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동생을 보면 그렇게 애틋한가 싶었지. 덕분에 어느 정도 걸러 들었는데. 그가 틀리지 않았군.”
“…예?”
“내게도 그대 같은 동생이 있었다면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다고 여겼을 것 같아.”
정정, 시발, 정정한다. 이 새끼는 열 살짜리 꼬맹이에게도 흑심을 품는 개쓰레기 페도 새끼가 맞는 것 같다. 놀이 친구 따위 때려치우고 궁에는 시선도 주지 말았어야 하는데. 다시금 내 안일함에 치가 떨렸다.
자꾸 구겨지려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기쁜 생각을 해야 했다. 여기서 토하고 싶은 얼굴을 하면 안 된다.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 행복한 기억을 쥐어짜냈다. 셋째가 보여 준 마법을 본 순간, 아홉 살 생일에 성의 주방장이 솜씨를 발휘해 만들어 준 초콜릿 레이어 케이크, 장남이 준 로켓 목걸이.
간신히 진정을 찾은 내게 황태자가 웃어 보였다. 농홍한 입술과 그보다 붉은 눈이 휘어지는 순간이 영화 명장면 클립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원작의 르웰린 에드윌이 황태자를 선택한 건 얼굴 때문이 틀림없다.
“농담이야. 내게는 이미 사랑스러운 동생들이 많이 있으니.”
‘죽여 버리고 싶은’을 잘못 말한 것 같은데.
새삼 그가 어린 동생들뿐 아니라 성인인 황후와 아네트와도 세력 싸움 중인 몸이라는 걸 실감했다. 만만한 에르켈조차 거슬려 종종 시비를 거는 아네트가 황태자를 가만히 뒀을 리 없겠지.
제국 황가 사정이야 자세히는 몰라도 지구 역사만 봐도 황제가 되기 위해 형제를 죽이고 내쫓는 일이 한두 번이던가. 이들에게 형제는 피붙이가 아니라 제 권력을 탐내는 정적이었다.
다행히 황태자는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갔다. 짧은 등장으로도 후폭풍이 엄청났다. 긴장이 풀려 한숨을 내쉬는 건 황자나 귀족이나 똑같았다. 구두를 신고 꼿꼿하게 서 있던 시녀들도 자세가 무너졌다.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신을 찾는 이들 사이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선 건 시녀장인 아델로아뿐이었다. 과연.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내내 한마디도 못 하고 얼어 있던 클로이와 덜덜 떨던 루스터가 서로에게 기대섰다.
“그, 급할 때 진정시켜 주는 약이 있다던데. 가지고 다녀야겠습니다.”
그들의 무례함을 지적해야 할 황자는 도리어 더 정신이 없어 소파에 늘어졌고, 유일하게 정신이 멀쩡한 시녀장은 그들보다 신분이 낮으니 방 안에는 “그러게.” 하는 동조의 말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게. 인간미라곤 없는 황태자에게 좋다고 자기 동생 얘기를 떠벌린 차남의 신경 줄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누군가 레오폴드 에드윌이 얼굴에 5cm짜리 가면을 쓰고 있다고 고발해도 놀라지 않고 ‘역시 그랬구나!’ 할 수 있었다.
“오늘은 피곤한데….”
에르켈의 축객령에 징징거리던 이들이 일어났다. 가는 길에 당분을 채워야겠어. 심신이 지친 나도 일어나려는데 “르웰린은… 잠깐.” 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붙잡았다. 나는 잠깐 나가는 세 명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그들은 정신이 없어 나 혼자만 에르켈과 만나는 상황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시녀들까지 모두 물린 에르켈은 인기척이 멀어지자마자 아예 자리에 누워 버렸다.
“하, 스발. 꼬맹이가 눈으로 사람 죽이겠네.”
“네가 만든 캐인데 불평하면 어떡해?”
“보는 건 좋아. 엮이지만 않으면 좋다고.”
칭얼거리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목을 채운 단추를 풀었다. 목을 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셔츠가 오늘따라 답답했다.
“그 새끼. 첫 만남이 열두 살이라며. 그런데 갑자기 왜 나타나? 첫사랑이라더니 저딴 걸 플러팅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게.”
이상하단 말이야. 상체를 일으킨 에르켈이 추리하는 탐정처럼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초등학생으로 변한 고교 명탐정이 나오는 만화를 인상 깊게 본 모양이었다.
“페르온 속성은 그거거든. 차제남. 모두에게 차갑지만, 내 남자에게만은 따뜻한 제국 남자가 모토인데 플러팅치고는 너무 살벌했잖아.”
“아직 어려서 그런가 보지.”
“아냐, 아냐. 걔 하는 걸 봐. 페르온은 태어난 순간부터 황제가 될 몸이었단 말이야.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야. 감정 컨트롤에 능숙하고 사람 다루는 건 타고났어. 자기가 르웰린을 보고 처음 반했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본성을 숨기고 잘해 준단 말이야.”
하긴. 지금도 열네 살이 가질 만한 포스가 아니긴 했다. 명백히 어린 나이긴 해도 이미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황태자가 열여섯의 그가 할 수 있는 걸 지금이라고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 턱을 괸 에르켈이 쓰읍, 하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갑자기 찾아온 것도, 레오 얘기를 하는 것도 이상해.”
“차남?”
“응. 가족들이 르웰린을 아낀다는 설정이 있긴 한데, 말하는 거 들어 보니까 그 정도가 아니잖아. 내 생각보다 심하다니까.”
차남이 원래 그렇게 이상한 놈이 아니었단 말이야?
내게서 에드윌가 남자들의 극성에 대한 얘기를 들은 에르켈이 ‘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차남이 나를 집 안에서 내내 안고 다닌다는 말에는 조금 놀랄 줄 알았는데 전혀 놀라지 않아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내 생각은 이래. 내가 르웰린을 4황자의 놀이 친구로 설정했던 건 맞아. 하지만 궁에 들어온 나이나 방법은 원작에 안 나왔거든. 어련히 어린 나이에, 적당한 방법으로 입궁했겠지. 그런데 네가 원작보다 가족들에게 더 사랑받았고, 그래서 원작보다 빠르게 아네트가 너를 궁으로 불렀다.”
“그래서 첫 만남이 달라졌다?”
“그렇지. 그리고 그렇다는 건….”
에르켈과 눈을 마주쳤다. 유순한 얼굴 위로 자신감 어린 미소가 번졌다. 김민지의 것이다. 한껏 목소리를 낮춘 그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소곤거렸다.
“원작을 비틀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뜻이지.”
진이 잔뜩 빠졌다. 에르켈은 원작을 비틀 수 있으니, 장르도 비틀 수 있지 않겠느냐며 들떴지만 그게 힘들다는 건 나도 알고 에르켈도 아는 사실이다.
몇 주간 놀고 있기만 한 게 아니었는지 에르켈이 서랍 밑 틈에서 종이를 빼냈다. 혹시 누군가에게 들킬까 한국어로 작성한 그것은 ‘그대의 곁에서’의 스토리였다. 벌써 7년 전, 수험생 시절 반쯤 미쳐 쓴 거라 지명, 이름, 사소한 사건은 다를 수 있다고 덧붙인 에르켈은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오늘 일이 아니었으면 나는 열한 살이 되자마자 신학교로 갈 생각이었어.”
“뭐?”
나를 두고 어딜 간다는 거야? 황당해서 입을 벌리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작에서 에르켈 아카레온은 등장이 많지 않아. 극 초반부와 회상 씬에 이름만 가끔 등장하는 정도지.”
엑스트라라면 그럴 수 있지 않나 싶었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 에르켈은 열일곱에 죽거든.”
“뭐?”
어째 오늘 내뱉는 말은 ‘뭐?’가 다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에르켈이 종이를 뒤적거리다 한 페이지를 집어 들었다.
“원작에서는 황태자 암살을 시도하다 걸려서 처형당해. 페르온이 스물하나가 되면서 자기 세력을 늘려 가고, 황제는 늙어 기력이 없어지니까 아네트가 마음이 급해져서 로웨나를 설득하거든. 자기 아들인 루카스가 열넷이 됐으니 움직이기에 적기라고 판단하기도 했고.”
“미친. 그런 걸 왜 지금 말해?”
“원작을 비틀 가능성이 없으면 섣불리 건드려도 바뀌는 게 없을 테니까.”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에르켈은 덤덤했다. 신관이 되면 성을 버리게 되니까, 아네트가 아무리 로웨나를 닦달해도 에르켈을 움직일 수는 없을 거라고 차분하게 설명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메인 커플 갈등이 커지는 거지.”
“에드윌과 아네트가 친하니까.”
“응. 백작은 유능하고, 오래 신임받은 신하지만 자기 사람한테 무르니까. 아네트의 본성을 알면서도 여동생같이 아끼는 아네트가 울면서 호소하면 외면하기는 힘들거든.”
“미치겠네. 그런데 어떻게 황태자가 메인이 돼?”
자기 목숨 노리는 놈과 같은 편인데 르웰린을 사랑하는 황태자나, 자기 아버지의 적인 황태자를 선택하는 르웰린이나. 둘 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랑은 밥 먹여 주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나를 보며 에르켈이 웃었다.
“뭘 모르는구나. 원래 그렇게 갈등 구조가 큰 애들이 메인 하는 거야.”
“염병….”
이쪽 장르 룰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물론, 그래. 소설이니까 갈등도 겪고 구르기도 하면서 사랑을 키워 나가는 게 재미있다는 건 알겠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이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순조롭게 약혼하고 축복 속에 결혼했다면 그들의 이야기가 인기 있었을 리 없다.
“그렇게 점점 갈등이 고조되면서 페르온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지. 태어날 때부터 제 것임을 의심해 본 적 없는 권력이냐, 생에 다시는 없을 사랑이냐.”
황태자의 붉은 눈이 떠올랐다. 인간 같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차가워, 차라리 보석 같던 눈동자. 그런 놈이 사랑에 빠져 해롱거리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황위를 선택할 것 같은데.”
“이얄… 벌써 다 파악했는데? 이런 게 메인 커플의 힘인가? 악, 시바, 잘못했어.”
헛소리하지 말라고 종이를 뭉쳐 휘두르자 에르켈이 우는 소리를 냈다. 아프지도 않을 텐데 아픈 척하는 게 더 얄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