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17)

#2

자기 아들도 아니고, 다른 후궁의 아들 곁에 ‘사랑스러운 조카’를 두기 위해 궁에 불러? 이걸 믿는 사람은 바보거나, 멍청이거나. 아무튼 어딘가 부족한 새끼일 게 틀림없다. 그러나 어른들의 뒷사정이야 고작 열 살인 내가 걱정할 부분은 아니었다. 여기서 싫다고 하면 아버지와 형들은 절대 나를 보내지 않겠지만,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황후 못지않은 권력을 움켜쥐었다는 아네트 부인의 요청을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이게 별것 아닌 사안이었으면 내게 가져오기도 전에 알아서 쳐냈겠지.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밝게 웃으며 ‘황성이라니. 좋아요. 그러면 형님과도 더 자주 만날 수 있겠죠?’ 하는 것뿐이었다.

걱정과는 달리 아네트 부인은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어린애한테 뭔가를 캐오라고 하면 그게 미친 거겠지만. 드레스 자락이 끌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내게 시선을 맞추며 끌어안고 볼에 키스해 주는 그녀는 과연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다. 상냥한 목소리로 ‘네가 르웰린이구나. 정말 보고 싶었단다.’ 하는 그녀 앞에서 바짝 긴장한 나는 정신없이 고개만 끄덕이다 뒤늦게 ‘저도요.’ 하고 덧붙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가 무서웠다. 르웰린 에드윌로 눈을 뜬 후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감이었다. 은발을 높이 틀어 올려 드러난 목덜미는 우아했고, 총명하게 빛나는 녹색 눈은 유순했지만, 그녀가 정말 유순하고 상냥하기만 한 사람이라면 황성에서 권력을 틀어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평생 에드윌 성에서 살 수는 없지만, 되도록 오래 붙어 있고 싶었는데. 귀찮다고 불평했어도 그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던 옷자락들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는 영광을 누리며 복도를 지났다.

4황자인 에르켈은 갈색 머리와 헤이즐넛색 눈을 가진 유한 아이였다. 황실의 색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한 그를 보며 아네트가 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아들인 5황자는 황제의 것과 같은 붉은빛 도는 금발을 가졌다. 4황자라고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지만 그는 예의를 갖춰 인사할 뿐이었다.

4황자와 친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생긴 대로 유순했고, 자신과 나의 신분을 들먹이며 멋대로 굴지도 않았다. 내 전에 들어온 놀이 친구들도 나쁘지 않았다. 귀족 도련님들을 모아 뒀으니 자칫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전부 궁의 주인을 닮았는지 가끔 오만한 구석이 있긴 해도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들과 마법, 역사, 정치, 수학 따위를 배우며 정신없는 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넌, 누구지?”

에르켈이 평소 같지 않게 굳은 얼굴로 나를 구석에 몰아넣었다. 바짝 긴장한 어깨와 떨리는 눈 따위로 그가 화가 났다기보다는 겁을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

에르켈, 그러니까 에르켈에 빙의된 김민지는 나를 부여잡고 한참 울었다.

“아, 진짜… 흡, 진짜 한국인이에요?”

“예.”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주기가 벌써 일곱 번째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지 그는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햇빛 냄새가 날 것 같았던 손수건은 이미 젖어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내 것을 건네자 ‘고마워요.’ 하고 받아 간 김민지, 아니, 에르켈이 팽 코를 풀었다.

“설마, 설마 했거든요.”

눈과 코가 온통 빨간 게 내일이 되면 눈이 팅팅 부을 것 같은데. 괜찮은 걸까? 속에는 한국인이 들어 있어도 그 몸은 어디까지나 황자인데. 괜히 덤터기 써서 황자를 울렸다는 얘기 듣는 거 아니야? 그러나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차마 그만 울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에르켈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습관처럼 튀어나온 한국식 관용어 탓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제국에서 누군가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든가 ‘귀신이 곡할 노릇’ 같은 표현을 쓰면 이상하게 보기는 하겠다. 거기에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한국어 욕이 결정타였다.

조심한다고 조심했어도 집 안에서는 아무도 지적하지 않아 긴장이 느슨해진 모양이다. 반면 보는 눈이 많은 황성에서 구른 에르켈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았다.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의 본래 성격 따위는 튀어나오지 않도록 눈을 뜬 순간부터 조심했던 덕에 그를 의심한 사람은 없었다.

동지를 만났다는 생각에 울어대는 그와, 당황스러운 나의 차이는 빙의된 후 얼마나 굴렀는가의 차이일 것이다. 차를 마실 때도 독의 유무를 걱정하며 긴장하는 삶을 보낸 에르켈과 형들의 품에 안겨 달고 좋은 것만 입에 넣던 르웰린의 입장이 같을 리 없다. 나는 괜한 죄책감을 느끼며 그를 달랬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말을 놓자는 말에 감동에 차서 입을 틀어막는 에르켈을 보자 양심이 좀 아팠다.

물론 나도 이런 곳에서 한국인을 만날 거라 생각하지는 못해서 반갑기는 한데. 이렇게까지 기뻐할 줄은 몰랐다. 주변인을 다 물리고 내게 그간의 설움을 조잘조잘 고해바치는 김민지는 4황자로 살며 쌓인 게 많은 듯했다.

“로웨나 때문에 미치겠고 아네트 때문에 돌겠어. 바짝 엎드려 사는데 왜 그렇게 눈치를 줘?”

“그래. 그 사람 장난 아니긴 하더라.”

아네트 부인에게 에드윌 백작은 중요한 조력자 중 하나였는데,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서라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 앞에 설 때면 긴장하게 됐다. 반면 에르켈은 아네트의 비호를 받는 대신 그녀의 수족처럼 구는 로웨나의 아들이었고, 동시에 아네트의 아들인 5황자보다 황위 계승 서열이 높은 4황자였다. 만만하고 거슬리는 상대에게 아네트가 어떻게 굴었을지는 뻔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봤을 때도 좀 이상하긴 했어. 르웰린이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이상한 점을 캐치한 것은 울음을 멈춘 에르켈이 한참 조잘대던 중이었다. ‘원래’라고?

“르웰린 에드윌을 알아?”

“어….”

갈색 눈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만 벙긋거리는 걸 보니 ‘좆 됐다.’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알고 있는 게 내게 아주 중요한 일임을 직감했다. 당황한 에르켈이 손을 쥐었다 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한 척했다.

“뭔가 알고 있으면 설명해 줘. 그래야 해결하지. 같이.”

“같이….”

가만히 두면 당장 방을 뛰쳐나가기라도 할 듯 발끝에 힘을 주고 들썩거리던 에르켈이 그 단어에 반응했다. 역시. 궁에서 내내 눈치 보고 살던 그가 마음 놓고 대할 수 있는 동료인 나를 놓칠 리 없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몰아붙였다.

“이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랑 나, 둘뿐이잖아.”

“그, 그렇지.”

“나는 이곳에 대해 잘 몰라. 그나마 우리가 이렇게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 걸 알잖아.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살살 달래자 넘어오는 것이 눈에도 보였다. 입술을 잘근 물며 망설이는 그를 더 채근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입은 열리게 되어 있다.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내가 너한테 왜 화를 내겠어.”

“…욕하지 않겠다고도.”

“물론이야.”

에르켈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다시 한 번 “약속이야. 알았지?” 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가 내뱉은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 정도의 가벼운 감상이었다.

“사실, 여기는… 내가 쓴 소설 속인데… 아니, 그런 것 같은데.”

내 눈치를 살피며 급하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인 에르켈이 말을 이었다.

“그게, 그. 사실. BL 소설이거든.”

“응?”

“BL… 남자들끼리… 하는 그거.”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었는지 왼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오른손 검지를 거기 넣는 제스처를 보여 주었다. 아, 어, 그러니까. 당황하기는 했지만 일단 이해는 했다. 여자애들 사이에 그런 류의 취미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지금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거지? 불안함이 올라와 몸을 삼키는 것 같았다. 심장이 경고하듯 불안하게 뛰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BL 소설.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럴 수 있다. 이곳이 그냥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책 속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에르켈은 왜 그걸 말하면서 나에게 화내지 말아 달라고 했을까. 왜 저렇게까지 눈치를 보지? 상황 파악은 대충 됐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머릿속에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 주인공이.”

“…응. 계속해.”

“…거기 주인공이, 너야.”

에르켈이 눈을 질끈 감고 내뱉었다.

내가 들은 문장이 뇌까지 들어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여기가 책 속이고, 그 책이라는 게 남자들끼리 섹스하는 내용인데. 거기 주인공이 나라는 거지? 나는 지금이라도 에르켈이 농담이었다고 말해 주길 바랐지만, 그는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발밑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혹시 이대로 정신을 잃고 나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의미 없는 기대도 생겼다. 사실 에르켈이 한국인인 건 내 빈약한 상상력에 불과한 거고, 나는 황성에서 돌아온 후 일찍 잠자리에 든 거지. 그리고 장남이나 차남이 무슨 꿈을 꾸기에 그렇게 뒤척이냐고 걱정하며 나를 깨우는 거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꾹 감고 현실을 부정해대도 바닥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도 없었다. 결국 나는 이 빌어먹을 상황이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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