마를 꼭 빼닮았구나. 그 사람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가차없이 거절했었지."

미하일이 추억을 더듬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네 엄마한테서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처음 내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그녀는 진저리를 쳤었지. 난 내 사랑을 받아달라고 아리아까지 불렀단다."

하지만 당시의 괴로움마저도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미하일은 씁쓸한 얼굴로 이원을 바라보았다.

"수연이와 함께 네가 크는 걸 봤더라면 좋았을 걸."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하일의 얼굴에 후회란 없었다. 단지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그 모습으로 이원은 눈치챘다. 같은 상황이 되면 아버지는 또다시 그들을 떠날 거라는 걸.

"왜..."

이원은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미하일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원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끄러미 이원을 바라보던 미하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어차례 두드렸다.

"그래도 한번 생각해 보거라."

함께 미술관을 나오며 미하일은 한 번 더 권유했다.

"언젠가 히미을 필요로 하는 날이 올 거다. 그때는 네게 힘을 빌려주마."

"싫습니다."

이원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남을 짓밟는 힘은 원하지 않습니다."

"지키기 위해서는 짓밟는 힘도 필요한 법이다."

순간적으로 내비친 그의 냉혹한 얼굴에, 이원은 미하일에게서 카이사르와 동류의 빛을 봤다. 그도 역시 피를 밟고 살아온 남자였다. 물씬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은 듯한 착각에, 이원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제가 그 힘을 원할 일은 없습니다."

"글쎄."

미하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세상 일은 장담하지 않는 법이란다, 아들아."

그의 마지막 말에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시야 끝에서 베레모를 쓴 몸집이 작은 남자가 걸어왔다. 어디나 있는 평범한 모습의 남자인데 이상하게 그는 이원의 시선을 끌었다.

이원은 무심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발걸음으로 그는 다가왔다.

하지만 왠지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고도로 계산 된 것으로 보였다. 내가 과민한 걸까...? 이원이 생각했을 때, 불현듯 그가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남자가 코트에서 손을 꺼내고, 그 안의 금속이 차가운 빛을 내며 시야에 들어왔다. 아, 짧은 숨결을 뱉어냈을 때, 남자가 속삭였다.

"죽어라, 로모노소프."

동시에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고, 총은 이원을 향해 겨눠졌다. 이원의 크게 뜬 시야에 차가운 금속의 총구가 들어오고, 미하일이 뭔가 소리치며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귓가에 천둥처럼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앙ㅡ

섬뜪한 소리가 고막을 갈라놓았다. 이원은 눈을 크게 뜬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묘하게 세상이 정지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잿빛 하늘이 그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바닥이 일제히 일어서 달려든다. 그를 에워싼 공기가 앞을 다투어 폐를 압박한다...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났을 대, 습격을 한 남자는 이미 없었다. 이원은 당황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에게는 손 끝 하나 다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대답은 곧 알 수 있었다. 발치에 쓰러져 있는 반백의 노신사를 본 순간,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아."

껄끄러운 목소리가 기도를 억지로 비집고 나왔다. 이원은 자신이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당혹해 하면서도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당황한 이원이 굳어지자, 미하일이 손을 내밀었다.

"다친 곳은... 없는 거냐?"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한 음성에 이원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곧 구급차를 부를 테니 말하지 마세요."

당혹해하며 말하는 이원에게 미하일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무사하면 됐다."

거기까지였다. 미하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이원은 그의 몸에 밴 핏자국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작은 얼룩이었던 그것은 금세 넓게 퍼져 꽃처럼 일어섰다.

당황한 이원이 머뭇거리는 사이 계속 된 출혈로 미하일의 몸 아래에는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원은 뒤늦게 놀라 소리치고 말았다.

"누가, 구급차를... 응급환자입니다. 구급차를 불러주세요!"

다급한 외침에 지나던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원은 미하일을 붙잡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제 아버지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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