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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르웰린 에드윌
눈을 떠 보니 낯선 세상이다.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은 저 문장 하나로도 충분했다. 낯선 천장, 모르는 사람들, 거울에 비친 처음 보는 얼굴. 그래. 여기까지 들었으면 짐작했겠지만,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되어 눈을 떴다.
르웰린 에드윌.
자연스럽게 머리에 새겨진 낯선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며 거울을 보았다. 옅은 금발의 어린애가 내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사정없이 떨리던 보라색 눈동자는 현실을 부정하듯 한 바퀴 뱅그르르 돌아 다시 원래 자리에 안착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어린애답게 통통한 뺨을 가진 거울 속 남자애에게는 제법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아니라 누구라고 해도 다섯 바퀴를 굴러도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넓은 침대에 누워 훌쩍이는 밤을 보냈을 거다. 그래도 나 정도면 적응은 빠른 편이었다고 자신한다.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누구세요?’ 했다가 아버지와 형들의 눈물을 보기도 했고, 거울을 보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소소한 에피소드가 아닌가. 아무렴. 인간은 적응하는 생물이다.
가족들은 늦둥이, 막둥이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르웰린 에드윌을 맹목적으로 아꼈다. 아버지부터 세 형까지 온통 정성이다 못해 극성이었다. 바람 불면 날아갈까, 손대면 깨질까 끼고 도느라 안절부절못했고, 제일 좋은 것을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맹목적으로 쏟아지는 애정과 재화에 나는 순순히 에드윌가 막내의 삶을 받아들였다.
르웰린의 아버지인 에드윌 백작은 막내가 처음 아플 때 옆에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책하며 수도에서 하던 일도 때려치우고 영지로 내려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가족 사랑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문제는 백작뿐 아니라 형제들까지 그랬다는 거다.
큰형인 케일 에드윌은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손에 하나라도 더 쥐여 주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운만 뗀다면 차기 가주 자리도 미련 없이 넘겨주고 뿌듯해할 것 같았다.
셋째 형인 아벨 에드윌은 내가 눈을 뜬 당시 아카데미에 들어가 있어 당장 만나지는 못했지만, 만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쓰러졌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정확히 2주 후. 아카데미를 탈출해 성으로 달려온 그는 나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어설프게 마주 안고 토닥여 주었더니 겨우 멈추려던 눈물이 다시 터졌고, 백작의 손에 의해 아카데미로 끌려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이미 퉁퉁 부은 눈으로 다시 울었다. 연인과 헤어진대도 저렇게까지 오열을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둘째 형, 즉 차남 이야기가 뒤로 빠진 이유는 그가 형제 중에서도 유난스러워 한 문장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탓이다.
“형님.”
“그게 아니지, 르웰린.”
무인이라 그런가. 갓 성인이 된 주제에 장남보다 큰 차남이 나를 고쳐 안으며 다정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내가 갓 태어난 사슴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휘청거리며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아기 짐승 취급을 한다는 뜻이다. 차남이 집에 올 때마다 나는 내 발로 걸을 일조차 없었다. 그는 테디 베어를 드는 것보다 쉽게 나를 안고 다녔다.
그에게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하며 내 마음만 착잡하게 만드는 현실을 직시하자면, 르웰린 에드윌은 고작 여덟 살 된 어린애지만 엄연히 평균의 키와 몸무게를 가졌다. 더불어 깨어난 후 아기 새 먹이 주듯 입에 자꾸 뭘 물려 주는 형제들 덕에 앓는 사이 빠졌던 살이 배로 찐 상태였다. 반가움에 안아 줄 수는 있지만 내내 들고 다니기에는 쉽지 않은 무게라는 것이다.
에드윌가 특유의 자안이 기대에 차 반짝거렸다. 섬세한 속눈썹도 팔랑거리며 내게 대답을 종용했다. 나는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을 애써 넘기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차남보다는 역시 장남이 낫다. 그는 내게 뭔가를 주지 못해 안달이었지, 어떤 것도 요구하지는 않았다. 차남이 얼른 출장이나 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그가 원하는 대로 귀여운 동생 역할을 수행했다.
“형아.”
원하는 답을 들은 그가 크으윽,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수치스럽다. 몸은 여덟 살 어린애라고 해도 안에 들어 있는 건 서른을 앞둔 멀쩡한 남자였다. 제정신에 ‘형아.’ 따위의 단어를 입에 담자니 가슴이 쿡쿡 찔렸다. 양심인지 자존심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내려 주세요.”
“응?”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시침을 뗐다. 오히려 머리카락 위로 입술을 내리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현을 해댔다. 염병, 진짜. 지금이야 어려서 이런다지만 크면 어쩌려고 이러냐. 나는 나를 제외한 세 형제의 관계를 생각했다.
첫째부터 셋째까지. 에드윌가 형제들은 각각 후계자, 기사, 학생(셋째가 정확히 뭘 배우러 아카데미에 가 있는 것까지는 몰랐다.)으로 귀족가 자제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로에게 의무와, 책임감을 느꼈고, 가족으로서 애정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교양을 갖춘 형태였다는 뜻이다. 장남과 차남은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았지만, 허물없이 형, 동생 하지는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막내였던 셋째에게도 ‘오랜만이구나, 아벨.’ 정도의 인사를 꺼내며 가벼운 포옹을 했어도 나에게 하듯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달려가 끌어안지는 않았다.
역시 어린애에게 약한 게 틀림없다. 그렇게 어린애가 좋으면 어서 장가가서 애를 낳을 것이지 왜 동생에게 이러고 있느냔 말이다. 어차피 나는 곧 쑥쑥 자랄 테고, 그러면 전과 같은 귀여운 동생은 남아 있지 않을 텐데.
몇 년이 지나면 자신이 했던 애정 행각을 떠올리고 수치스러워할 형제들을 떠올리자 웃기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웠다. 최대한 그들의 태도에 맞춰 사랑스러운 막내 역할에 어울려 주는 건 그 때문이다. 어차피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남자애들은 10대 중반에만 들어서도 금세 체취가 짙어지고 땀 냄새가 날 거다.
아무래도 차남은 오늘도 나를 내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포기하고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확실히 운동을 하는 몸이라 가슴이 남달랐다. 장남과 아버지의 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안정감에 잠이라도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남, 레오폴드 에드윌은 그 모습이 썩 기꺼웠는지 디저트를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음, 수도에서 사 온 초코 에클레어군. 마법석을 통해 왔으니 세 시간 정도 걸렸을 텐데, 아직 차가운 걸 보니 보존 마법까지 걸어 둔 모양이다. 하여간 정성이다. 에드윌 성에 고용된 파티시에의 솜씨와는 또 다른 맛을 음미하며 오늘도 멋대로 구는 차남에 대한 점수를 조금 추가했다. 물론, 이미 마이너스가 된 지 오래지만.
“이번에는 무슨 맛을 줄까?”
“딸기요.”
3분의 1 정도로 조각난 딸기 에클레어가 입에 쏙 들어온다.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다양하게 먹고 싶은 어린애를 위한 배려가 돋보인다. 단맛은 긍정적인 사고를 돕는다. 나는 차남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다짐했다. 그래. 앞으로 몇 년 안 남았으니까. 그때까지만 즐기자.
*
그렇게 내 표정과 손짓 하나에도 호들갑을 떨며 집중해 주는 가족들의 품에서 여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황성에서 일하는 장남과 차남은 값비싼 마법석을 펑펑 사용해대며 집으로 퇴근했고, 삼남은 조기 졸업으로 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나마 아버지는 가주의 위엄을 보였지만 내가 ‘아빠’라고 부르면 헤벌쭉해지는 것이나, 장남과 차남이 출근한 사이 나와 시간을 보낸 후 그들에게 자랑하는 것을 몇 번 목격한 탓에 이미지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하여간 육아에 재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들. 내가 정말 어린애였다면 어떻게 할 뻔했는가.
나를 거스를 자 없는 에드윌 성에서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았겠지. 그나마 자신의 영지에서만 그렇게 살면 다행인데, 조금 더 커서 밖에서도 그러고 다니면 답이 없다. 다행히 나는 상식 있는 사회인이었고,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고집과 귀여운 투정을 구분할 줄 알았다.
미래 계획은 딱히 없지만, 없어도 되지 않을까? 집에 돈도 많겠다, 형제도 많겠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어떻게든 되겠지. 풍족한 생활에 취해 현실 감각을 잊은 내 인생이 뒤바뀐 것은 열 살이 되던 해였다.
“황성이요?”
“그래.”
생일을 막 넘겼을 때 장남이 가져온 편지에는 무려 황실 인장이 찍혀 있었다. 4황자의 놀이 친구로 입궁하라는 내용이었다. 그거 나름 오디션 같은 거 보는 거 아니었나? 교양 수업에서 비슷한 내용을 봤던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오래전 일이라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제가 가도 되는 건가요?’ 하고 묻는 내 머리를 쓰다듬은 장남은 웃으며 푸딩을 내밀었다. 차남과 장남이 디저트 대결을 펼치는 덕에 내 입이 심심한 날은 없었다. 이러다 살이 찌면 어떡하지 걱정했지만 당장의 유혹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시럽과 푸딩의 완벽한 조화에 감탄하고 있자 그가 설명을 이었다.
에드윌 백작, 그러니까 내 아버지는 후궁인 아네트 부인의 사촌으로, 어린 시절부터 친남매처럼 자란 사이라고 했다. 아네트 부인은 제 사랑스러운 오촌 조카를 보고 싶어 했고, 고민하던 중 자신과 사이가 좋은 로웨나 부인의 아들인 4황자의 놀이 친구로 조카를 부르면 되겠다는 완벽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여기서 그 사랑스러운 조카는 당연히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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