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놀이 친구들이 황성에 와서 정규 수업을 듣는 건 일주일에 네 번이지만, 특별한 일정이 잡히지 않는다면 보통 두 번 더 입궁해 총 6일을 함께 보낸다. 가족들보다 꼬맹이들 얼굴을 자주 볼 지경이니 친밀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젠체해 봤자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인 데다, 에르켈과 친밀하게 지내기 위해 들어온 공통의 목적을 가졌으니 친해지지 않기가 더 어렵긴 하다.
나는 오늘의 간식으로 나온 레몬 무스 케이크를 떠먹으며 휴식 시간을 알차게 보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제일 튀는 금발을, 아, 그래. 르웰린도 옅은 금발이지만 내 눈에 보이지는 않으니까 제외하고. 눈에 보이는 것 중 제일 선명한 금발을 가진 녀석이 클로이 후작의 조카인 루이스 클로이.
예쁘장한 얼굴 외에 특별한 점 없는 딱 열 살 꼬맹이였다. 미운 네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을 거쳐 이제 사회의 일원이 되어 가는 과정에 놓인 철부지.
그리고 그 옆에서 발을 흔들며 스무디를 먹는 게 외무 장관 루스터 백작의 외동아들인 에이든 루스터. 이쪽은 클로이에 비해 할 말이 많다. 잘나서는 아니고, 좀… 모자란 걸로.
어머니인 백작이 처녀 시절부터 남들 다 힘들다는 외교에 뛰어들어 이제는 그 분야를 잡고 흔드는 여걸인 데에 비해 아버지는 평범에도 좀 못 미쳤다. 매사에 조심성 많고 예민한 그는 능력도 없었다. 가진 거라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백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절처럼 사슴처럼 빛나는 눈망울뿐이었으니, 그 둘의 결혼이 연애결혼이라는 점이 이 중 제일 놀라운 일이다.
가문, 능력 모두 떨어지고 가진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남자를 선택한 백작의 이야기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될 만큼 유명했다. 문제는 요즘 그 이야기가 다시 새어 나오는 건 둘의 아름다운 사랑을 축복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루스터가 적자이자 장자이며 독자인 에이든 루스터 때문이다. 백작가 후계자가 제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는 이야기가 가벼운 농담처럼 퍼지고 있었다.
백작의 시름이 나날이 깊어 갈 수밖에. 하나뿐인 아들이 남편을 닮았다는 것이 더 슬픈지, 그 이야기에 슬퍼해야 하는 것이 더 슬픈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소문과 실제를 비교하면 실제가 더 못났으니,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에이든 루스터는 겁이 많고, 소심한 데다, 심지어 눈물도 많았다. 눈을 불안하게 굴리는 거야 귀엽다고 봐줄 만해도, 긴장할 때마다 목과 어깨를 움츠리거나 말을 더듬는 건 예절 선생이 매번 지적해도 바뀌지 않았다. 그나마 에르켈이 그의 편을 들어 주며 상냥하게 대한 덕에 상태가 나아진 편이었다.
우리 중 제일 신분이 높은 에르켈이 그를 다정하게 대하자 나머지도 당연히 그랬다. 그런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이제 우리끼리 있을 때는 가끔 농담도 하면서 웃었다. 처음에는 나를 보면서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 내뱉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예절 선생도 굳이 그를 엄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혹시 그가 에르켈의 어머니인 로웨나에게 곧이곧대로 보고해 에이든이 궁에 못 오는 건 아닌지 가슴 졸였는데. 다행이다. 로웨나가 유순한 편이라곤 해도 귀족 영애로 태어나 궁에 들어온 사람이다. 제 아들 옆에 에이든 같은 녀석이 있는 걸 두고 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기서 에르켈과 체스를 두고 있는 검은 머리가 딜런 백작가 차남 엘리엇 딜런이었다.
나이는 나머지보다 한 살 많은 열하나였는데, 하는 짓을 보면 영 귀여운 구석이 없었다. 세상만사 관심 없다는 듯 뚱하고 시니컬한 태도에 또래보다 큰 키가 더해지자 나이가 두세 살은 더 많아 보이기까지 했다. 놀랍지 않게도 에이든이 넷 중 제일 무서워하는 상대이기도 했다.
“제가 이겼습니다.”
4연승을 거둔 엘리엇이 입꼬리를 씨익 올려 웃었다. 말투는 공손한데 미소는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네 번을 연속으로 패배한 에르켈이 죽은 킹을 우울하게 집었다. 내 앞이었다면 우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엎어지거나, 한 번 더 해 보자고 칭얼거렸을 텐데. 어리고 입이 가벼운 귀족들 앞에서 이미지 관리 중인 에르켈은 다정하고 상냥한 황자 역할을 곧잘 해냈다.
“인정사정없구나, 엘리엇….”
“봐주지 말라 하시기에.”
분야를 막론하고 황족은 늘 최고여야 한다. 때문에 황자의 놀이 친구들은 본인의 재량에 상관없이 황족에게 져주는 게 암묵적이며 절대적인 룰이었다.
덕분에 체스나 카드 따위를 할 때면 거의 다 이긴 게임이어도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함께 지곤 했고, 제일 손을 많이 들며 칭찬받기 위해 노력하는 루스터도 수업 중반을 넘어가면 눈치를 보며 딴청을 피운다. 놀이 친구들이 적당히 뛰어나지만, 너무 빼어나지 않은 답안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부여잡는 사이 에르켈이 최선을 다해 답안을 쓰면 선생들이 알아서 에르켈의 답에서 칭찬할 만한 부분을 쥐어짜는 식이다.
다행히 에르켈이 진짜 열 살이 아니라 말귀를 잘 알아먹는 덕에 그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매번 이기기만 하는 게임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것도 성인이 어린애를 상대로.
에르켈은 엘리엇의 자존심을 살살 건드리며 져 주지 말 것을 부추겼다.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을 것이며, 이건 그냥 재미로 하는 게임일 뿐이고, 방에 있는 건 우리 넷뿐이니 걱정 말라고 몇 차례나 어필하자 엘리엇이 한참 고민하는 척하다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열한 살 치고 잘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엘리엇 딜런은 현대에 태어났어도 체스 챔피언이 되는 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게임을 잘했다. 그는 이길 때마다 화내지 말라는 듯 “봐주지 말라고 하셔서 열심히 해 봤습니다.”라고 말했다. 상대의 속이 끓어오르게 만드는 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놈이었다. 저 가문의 교육 방식이 궁금해질 지경이다.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간격을 두고 문을 두드리는 힘이 정확했다. 외부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을 만큼 두꺼운 황궁의 문을 저렇게 일정하게 두드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요령이 필요했다.
“전하.”
4황자 궁을 드나드는 사이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에르켈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시녀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다 먹은 접시와 컵을 치우고, 새 주전부리를 꺼내준 시녀들이 책상을 반듯하게 각 잡아 맞췄다. 제일 앞으로 나와 인사하는 시녀장의 왼쪽 가슴에 달린 연녹색 브로치가 반짝였다. 브로치는 궁마다 두 명, 그러니까 시종장과 시녀장만 달 수 있는 특권이었다.
4황자 궁의 상징인 레브라트를 단 시녀장 멜레니크 아델로아는 내가 상상한 시녀장의 이미지와 달리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틀어 올린 적갈색 머리는 윤기가 흘렀고, 섬세한 눈썹과 또렷한 눈매는 총명해 보였다. 과연 후궁의 신임을 얻어 일찍 시녀장 자리를 꿰찰 만큼 똑 부러진 사람이다.
“무슨 일이지?”
“아니글란 경이 오셨습니다.”
동시에 모두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루이스가 믿지도 않는 신에게 짧게 기도 올리며 “제발 빨리 끝나거나, 덜 지루하거나, 오늘의 아니글란 경에게 급한 일이 있길.” 하고 빌었다. 개중 그나마 확률이 높은 건 마지막일 테다.
“선생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경께 들어오라고 전해.”
멜레니크 아델로아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나는 휴식 시간의 마지막을 즐기며 새로 따라준 주스를 쭉 빨았다. 아델로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염소 수염의 깐깐해 보이는 50대 남성이 들어왔다. 얇은 금색 안경테는 그가 더 예민해 보이게 만들었다.
사실 황자의 놀이 친구라는 건 꽤 고단한 직책이었다.
그래 봤자 초등학생 나이의 애들을 모아 두고 놀이 친구라는 이름을 붙여 뒀으니 몰려다니면서 가벼운 운동이나 하거나, 잡담을 나눌 거라는 기대는 와장창 깨졌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수업은 점심시간 전까지 이어졌고, 오후 수업 일정도 있었다. 그나마 중간중간 휴식 시간과 복습 시간이라는 이름의 합법적 땡땡이 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수학, 역사, 예술, 문학을 막론하고 제국 최고라고 불리는 이들이 선생이었으니 수업의 질은 말할 것도 없이 뛰어났다. 문제는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뛰어난 지성과 열정을 가진 학부생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학생 정도, 아니. 10대 후반만 됐어도 그들의 말을 경청했을 가능성이 높겠다. 그러나 고작 열 살 남짓한 어린애들이 듣기에 제국 최고 지성인들의 강의는 너무 어렵고, 따분하고, 지겨웠다.
그들 사이에서 발군의 통솔력을 보이는 건 아카데미 강사 출신이라는 제프리였다.
아카데미에서 자존심 강하고 말 안 듣는 어린 귀족들을 통솔하며 강의한 짬일까. 그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쉽게 설명하는 일에 도가 튼 것처럼 보였다. 학생들이 자신의 말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 익숙한 듯 우리의 무지를 확신하고 설명했다. 가끔은 내가 1 더하기 1도 몰라서 그의 도움이 필요한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지루해지는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수업과 관계없는 이야깃거리로 흥미를 끌기도 했다.
주제는 주로 아카데미 생활에 관련된 거였는데, 열한 살에 입학을 앞둔 루이스와 에이든은 관심을 나타내며 그를 보챘다.
그런 제프리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 역사를 담당하는 아니글란이다. 그는 황제에게 직위를 받을 만큼 명성 높은 학자였고, 자신이 쌓아 온 지식만큼 완고하고 깐깐했다. 마법이 존재하는 이 세계가 신기해 귀를 기울이던 것도 잠시. 내가 원래도 암기할 게 많은 역사 파트에는 영 젬병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