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7)

#4

나는 입꼬리만 올린 채 손가락을 두드렸다. 타다닥, 타다닥. 암갈색의 테이블이 초조한 심정을 대변하듯 울렸다.

“다른 건. 뭐 없어?”

“으으음….”

갈색 눈동자가 시선을 피하며 구른다. 말문이 막힌 건 아니고, 떠오른 것 중 입 밖에 낼 만한 게 없다는 눈치다.

“외국으로 도망친다거나.”

“제국 벗어나려면 이종족의 영역으로 들어가거나, 배 타고 몇 달 가야 하는데. 그마저도 언어랑 외형이 달라서 힘들걸. 게다가… 설정상 르웰린 얼굴이 남자를 손끝으로도 꼬신다고 했잖아. 아마 거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주연 넷을 피한다고 해도 결국 어딜 가나 남자 꼬이는 건 마찬가지이니 포기하라는 뜻이다.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에르켈은 일단 돌아가고, 자신이 좀 더 원작에 대해 떠올려 보겠다고 나를 달랬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우선 원작에 대해 정리해야 피하든, 정면으로 맞서 보든 할 거라는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당장 할 수 있다는 게 없다는 걸 인정하고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수건은 빨아서 돌려주겠다는 에르켈에게 너나 가지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내가 조심하면 그깟 첫 만남은 피할 수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평화에 취해 위기의식은 팔아먹었던 게 틀림없다.

굳이 말을 짜내 본다면 변명 비슷한 무언가가 튀어나오긴 했다. 그날 이후 실제로 몇 주간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했던 탓이다.

“오랜만이구나.”

4황자 궁에 찾아온 황태자를 볼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나는 에르켈의 다른 놀이 친구들과 함께 고개를 숙인 채 이를 갈았다. 시발, 열두 살에 화원에서 만난다며!

02. 꿈과 희망이 넘치는 세계

태양처럼 빛나는 붉은빛 도는 금발과 붉은 눈.

선조가 용이었다는 제국 황가의 상징을 뚜렷하게 이어받은 소년은 우아하게 걸어 방을 가로질렀다. 나는 그의 머리와 눈이 다른 색이었다고 해도, 그래서 겉모습으로 그가 황태자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고 해도 아무런 의심 없이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타고나기를 왕. 지배자.

흙수저, 금수저라는 말이 있듯 까보면 결국 등급이 있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모든 인간이 같은 권리를 타고 태어난 곳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주제에 이런 말을 하기는 우스운 것을 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공간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가진 황태자를 직접 보자, 왕이 될 상이 있긴 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얼굴도… 고백하자면 르웰린이 된 후 미색에 심드렁해지던 차였다.

가깝게는 본인의 얼굴부터 화려했고, 형제들의 것도 범상치 않았다. 황성에 들어온 후에는 제국에서 최고라는 것들만 눈에 담았다.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미모도 직접 보았다.

그러나 황태자의 얼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지금껏 봐 온 것들을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발군의 미모였다. 어느 정도냐면, 그가 기피해야 할 사람 1순위라는 것도 잊고 얼굴을 정신없이 훑게 만들 만큼.

이제 열넷이라고 했나.

아직 살이 덜 내려 어린 티가 나는 뺨, 순연하게 내리깐 눈과 대비되듯 고집 있는 입매. 오만하게 치켜든 턱과 곧은 허리. 그림으로도 그려낼 수 없을 외모다.

벌써 저러면 나중에는 어떤 얼굴이 될지 기대가 될 정도다. 과연, 잘난 놈들만 모아 두었다는 주연 중에서도 메인 자리를 차지할 만했다.

에르켈의 인사를 받은 황태자는 손짓 한 번으로 제 이복동생의 놀이 친구들이 고개를 들 것을 허락했다. 처음 궁에 들어올 때를 제외하면 정말 또래 친구처럼 격 없이 지내던 루이스와 에이든, 엘리엇은 잔뜩 쫄아 있었다. 따지고 보면 고작 네 살 차이인데.

평생 숙여 본 적 없다는 듯 빳빳한 고개와 여유로운 어깨를 보면 ‘고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나 에르켈이야 빙의자니 황궁 예법을 완벽하지 숙지하지 못했다 쳐도, 성인인 아네트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기품이었다.

절반은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였지만, 황태자와 에르켈의 신분 차이는 명확했다. 장차 황제가 될 몸과 주목받지 못하는 후궁의 아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단번에 그 비교할 수 없는 격차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다.

제국 모든 귀한 것을 모아 둔 황궁에서도 제일 좋은 것을 차지한 황태자가 느리게 방 안을 훑었다. 4황자 궁은 주인인 에르켈의 뜻에 따라 수수한 편이었다. 황궁이니만큼 기본적으로 넓고 화려하지만, 값비싼 장식과 치장은 없었다. 처음 아네트를 만난 그녀의 궁에 비하면 수수하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아네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에르켈이 선택한 것이다. 최대한 단정하고, 밋밋하며, 트렌드와는 거리가 백만 광년쯤 떨어진 것들. 그 과정에서 시녀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몸을 납작 숙이는 것이 제일 급했던 에르켈을 말릴 수는 없었다.

자연히 황태자가 보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시녀들이 크게 반응했다. 여러 눈동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황태자의 시선이 잠깐이라도 닿는 곳들을 놓치지 않았다. 궁 주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댈 수 있게 됐으니, 이른 시일 내에 궁의 장식과 벽지, 그림을 갈아치울 것이다.

한편 에르켈은 그녀들의 반응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르웰린과 황태자의 첫 만남은 황성 화원이라며 호언장담하더니.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방문에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모양새다. 이해할 수 있었다. 평소에 찾아오기는커녕 인사도 하지 않던 형제가 갑자기 찾아와 제 방을 헤집으면 나 같아도 당황스럽겠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가 늦게나마 손님을 대접하려 했다.

“데르타에서 들여온 차가 있는데, 향이 좋습니다.”

“차는 됐다.”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거절에 에르켈이 “그렇군요.” 하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후에야 그게 웃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그나마 에르켈은 상태가 나았다. 내 옆에 있는 루스터는 손까지 벌벌 떨었다. 열네 살 같지 않은 황태자의 악명이 제법 높은 듯했다.

“제레미 로우웰인가?”

“맞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 공부는 잘돼 가느냐, 의미 없는 대화가 몇 번 오갔다. 그러던 중 황태자가 시선을 준 것은 구석에 있는 조각상이었다. 제 몸의 배가 넘는 구를 힘겹게 떠받치며 인상을 쓴 남자의 모습은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옷자락과 근육이 대단히 섬세한 상아 상이었다. 에르켈이 저걸 왜 방에 뒀는지 알 것 같았다. 조각상은 하늘을 떠받친다는 아틀라스의 신화를 연상시켰다.

“저것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에르켈에게 하는 소리인 줄 알고 가만히 눈을 깔고 있는데 옆에서 딜런가 차남이 옆구리를 찔렀다. 황태자의 붉은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당황해서 그의 뒤에 있는 에르켈을 확인했다. 에르켈은 정신 사납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나보다 더 당황한 그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면접을 볼 때보다 더 긴장됐다. 열두 살 어린애에게 반한다는 황태자는 다행히 열 살 꼬맹이에게 반할 만큼의 변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마주친 눈은 공기도 얼릴 수 있을 만큼 냉랭했다.

열 살. 평범한 열 살 꼬맹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말하지?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형들의 질문이었다면 ‘응, 예뻐서 쳐다봤어요!’ 하고 귀염을 떨면 될 텐데. 황태자 앞에서 그랬다간 저 미친 자가 다시는 궁에 발 디디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전하께서 시선을 주시기에 귀한 것인가 싶었습니다.”

최대한 얌전한 답을 선택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황태자는 별 반응이 없었다. 기대에 부응한 건 아니어도 아주 못 미치지도 않은 답변인 걸까. 사실 그의 태도로 봐선 딱히 이 안의 사람들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 봤자 중학생 꼬맹이한테 쫄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계급은 곧 법칙이었고, 제국의 황족은 신이었다.

“흔치 않은 자안이라. 그대가 에드윌이겠군.”

“예. 르웰린 에드윌입니다, 전하.”

“그대 형이 내게 제 막냇동생 이야기를 자주 했지.”

형? 그가 말하는 형이 장남인 케일인지, 둘째 레오폴드인지 고민하자 황태자가 ‘에드윌 경이 내 호위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덧붙여 주었다.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한 게 차남인 것을 알자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까 웃으려고 노력하던 에르켈보다 심한 얼굴일 것이다. 차남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막내 얘기’가 제정신으로 듣기 힘든 주접뿐인 것을 알았다. 이, 시발, 도움 안 되는 놈이. 대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제 상관에게 아무 소리나 했을까. 하지만 차남은 유별난 세 형제 중에서도 특별했다. 가능성이 있다.

“제, 이야기를요.”

“처음 들었을 때는 온통 귀엽다, 사랑스럽다, 예쁘다는 말뿐이라 여동생인 줄 알았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에드윌가에는 여식이 없는데,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어. 백작이 아니었다면 밖에 여인을 두었나 했을 거야.”

시발.

옆에서 딜런과 클로이가 나를 흘금거렸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쁜’ 에드윌가 막내를 구경하기 위함이다.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당장 바닥을 파 그 안에 숨어도 된다면 열심히 삽질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속으로 차남에 대한 점수를 왕창 깎았다. 이번 주에는 아무리 디저트를 들고 와도 볼에 뽀뽀 따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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