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17)

#6

“웅… 아무튼… 그래서 페르온은 결국 에드윌을 적으로 규정하고, 백작은 르웰린을 북부로 빼돌려. 알면서도 봐준 거지만.”

“북부면….”

테이블 위 흐트러진 종이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북부의 광활한 대지, 얼어붙은 숲과 산맥의 주인은 디멘시온. ‘그대의 곁에서’의 서브였다.

“거기서 공작과 눈이 맞겠네.”

“후회할 걸 알면서도 사랑을 버리는 남자랑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리는 남자라니, 존나 짜릿하자너.”

“두 번 짜릿하면 나라 망하겠다.”

에르켈이 아하학,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째 쟤는 점점 본성이 드러나는 것 같다. 내 앞에서만 저러니까 다행이긴 한데… 저러다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4황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 게 뻔했다.

*

“저택으로 돌아가시나요?”

한 번도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 루트를 벗어나 본 적 없는데. 시종은 매번 공손하게 물었다. 나는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집에 가면 심란해서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레오 형님은 어디 계시지?”

“에드윌 경이라면 지금 연습장에 계실 시간이군요.”

확인해 드릴까요? 잠깐 혹할 제안이었지만 역시 직접 가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선물은 서프라이즈가 재미있지. 내 자신감은 이미 ‘차남에게 제일 좋은 선물은 나’라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다 몇 년 후에 내가 커서 수염 난 시커먼 사내놈이 된 후 차남이 차가워지면 꽤 마음이 상할 것 같았다.

“됐어. 마차는 물려 줘.”

만약 연습장에 차남이 없으면 어떡하지? 걱정됐지만… 그러면 뭐, 장남이 집에 데려가 주겠지. 정 안 되면 에르켈에게 마차 하나 내 달라고 해도 된다.

온갖 최신 장비가 다 있는 황성에 딱 한 가지 없는 게 있다면 이동용 마법석이었다. 외부 이동을 위해서는 마차를 타고 나가 마법석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고, 내부에는 스크롤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도 금지되었다.

4황자 궁에 와서 역사를 가르치는 아니글란은 그게 혹시 모를 암살에 대비하기 위한 거라고 했다. 혹시, 물론 위대한 제국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지만 정말 만약에라도 적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황제가 있는 중앙 궁까지는 걸어서 꼬박 세 시간이 걸린다. 대단위로 이동 마법을 금하는 방어벽이 있는데, 이것은 용의 맹약이라 절대 깨지지 않는다고 하는 그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 대단한 맹약은 황족들의 안전을 지켜 줄지언정 내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매번 4황자 궁만 들락거리니 황성이 넓다는 사실은 말로만 들었는데. 이건 그냥 넓은 게 아니라 정말, 존나, 무지막지하게 넓었다. 초대 황제라는 놈은 미친놈인 게 틀림없다.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움직인 것 같은데 아직도 연습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숨을 헐떡이는 나를 안쓰럽게 본 시종이 안아 드릴까요? 권했지만 거절했다. 자존심이 있지. 집 안에서 차남에게 안겨 다니는 거로도 모자라 밖에서 시종에게까지 안겨 다닐 수는 없었다.

“얼마나, 헉,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왔습니다.”

벌써 세 번째 ‘거의 다’였다. 저게 진짜든 아니든, 그나마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는 승리의 주문인 것은 맞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가까워진 걸 보면 이번 ‘거의 다’는 진짜일 가능성이 컸다.

바지런히 걸어 드디어 연습장에 도착하자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한 것처럼 국기를 꽂고 기념사진이라도 찍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힘들고 기뻤다.

“에드윌 경을 모셔 올까요?”

“아냐, 아냐….”

시종이 먼저 가서 부를 거였으면 여기까지 힘들게 걸어오지도 않았다. 당장 바닥에 엎어지고 싶어 후들거리는 다리로 근처에 있던 기사를 불렀다.

“저기… 안녕하세요.”

짧게 깎은 브루넷과 그을린 피부를 가진 젊은 기사는 어린애를 보고 놀랐다가, 내 뒤에 서 있는 시종을 보고 갸웃했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어?” 했다. 표정 변화가 드라마틱했다. 이대로 디즈니에 캐스팅되어도 될 것 같았다.

“혹시, 르웰린 에드윌?”

“저를 아세요?”

그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한쪽 무릎을 꿇어 시선을 낮춰 주었다.

“잘 알지. 부단장이 입만 열었다 하면 하는 게 네 얘기인데.”

시바.

생각해 보니 자기 상관(심지어 황족, 그것도 황태자)에게도 내 자랑을 하는 레오폴드가 동료들에게 내 얘기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들에게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막내 운운하며 극성을 피웠을 거라는 걸 깨닫자 수치감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그나저나 차남이 부단장이라니. 그러고 보면 승진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고.

“힘들어 보이는데. 제게 안아 드릴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천사님.”

“천, 뭐, 예?”

“부단장이 매번 천사 같다고 하길래. 다행히 날개는 안 달렸네.”

괜히 왔다. 후회했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이다. 자신을 제임스 셀츠라고 소개한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안아 들었다. 뒤늦게 발버둥 치며 내려 달라 했지만, 그는 “걱정하지 마, 내가 조카들을 잘 안고 다니거든.” 할 뿐이었다. 떨어뜨릴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나 몸은 이미 지쳤고, 제임스의 안는 자세는 완벽했으며, 운동을 업으로 삼는 기사의 가슴팍은 넓었다. 안정감에 몸이 풀렸다. 다행히 제임스는 아직 연습을 시작하기 전이었는지 그의 셔츠는 깨끗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부단장은 안에 있을 거야. 외부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지만, 천사라고 하면 다들 뭐라고 못 하겠지.”

차남은 꼭 저 같은 동료를 가졌구나. 이런 놈들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놈의 천사, 시발. 정정할 생각을 버리고 얌전히 안겨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차남에게 데려다줄 테니 잘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행히 연습에 열중한 기사들은 이쪽에 시선을 주지 않았고, 실내에 들어서자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제임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부단장, 나와 봐요.”

노크에 답이 없었다. 제임스는 나를 내려놓고 문을 세게 두드렸다.

“나와 보라고!”

이러다 문이 부서지는 거 아닐까. 이미 안에 있는 사람을 부르겠다는 목적을 벗어난 것 같은데. 그의 주먹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문이 심하게 울렸다.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게 용했다. 문이 거세게 열린 것은 완전히 문을 박살 낼 생각인지 발을 들었을 때였다.

“뭐야, 시발. 헛소리할 거면 꺼져, 셀츠.”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라고 해도 믿을 욕설을 쏟아내며 문을 연 차남과 눈이 마주쳤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와 바닥에 굴러 엉망인 옷, 그보다 더 구겨진 얼굴로 제임스의 멱살을 잡아채려던 차남은 나를 발견하고 제임스와 나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보라색 눈이 혼란스럽게 떨렸다.

쾅!

열릴 때보다 거칠게 닫힌 문에 머리카락이 뒤로 날릴 정도였다.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잠잠해졌다.

“씻고 옷 갈아입고 나올 거야.”

욕설을 들은 제임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람 좋게 웃을 뿐이었다. 황실 기사단이라는 놈들이 이 모양이라니. 이 또라이들에게 맡겨질 제국의 미래가 진지하게 걱정됐다.

문은 생각보다 빠르게 열렸다. 5분이나 됐을까. 10분이 되지 않은 건 맞는 것 같은데. 제임스가 시시한 농담을 던지는 걸 대충 받아 주던 중 아까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르웰린.”

그 짧은 사이에 머리까지 감았는지 젖은 머리의 차남이 평소처럼 웃었다. 온 대륙 남자를 발끝으로도 꼬신다는 르웰린의 가족답게 차남도 얼굴 하나는 잘났다. 고작 스물의 나이로 황실 기사단 부단장에, 황태자의 호위까지 맡았으니 그것만으로 인기가 터져 나갈 텐데 화보 같은 얼굴과 발칙한 몸매까지. 네임드들이 르웰린과 엮여 뒹굴다 보니 티가 안 나지만 확실히 차남도 설정 과다 캐릭터였다. 김민지의 취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겠다.

“향수까지 뿌렸습니까? 수도 영애들이 알면 한숨을 쉬겠네.”

“여기까지 무슨 일이니. 사람을 보냈다면 내가 갔을 텐데. 집이 아닌 곳에서 보니 더 반갑구나. 빛이 나기에 복도 조명을 간 줄 알았지.”

조금 전 해프닝을 없었던 일로 하는 것도 모자라 제임스조차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했는지, 차남은 그를 철저하게 무시하며 나를 방 안으로 불렀다. 차남의 쉴 틈 없는 주접을 들은 제임스가 비웃으며 나를 따라왔다. 웃음소리가 망측한 걸 보니 에르켈과 함께 세워 두면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다.

“네가 올 줄 알았으면 먹을 것을 준비해 둘걸.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면 함께 거리를 둘러볼까? 네가 좋아하던 디저트 가게도 들르고, 저녁도 함께 먹자. 마침 선물로 사려고 했던 게 있는데 이참에 네가 직접 고르는 것도 좋겠어. 수도에 있는 저택은 처음 가 보지? 그곳에도 네 방이 있어.”

벽에 손을 짚어 제임스를 가로막은 차남은 오늘의 스케줄을 늘어놓았다. 수도의 타운 하우스라. 궁금하긴 했다. 두 기사가 힘 씨름을 하는 와중에도 차남의 얼굴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폼으로 부단장을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진짜 이럴 겁니까? 제가 아니었으면 동생께서 시커먼 놈들 사이에서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을 거라고요.”

“근처에 개가 떠도는 모양이야. 자주 짖는 소리가 나.”

제 목소리가 개소리로 치부되자 제임스가 내가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제임스가 귀찮기는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누가 보기 전에 빠르게 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게 제임스 덕분이기도 했고. 나는 귀찮음과 은혜의 무게를 재다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셀츠 경은 형님과 친한가 봐요. 형님께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동료를 가졌는지 매번 궁금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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