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부끄러운 척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만 위로 뜨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묻자 제임스를 가로막았던 팔이 이번에는 그를 안으로 떠밀었다.
“내 절친한 동료는 말솜씨가 제법 좋단다.”
“아무렴요. 제가 누굽니까. 수도 최고 연애 박사랍니, 억.”
어깨를 잡힌 제임스가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 “짐?” 하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차남의 모습에 그가 작게 구시렁거리다 말을 정정했다.
“1황녀께서도 내가 말하는 걸 제법 즐기셔서 나를 자주 부르지. 없던 일도 있던 것처럼, 있던 일은 재미있게 푸는 데에는 나만 한 인재가 없을 거야.”
본인 입으로 저렇게 말하다니.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1황녀라면 황후의 딸인 리네아 아카레온을 말하는 걸 텐데. 에르켈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딱 황태자 같은 인간이었다. 타고난 차가운 성정에, 황후 소생임에도 여자로 태어나 황태자가 될 수 없었던 황녀가 제임스의 허풍을 보며 까르르 웃는 건 말이 안 됐다. 제임스가 말하는 내용이 재미있어 불렀다기보다는 그가 열심히 떠드는 모습을 신기하게 여겼다는 것이 신빙성 있다. 동물이 재주를 부리는 걸 구경하는 맥락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르웰린 에드윌은 그런 복잡한 사정 따위 모르는 어린애니까. 나는 차남과 제임스가 치고받으며 콩트 하는 꼴을 보며 소파에 앉아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구르며 “와!” 하고 환호성을 보낼 뿐이었다. 내 반응에 제임스가 뿌듯해했다. 어린 척 구는 보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부단장이 만날 자랑만 하지, 끼고 도느라 얼굴도 못 봤는데. 천사님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뭡니까.”
저 염병할 천사 드립. 내게 향하는 게 아니어도 몸을 꼴 만큼 부끄러운 호칭을 처음 꺼냈을 차남을 바라봤지만, 그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응, 르웰린은 천사지.”
“캬… 처음 봤을 때 뒤에 날개 달렸나 확인도 했다니까요.”
“그건 나도 매번 신기해.”
괜히 도와줬어.
둘이 대화를 할 때마다 속이 부글거렸다. 하지 마. 그거 하지 말라고. 그만두는 게 안 되면 최소한 당사자 없는 곳에서 해, 새끼들아.
내려 달라는 말도 안 듣는 저 둘이 그만둬 달라는 말을 들을 리 없다. 만족할 때까지 주접을 부린 차남이 내가 앉은 쪽으로 다가왔다. 무릎 위에 앉히려는 게 틀림없다. 안 그래도 황태자에게 내 얘기를 한 것 때문에 성질이 나 있던 나는 고개를 팩 돌렸다. 일주일간 볼 뽀뽀도, 포옹도 없다.
“싫어요.”
“응?”
“저는 여기 앉을래요. 형님은 저기 앉으세요.”
직접적으로 부정을 입에 담은 건 처음이었다. 충격 받은 차남이 손을 뻗다 그대로 굳었다. “르웰린?” 하고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떨렸다. 입술을 비죽이는 스스로를 자각하자 너무 유치한가 싶었지만 뻔뻔해지기로 했다. 뭐 어쩔 건가. 나는 적어도 겉으로는 열 살이다.
제임스가 그런 차남을 위로했다. “제가 작작 하라고 했잖아요, 부단장.” 하고 본인도 거든 주제에 말이 많았다. 그들을 보는 나만 혼자 복잡했다.
비록 차남의 주접과 극성이 귀찮기는 했지만 정말 나쁘지는 않았다. 진저리치게 싫었으면 화를 냈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제멋대로 굴어도 내가 확실하게 ‘싫다’고 하는데 계속할 리는 없었다.
‘르웰린이 북부로 떠난 후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부분은 여기.’
에르켈이 정리해 둔 스토리는 충격적이었다. 르웰린이 떠난 후, 아네트와 전면전을 펼치게 된 황태자는 승기를 잡는다. 남은 일은 자신의 적을 숙청하는 것. 직접 황태자에게 칼을 들이민 것은 아니지만 아네트의 편에 선 에드윌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가족을 해친 자를 용서할 수는 없겠지. 오래 슬퍼할 테고, 평생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에드윌을 없애기로 한 황태자 앞에 선 것이 레오폴드 에드윌이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주인을 위해,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황태자와의 거래 후 죽을 것이 확실한 전장에 뛰어든 레오폴드는 그곳에서 전사했다. 죽음으로 충정을 보인 에드윌을 황태자는 기꺼이 용서했고, 이후 본인도 르웰린에게 용서받는다.
꿈과 희망이 넘치는 세계라며? 이건 희망 따위 꿈에서나 찾는 세계 아니야?
에르켈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엥? 이 정도면 희망과 사랑 넘치지 않아? 해피엔딩이잖아.’ 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랐다.
“르웰린….”
차남은 내가 가리킨 자리에서 불쌍한 척하면서 낑낑거렸다. 제임스는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관찰했다. 저 정도면, 정말 어디에 던져 놔도 살아남을 것 같은데. 고작 서른. 한창 능력을 펼칠 때의 기사는 무슨 생각으로 황태자 앞에 섰을까. 무엇이 그가 희생을 결심하게 만들었을까. 긍지? 가족? 한 번도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게 여긴 것을 가져 본 적 없는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단번에 다가온 그가 나를 끌어안고 머리칼 위에 입술을 내렸다. 이제 익숙한 스킨십이었지만 밖에서도 이럴 줄은 몰랐다. 흥미롭게 우리 둘을 보던 제임스는 경악하고 있었다.
“르웰린, 우리 막내. 이참에 휴가를 낼까? 수도에 있는 동안 옷도 맞추고.”
이미 계절마다 옷을 맞추는 거로 모자라 달마다 내 키가 큰 것 같다며 호들갑 떠는 장남 덕에 하녀들이 1년 안에 수납 공간이 부족해질 것 같다며 너스레 떠는 걸 들었는데 무슨 옷을 맞춰.
“미친 소리 마십쇼. 단장이 들으면 뒷목 잡을걸요. 안 그래도 요즘 혈압 자주 오르는 거 같던데.”
“아니면 책은 어때. 아벨이 네가 마법에도 흥미가 있는 것 같다고 하던데.”
신기해서 몇 번 찾아본 건 맞다. 하지만 나는 이미 배우고 싶은 걸 정해 뒀다.
“검이요. 검이 가지고 싶어요.”
에르켈은 우리가 원작을 비틀기 위해 메인 스토리를 어느 정도는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메인 스토리를 바꿀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큰 흐름을 알아야 뒤에 일어날 일들을 예상하기 편하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개연성이 필요해.’
‘개연성이라면 어떤?’
‘원작에서는 모든 게 사랑 때문이라고 하면 해결됐지만… 우리는 장르를 판타지 BL에서 판타지로 바꿀 거잖아? 황태자가 너를 곁에 두는 것도, 공작과 가까워지는 것도, 루크와 계약하는 것도 결국 필요한 일이야. 가진 게 얼굴밖에 없는 르웰린이 그 역할들을 해낼 수 있었던 건 그놈들이 사랑에 눈이 멀어 구애하느라 그런 거니까.’
‘능력이 필요하다….’
판타지 세계에서 최강이라고 하면 역시 마법인가 싶었지만. 이미 이 세계관에서 최강은 마탑주로 등장하는 세드릭이었다. 천재 소리를 듣는 아벨도 그의 앞에서는 평범할 정도라고 했는데, 내가 그걸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어중간할 거라면 검이 낫다. 어느 정도 굴러도 살아남을 체력과 근력이 절실했다.
“검을?”
“저는 기사가 되고 싶어요.”
놀라던 차남은 “형님처럼요.” 하는 말에 녹아내렸다. 당장 입부서를 가져오라는 걸 제임스가 미친놈이라고 일갈했다. 그러게. 내가 봐도 미친놈이다. 자기처럼 되고 싶다는 말에 멋대로 ‘그게 멋있어 보였다’는 뇌피셜을 추가한 차남이 장인을 부르겠다고 설쳤다. 목검이나 겨우 들 어린애한테 그딴 게 무슨 소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본인이 기분 좋아 보이니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를 말릴 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안정감을 주는 가슴에 기댔다.
“오래오래 사세요.”
죽지 말고, 희생도 하지 말고.
“이거 손주가 하는 말 아닙니까? 혹시 저거 하면 용돈 주시나요? 오래오래 사십쇼, 부단장.”
제임스는 차남이 보지도 않고 던진 펜에 맞았다.
“물론이야. 네 결혼식에도, 내 조카가 결혼하는 날에도 내가 검을 드는 게 내 목표인걸.”
결혼식 당일 신랑과 신부 측에서 한 명씩 나와 대결하는 제국의 전통을 입에 담으며 그가 웃었다. 죽음은 그와 거리가 먼 단어 같았다.
만약 원작을 바꾸는 게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에르켈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둘 다 일부러 입에 올리지 않은 질문이다.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불안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차남은 내가 검을 배우겠다고 한 게 마음에 들었는지 제임스에게 퇴근 통보를 하곤 부산스레 옷을 챙겨 입었다. 아무래도 문관인 장남과 마법사인 셋째를 제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집에 가서 그가 자랑하면 아버지와 장남, 그리고 셋째가 간식 뺏긴 개처럼 내 주위를 슬픈 눈으로 돌아다닐 게 뻔하다.
“누가 보면 간택당한 줄 알겠습니다.”
“적당히들 하고 들어가라고 해.”
“아이고…. 단장이야 그렇다 쳐도 셰인은요. 자기 대련 차례 왔다고 2주 전부터 목욕재계하는 거 못 봤어요?”
“응? 팔이 부러지면 한동안 검도 못 들 텐데.”
지금 잡아서 대련을 시키면 팔을 부러뜨려 버리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차남이 코트를 챙겼다. 제임스가 혀를 찼다.
“동생한테도 저러는 걸 보니 나중에 결혼하고 애 낳으면 은퇴하겠네.”
내 말이.
제임스의 말대로 저대로라면 결혼 후에 제 자식 낳으면 물고 빠느라 집 밖으로도 안 나올 것 같았다. 에드윌 백작보다 더한 아버지가 되겠지.
“가문은 형님이 이을 텐데 결혼을 굳이 왜 해? 그리고 나는 애 안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