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끊이지 않던 눈발이 잠시 주춤했다. 덕분에 결항되었던 비행기들은 바쁘게 하늘을 오가며 운항을 계속했다. 일찍부터 공항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조직원들은 흠끌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연신 시간을 확인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는 일제히 한곳으로 시선을 향하고, 뒤어어 한무리의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사샤, 다녀오셨습니까!"
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유리히에게 사샤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두 여긴 무슨 일이지?"
기계음처럼 억양의 고저가 거의 없는 음성에, 모두는 서로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저, 그게, 모셔가려고 기다렸습니다."
말할 수 없는 위압감에 잔뜩 긴장하며 더듬거리는 그들을, 사샤는 차가운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별일이군."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선뜩 걸음을 옮겼다. 희끗희끗한 은발을 단정하게 빗어넘긴 매끈한 슈트 차림의 남자는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다. 한 팔에 코트를 건체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자와 그 뒤를 우르르 쫓아가는 검은 슈트의 무리에, 지나던 사람들은 호기심과 두려움을 드러내며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사샤가 대기하던 세단에 오른 뒤, 일제히 머리를 숙였던 조직원들이 바쁘게 뒷차에 뛰어올랐다. 곧 사샤가 탄 세단이 출발하고, 뒤이어 검은 중형차들이 줄을 지어 달려갔다.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세단의 등받이에 몸을 묻은 사샤의 옆얼굴을 유리히는 조마조마해하며 훔쳐보았다.
"저, 사샤. 오시면서 들으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래서."
사샤는 눈을 감은 채 좌석에 기대어 말을 이었다.
"후계자가 죽었으니 자신을 2인자로 옹립해달라는 얘기가 아닌가."
유리히는 조마조마해하며 눈치를 살폈다.
"실은, 사샤. 조직 내에서 많은 말들이...튜체프가 차르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래서."
유리히의 더듬거리는 말을 가로막고 사샤가 입을 열었다.
"죽었나?"
"네?"
화들짝 놀란 유리히에게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는 말했다.
"차르가 죽었느냐고 물었다."
"아, 아뇨. 그게, 시신을 본 사람이 없어서... 경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없앴다는 말도 있는데, 아시겠지만 시체를 없애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주저하며 이어지는 말에 사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주저하며 눈치를 살피던 유리히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귀찮게 하는군."
"사, 사샤?"
유리히는 당황해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사샤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알겠스비낟.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튜체프는 전화를 끊고 기다리던 간부들을 향해 돌아섰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에게, 튜체프가 입을 열었다.
"사샤가 돌아왔다고 하오. 지금 유리히가 공항에서 뫼시고 오고 있소."
간부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튜체프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절대 돌아갈 수 없소이다. 어떻게든 우리의 뜻을 관철시켜야 하오."
힘을 주어 말했던 튜체프가 곧바로 말투를 누그러뜨려 말했다.
"물론 뜻을 합해준 동지들에게는 은혜 잊지 않겠소."
잔뜩 긴장했던 간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튜체프는 내심 만족해하며 생각했다. 이걸로 다 된 셈이나 마찬가지야.
승보갛지 않고 버티는 간부나 조직원에 대한 리스트는 이미 작성해 두었다. 오늘 사샤가 튜체프를 후계자로 인정하는 순간 대대적인 숙청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르게예프의 2인자가 되는 것이다.
드디어.
튜체프는 어두운 얼굴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일선에서 물러났던 보스가 귀환한다는 말에 조직 내 간부들은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작당해 후계자를 없앴으니 남은 건 새로운 후계자를 지정하는 것뿐이다. 모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새로운 후계자를 지명하는 자리가 될 거라고.
간부들은 눈부신 세단을 타고 조직의 사무실로 속속 모여들었다. 오랜만에 출석을 한 간부와 갓 승격이 된 간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모두 튜체프의 든든한 후원자들이었다. 튜체프는 한 차례 실내를 둘러본 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다. 모두가 계획대로였다.
이 중 그의 편이 아닌 자는 아무도 없었다. 튜체프는 확신했다. 이 숫자라면 아무리 사샤라고 해도 압력에 굴복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왜 드미트리는 안 오는 거요?"
드넓은 회의실에서 칵테일과 함께 회의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한 간부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다른 간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볼일 다 보지 않았소. 내버려두시오. 간부가 아닌 자가 끼어봤자 분위기만 망치오."
"그렇소이다. 사샤의 비위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어찌 될지, 난 자신 없소."
그 말에 모두가 술렁이며 동조했다.
"사샤는 아직 조직 내 지지자가 많아요. 잘 다루어야 할 겁니다."
잔뜩 긴장한 누군가의 말에 또다른 누군가가 동조했다.
"사샤 본인의 실력도 무시할 수 없지요. 차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아닙니까."
"사실 평생 다신 안 보고 싶소이다."
누군가의 솔직한 고백에 모두는 창백한 얼굴로 술렁였다. 튜체프는 일을 꾸밀 때와는 달리 너무나 소심한 간부들의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이제 와서 다들 왜 꽁무니를 빼는 거요! 이제 되돌아갈 길은 없소, 모두가 같은 배를 탄 셈이란 말이요!"
버럭 호통을 치는 말에 간부들은 이내 꼬리르 내렸다. 튜체프는 남몰래 이를 갈며 생각에 빠졌다.
사샤. 현재 세르게예프의 보스
그가 인정하지 않으면 조직 내 지위는 모두 허사가 된다. 조직을 승계하기 위해서는 기필코 그의 인가가 필요해...!
굳게 결심을 했을 때였다. 밖에서 지키고 있던 조직원이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뛰어들어왔다.
"사샤가 지금 막 차에서 내렸습니다."
간부들이 모두 일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침내 그들 앞에 알렉산드르 세르게예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수군거리던 간부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사샤는 그들을 지나쳐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침묵에 잠긴 넓은 회의실에 그의 발소리만이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실내는 고요했다. 모여 앉은 간부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최상석에 앉은 사샤는 입을 다문 채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묵묵히 기다리던 사샤는 입을 열었다.
"자리가 많이 비는군."
사샤가 몇 년만에 나타나 처음으로 한 말은 그것이었다. 간부들은 황급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작은 소리로 말을 맞췄다. 허둥지둥 소곤거리는 그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튜체프가 입을 열었다.
"몸이 안 좋다고 빠진 간부들이 몇몇 있습니다. 회의의 내용은 따로 보내줄 생각입니다. 사샤께서 오셨다고 전했는데도 도무지... 간부들까지 이러니 조직을 운영하는 것이 상당히 힘이 듭니다."
튜체프는 기회를 틈타 운을 뗐다. 오지 않은 간부들이 카이사르의 추종자라서 일부러 연락을 주지 않은 거라는 걸, 사샤가 알게 뭐란 말인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덧붙인 튜체프의 발언에, 서로에게 사인만 보내던 간부들 중 한 명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 사샤. 실은 현재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조직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빠른 후계자 선택이 필요한 상황이라..."
조심스러운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말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사샤가 조직을 맡기고 떠난 이후 말이 아니오. 머물 것이 안라면 후계자를 정해주시오."
"간신히 조직을 유지하는 것도 이젠 한계란 말이외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요? 우리 얘기가 안 들리는 거요, 무시하는 거요?"
점차 격앙된 음성이 흘러나왔으나 사샤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얼굴로 한 차례 그들을 둘러본 것이 전부였다. 한참을 떠들어대던 간부들은 이어지는 무응답에 얼마 못 가 지치고 말았다.
쏟아지는 불만이 잦아들 때쯤, 사샤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칼처럼 예리한 음성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누굴 후계자로 원하는 건가."
그 말에 모두는 황급히 시선을 교환하고, 튜체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의 뜻으로, 내가 그 자리를 맡으려 합니다. 허락해 주시오."
자신만만한 얼굴로 튜체프는 선언했다. 간부들은 잔뜩 긴장해 박수를 쳐야 할지 비난을 해야 할지 선택을 기다렸다.
모두가 사샤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데, 물끄러미 튜체프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좋겠지."
뜻밖의 선선한 대답에 모두는 반색을 하는 한편 어리둥절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사샤는 서늘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조직이란 힘의 세계. 불참한 간부들은 기권으로 간주하고 현재 간부들 중에서 네가 가장 유력하다면 그걸로 좋다, 힘으로 빼앗았다면 당연히 가져야지. 승인하겠다, 튜체프를 후계자로."
간부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유야무야 휩쓸리고 있던 간부들의 얼굴은 당황으로 굳어지고, 튜체프의 입장에 선 자들은 환호했다. 그 중 가장 만족해하는 이는 뭐니뭐니해도 튜체프였다.
살집이 가득한 뺨에 기쁨을 드러내며 그는 추종자들과 악수를 나눴다. 이제 조직은 내 것이다. 버릇없는 애송이 따위, 지옥에서 썩어버려라.
그 순간 그는 세상의 왕이었다.
"강한 자가 왕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제가 되겠군요."
불현듯 들려온 음성에 모두는 일시에 놀라 한 곳을 바라보았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반짝이는 플라티나 블론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회의실의 분위기는 돌변했다.
곧이어 숨을 삼키는 소리와 반색을 하는 소리들이 이어지고, 조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샤의 한쪽 눈이 은밀한 빛을 내며 그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감돌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죽은 줄 알았던 후계자였다.
황제라는 이름을 가진 자. 카이사르
젊었을 때의 사샤를 그대로 빼닮은 차르가 그들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예전과 다름없이 말끔한 슈트 위에 코트를 걸친 채, 그는 돌아왔다. 순식간에 회의실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방금 전까지의 들뜬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었다. 그저 당황해하며 할 말을 잇지 못할 뿐이었다.
"어, 어떻게...?!"
혼란 속에서 사색이 된 튜체프가 말을 더듬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카이사르는 싸늘하게 웃었다. 순식간에 회의실의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버렸다.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는 간부들의 앞에서 카이사르는 직접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간부들은 숨을 죽인 채 그를 지켜보았다. 느긋하게 의자의 팔걸이에 한쪽 팔을 기댄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자, 다시 회의를 시작할까요."
카이사르는 한 차례 간부들을 훑어보았다.
"오늘의 안건은 후계자를 바꾸자는 내용이었습니까?"
조용한 속삭임에 간부들이 숨을 삼켰다. 아무도 그를 위해 나서주지 않는 상황에서 튜체프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는 급히 일어나 주장했다.
"이건 뭔가 흉계가 있는 거요.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죽은 자가 여기 나타날 수 있소!"
여기저기서 술렁이는 움직임에, 카이사르는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후계자 교육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배운 것이 무엇이었는 줄 아는가."
카이사르의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깃들었다.
"바로 적의 숨이 완전히 끊어졌는지 확인하는 거야."
일순 모두에게 동요가 일었다. 튜체프에게 동조한 간부들은 금세 사색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드미트리가 우릴 속였어...!"
누군가가 꺼낸 성급한 물음에 모두는 삽시간에 하나로 뭉쳐 떠들어댔다.
"차르, 우린 모르는 일이오! 절대 결백하오!"
"드미트리가 혼자 꾸민 일이야, 난 절대 모르는 일! 정말이오!"
"드미트리가 오늘 출석하지 않았소, 드미트리를 잡아내야 하오!"
이 쥐떼들이...!
튜체프는 금세 자신을 배신하고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간부들의 모습에 이를 갈았다. 쓸모없는 녀석들. 이렇게 되면 모두 다 해치워버릴 수밖에.
"들어와!"
갑자기 일어난 튜체프가 소리쳤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벽이 열리고, 십수 명의 무장한 조직원들이 그들을 향해 일제히 총구를 들이댔다. 놀란 간부들이 사색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을 보며 튜체프는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자, 이제 어쩔 수 없군요. 평화롭게 일을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기까지 와버렸으니..."
그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여기저기서 간부들이 덩달아 움직이려 했지만 동시에 울려퍼진 조직원들의 안전장치 풀리는 소리에, 그들은 안으로 집어넣던 손을 어쩔 수 없이 다시 내놓아야 했다.
"이제 이렇게 된 거 네가 살았든 죽었든 상관없어."
튜체프는 카이사르를 바라보며 희게 웃었다. 차라리 잘 됐다. 여기서 모두 죽이고 조직은 내가 차지한다. 거슬리는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려. 방해자 따위 이 자리에서 전부 없애주겠어...!
제일 먼저 총구는 사야와 카이사르에게로 향했다.
"누굴 먼저 없애줄까?"
튜체프는 즐기듯이 물었다. 똑바로 자신을 향한 닮은 꼴 부자 중 그는 한 쪽을 선택했다. 그래, 사샤가 좋겠다. 카이사르는 최후까지 남겨두자.
저 거만한 얼굴이 겁에 질리는 꼴을 기필코 봐주리라. 그렇게 생각한 튜체프는 곧바로 사샤를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철컥, 하고 무거운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안전장치가 풀리고,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오직 튜체프의 총만이 사샤를 향해 유일하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튜체프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잘 가시오, 사샤. 그동안 수고했소. 세르게예프 방식으로 죽여주지."
사색이 된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튜체프는 그의 이마 한 가운데에 총을 겨누었다. 그대로 방아쇠를 당긴다. 튜체프는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격앙되고 말았다.
타앙ㅡ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간부들은 물론 그들을 겨누고 있던 조직원들조차 굳어져 그들을 지켜보았다. 사샤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남아있지 않았다. 핏방울 하나 없었다.
모두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그들은 보았다. 건너편 건물의 옥상에서 정확히 회의실 안을 겨누고 있는 수십 명의 스나이퍼들을.
놀란 조직원 중 몇 명이 간부가 아닌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시도를 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조직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튜체프는 눈앞에서 보고말았다.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키워왔던 정예부대의 죽음을.
그러나 악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황해 주춤거리는 사이 벽의 문을 통해 안으로 난입한 사내들이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했다. 그들을 위협하던 조직원들이 삽시간에 무릎을 꿇고, 전세는 바로 뒤바뀌었다.
간부들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숨거나 달아나려다 총을 맞기를 반복했다.
한 차례의 저격이 끝난 후, 회의실에 침묵이 찾아왔다. 등 뒤로 한 무리의 저격수와 조직원들로 이루어진 로모노소프의 군대를 배경으로 한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반역자들은 모두 세르게예프 식으로 처형해주지."
그와 동시에 요란한 총성이 무시무시하게 쏟아지고, 여기저기서 간부들이 비명과 함께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간신히 총탄을 피한 간부들은 놀라 소리치며 책상밑으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총탄으로 배신자들의 몸을 온통 벌집으로 만든 뒤에야 총성은 멈췄다. 카이사르는 발치에 쓰러져 흥건히 피를 흐려내고 있는 튜체프의 몸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품에서 글록을 꺼낸 카이사르가 의자에 앉은 채로 그의 머리에 마지막 한 발을 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튀어올랐던 튜체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됐다.
사샤는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총성이 멈추고, 연기가 가라앉을 즈음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장성한 자신의 아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사샤가 한 쪽눈을 가늘게 떴다.
"너의 각본대로 다 된 거냐?"
느긋한 음성으로 카이사르는 대답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 했습니다."
"새 조직에는 새 간부를... 이라는 뜻인가?"
사샤의 입가에 즐거운 듯 미소가 지어졌다.
"네가 만들어낼 세르게예프가 어떤 것일지 지켜봐야겠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 아들을 내려다본 그가 입을 열었다.
"대관식은 필요없겠지."
사샤는 한쪽 팔에 코트를 걸치고 피가 흥건한 바닥을 밟으며 카이사르의 옆을 스쳐갔다. 그가 한 일은 아들의 한 쪽 어깨를 지나가며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린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날, 세르게예프 내에서는 작지만 큰 세대교체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세르게예프 조직의 간부 대부분이 시체로 돌아갔고, 비워진 숫자는 바로 다음 날 똑같이 채워졌다.
세르게예프의 승계가 무사히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각 조직에서는 앞을 다투어 화환과 선물을 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무실 가득히 쌓인 상자들은 더 이상 넣을 곳이 없어 복도까지 늘어져 있을 정도였다.
레프에게서 소식을 접한 미하일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성공적으로 해냈군...
그는 문득 지난 일을 기억해냈다.
죽음에서 부활해 로모노소프를 찾아온 그 날, 카이사르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로모노소프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의심스러운 미하일의 물음에 카이사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역자들을 속출해 냈으니 이제 처단만 남은 셈이죠."
입가에 냉담한 미소를 짓는 그를 물끄러미 본 미하일이 물었다.
"그래서 그걸로 내가 얻게 될 이익은 뭔가?"
카이사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세상에 둘도 없을 귀한 것입니다. 물론 상품가치도 충분합니다만."
"그게 뭔가?"
연거푸 묻는 미하일에게 카이사르는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미하일이 찌푸린 얼굴로 안을 확인하는 사이 카이사르는 말했다.
"베르다예프의 전 재산입니다."
귀퉁이를 슬쩍 훑어본 게 전부인 채로 미하일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 다분했다.
"내게서 가져간 걸 내게 돌려주면서 거래라고? 이런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내가 받아들일 것 같나?"
"물론 그러실 거라 믿습니다."
"어째서?"
카이사르가 여유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드님의 작품이니까요."
미하일의 표정이 바뀌었다. 물끄러미 봉투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서류는 모두 완성이 됐고 법원의 판결만 기다리는 상태입니다.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카이사르는 일부러 사이를 두었다 덧붙였다.
"물론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습니다."
말없이 서류를 바라보던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이걸 이원이가 했다고..?"
반신반의하면서도 환한 빛을 내는 그의 얼굴에, 카이사르가 말했다.
"이번 협정을 계기로 우호관계를 유지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제안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번의 협력관계는 철저한 계약으로, 이번 한 번으로 모두 끝날 겁니다."
미하일은 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내가 자네에게 스나이퍼를 보내도 된다는 건가?"
분명히 속을 떠보는 질문에, 카이사르는 선뜻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 역시 보낼 거니까."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도 미하일은 이미 자신의 선택이 어느쪽일지 알고 있었다.
맹랑한놈.
조용히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 레프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홍차를 입으로 가져가며 생각에 잠겼던 미하일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세대교체라."
그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해 봐야겠구먼."
"로모노소프 씨?!"
깜짝 놀란 레프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불렀으나 미하일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