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17)

#8

“예? 그건 뭔 헛소리예요. 동생께서도 애거든요.”

그러니까.

말문 트인 제임스가 자꾸 옳은 말만 했다. 속으로 차남과 제임스가 친한 게 끼리끼리 어울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임스에게 너무 실례되는 생각이었다. 그에게 소리 없이 사과했다.

“애가 아니라 르웰린이지. 내가 애를 가진다고 해서 르웰린을 낳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비장한 말투에 제임스가 으, 했다. 내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중증이었다. 이거, 시바, 설마 김민지가 근친 루트도 깔아 둔 거 아니야?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가 말한 ‘대륙의 무수한 남자들’ 중 가족도 포함되는 걸지도 모른다. 직접 말하면 내가 화낼까 봐 밑밥만 깔아 둔 거라면.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아냐. 시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막 나가지는 않겠지. 애써 가능성을 무시했다.

“그럼, 약혼녀는요?”

약혼이라니. 이건 조금 충격이었다.

아무리 집안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해도 가족이 약혼을 했는데도 모를 정도였나? 이건 좀… 내가 존나 쓰레기 같은데. 그러나 차남도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물음표만 띄웠다.

“약혼녀?”

“유스티아 영애요.”

난 또. 차남이 헛웃음을 지었다.

“집안끼리 친해서 얘기가 나온 거지 약혼을 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라일라는 비혼주의야. 그 앞에서 약혼 운운하면 장갑이 날아올걸.”

제국은 넓고 가문은 많아, 모든 가문을 알지는 못하지만 유스티아라면 알고 있었다. 후작이 아버지와 친해 자주 놀러 오기도 했거니와, ‘유스티아가의 라일라’라면 콧물 흘리는 어린애도 알 만큼 유명했다.

라일라 유스티아는 서부에서 이름 높은 함장이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에 오른 지 4년 만의 일이다. 여자가 기사가 되는 것도 흔치 않은데, 배에 올라 거친 생활을 한다니. 후작은 뒷목을 잡았고 후작 부인은 몸져누웠다. 평생 책만 볼 것처럼 생긴 그녀의 남동생인 윌리엄은 생긴 것만큼 심약해서 훌쩍이며 이러다 누님께 큰일이 나면 어떡하냐고 걱정했다.

그러나 그 거친 생활과 텃세를 이겨낸 라일라는 급기야 현장의 반대 없이 함장의 자리에 올랐다. 수도까지 떠들썩하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그녀가 취임한 후에는 해적들이 그 앞으로는 지나가지도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대로라면 무리 없이 제독까지 오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대를 걸쳐 걸출한 학자를 배출하긴 했어도, 이름난 기사가 나온 적은 없는 유스티아가에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실물을 본 적은 없지만 윌리엄이 보여 준 초상화 속 라일라는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물론… 그림이니까 실물과 달랐을 수도 있지만 윌은 그녀가 초상화와 똑같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누님바라기의 말은 믿을 게 못 되지만 저보다 한참 어린 내 앞에서 질질 짜는 윌리엄이 불쌍해 알겠다고 달랬다.

“영애께서 직접 그러셨습니까? 결혼하지 않겠다고?”

제임스의 목소리가 커졌다. 촉이 예리하게 섰다.

그도 라일라의 무수한 팬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윌이 서부에서 기념품을 판다며 화첩을 보여 준 적 있었다. 제목은 바다의 영웅들이었지만 실상은 라일라 유스티아 모음집이었다. 윌이 가지고 있는 건 한정판이랍시고 엄청 가격이 붙었던데. 웬만큼 팬심이 강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호갱’가였다. 하지만 어쩐지 제임스라면 그 호구 중 하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더라도 조신하게 내조할 남자가 어울리지 않겠어? 걔는 자기 동생 같은 사람 아니면 감당 못 할걸.”

조신, 내조, 조신, 내조. 제임스가 단어를 곱씹었다. 스타와의 연애를 꿈꾸는 부류의 팬이었군. 라일라가 차남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으니까, 제임스와는, 음. 몇 살 차이지? 잘 그을린 피부는 건강해 보였지만 나이를 가늠하기는 힘들었다. 스무 살부터 스물 중후반까지 아무 숫자나 넣어봐도 그럴듯했다.

차남은 그를 무시한 채 나를 안았다. 내 다리 근육이 약해지면 그건 다 차남 탓이다.

“배가 고프면 바로 식사를 하러 갈까?”

“아까 간식을 먹어서 괜찮아요. 구경하러 가고 싶어요.”

“그러면 그렇게 해야지.”

그래도 당장은 편하니까. 어차피 곧 운동도 시작할 거고.

*

예상대로 장남과 셋째는 내게 매달렸다. 셋째인 아벨 에드윌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대어 입문서’를 가져와 들이대며 이것만 외우면 마법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사기를 치려고 했다.

“문자를 읽을 수 있기만 하면 쉬워, 르웰린. 아카데미에 주문도 제대로 못 읽는 덜떨어진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애들도 졸업하면 마법사님 소리를 들으면서 대우받는다니까. 기사랑은 연봉 자체가 달라.”

어린이용으로 제작된 입문서는 표지도 아기자기하고 글자도 큼직했다. 대문자로 쓴 철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통통 움직이며 빛나는 모습이, 이것만 잘 보면 정말 나도 고대어 마스터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걸 안다. 안타깝게도 이미 원작자가 친절하게 가르쳐 준 덕이다.

고대어는 철자를 외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모음, 자음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도 않아 발음도 힘들고, 명사인지 동사인지 구분할 줄 알면 중등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법과는 별개로 고대어만 따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하니, 저걸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야 하는 마법사는 웬만한 머리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거다.

그가 말한 덜떨어진 놈들에 내가 포함되거나, 그마저도 들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아벨 에드윌은 아카데미 마법학부에서 36년 만에 등장한 세 번째 조기 졸업자였다. 천재의 기준을 믿었다간 뱁새 다리가 찢어진다.

물론… 돈 얘기는 좀 혹했다. 셋째는 형제 중 제일 현실 감각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급기야 내 방 천장에 별자리를 만들어 준 아벨은 내 침대를 차지하고 나를 끌어안은 채 ‘정말 멋지지 않니, 르웰린?’ 했다. 차남이 타운 하우스에서 나와 함께 잤다는 얘기를 들은 게 틀림없었다. 실제보다 반짝이는 별, 벽을 타고 점점 어두워져 마침내 밤하늘이 된 천장, 부유하는 구름은 아름다웠지만 내가 마법을 배워 봤자 저런 걸 해낼 자신이 없었다.

포기하지 못한 셋째가 더 혹할 만한 마법을 가져오겠다고 뛰쳐나가자 슬금슬금 다가온 건 장남과 백작이었다. 아벨이 온갖 화려한 모습을 보여 준 것과 달리 가져올 게 딱히 없었던 둘은 커흠흠, 민망한 헛기침을 했다.

“르웰린, 세상을 살면서 중요한 것은 안정성이란다. 인생에는 언제나 기로가 있기 마련이고, 너는 언젠가 선택을 해야겠지. 위험한 시도를 해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고 해도 돌아올 수 있는 힘. 그것을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버티고 있는 안정성이 필요하지.”

백작이 장남을 뿌듯하게 쳐다보았다. 입 터는 걸 보니 케일 에드윌이 지옥의 주둥아리라는 소문이 진짜인 모양이다. 그 별명 자체는 뒤에서 깎아내리려는 루머겠지만 확실히 혀가 굴러가는 것 하나는 기름 한 병을 삼킨 듯 매끄러웠다. 장남이 홈쇼핑에 나왔으면 연속 완판의 전설을 세우는 쇼 호스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부분에 있어 마법, 검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펜의 힘이지. 많은 이들이 선택했다 해서 정답이라는 법은 없지만, 하나의 지침으로 여길 수는 있지 않겠니? 물론, 나는 네가 어떤 길을 선택해도 너를 응원하고 사랑할 테지만. 가끔은 그런 미래를 꿈꾸곤 한다. 르웰린 너와 함께 일하고,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모습을 말이야. 아벨과 레오와도 종종 함께하겠지만, 그 둘은 이미 자신의 길을 선택해 나아가고 있으니.”

논리로 시작해 감정 호소로 이어 나가는 스킬이 대단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망할. 에드윌가 사람들은 이미 내 장래에 대한 선택을 경쟁하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이건 경쟁도 아니고, 시합도 아니었다. 내가 케일만큼 말솜씨가 좋았다면 모를까. 말로 천 냥 빚을 갚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입을 열기 전에 칼 맞아 뒤지면 소용이 없다.

정치, 행정, 외국어, 복잡한 계산을 한 번에 해내는 능력. 전부 르웰린 에드윌이 되기 전에 도전했지만 고만고만한 성적을 받은 것이다. 그나마 몸 굴리는 것이 제일 나으니 살길 찾아 검을 선택하겠다는데 이들은 왜 이리 끈덕질까.

“하지만, 형님… 그러면….”

“응?”

“제가 검을 배우면… 형님과 함께할 수 없는 건가요? 저도 그냥… 종종이 되는 건가요?”

아쉬움을 나타내는 강수가 반격으로 돌아오자 케일이 급하게 나를 안고 달랬다.

“물론 아니지. 절대 아니란다.”

“그치만….”

“말했잖니, 르웰린. 네 선택을 존중할 거야. 아벨과 나는… 단지 네게 다른 방향도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란다. 검을 배운다고 해서 꼭 기사가 될 필요는 없어.”

“웅….”

그건 맞는 말이긴 해. 내 목표는 웬만한 수난과 역경에도 살아남는 거지, 검으로 제국을 제패하겠다는 게 아니니까. 최종적으로 건강하고, 적당히 강하고, 돈 많은 백수가 되면 최고지.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