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17)

#10

시작할 때 빳빳하게 세운 허리와 빛나던 눈은 수업을 시작한 지 20분 만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쪽 귀로 들어온 말이 반대쪽 귀로 빠져나가며 내 영혼도 반쯤 공중으로 분해됐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어 보고, 허벅지를 찔러도 봤지만 모두 잠깐일 뿐이었다. 나중에는 깨알보다 작은 글씨들이 멋대로 춤추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수험생활을 지나며 오래 앉아 있는 일에 익숙한 내가 그 모양이니 다른 애들은 더 견디기 힘들어했다.

수학 수업에서는 제프리의 칭찬을 독차지하던 엘리엇은 따분해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딱 열 살에 걸맞은 집중력을 가진 루이스는 턱을 괴고 다리를 흔들었다. 에이든은 깐깐한 아니글란을 무서워해 쉽게 자세를 흩트리지 못했지만, 이미 눈이 퀭했다. 그리고 그 몸부림 속에서 에르켈은 홀로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의 수업이 지루하다는 인식은 있었던 건지, 아니글란은 에르켈의 태도에 제법 감명받은 듯했다. 드물게 황자의 태도를 칭찬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에르켈이 자신의 염소수염을 보며 리본을 묶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단 것도 모르고.

“그때부터 시작된 랑그사의 이론은 이후 경제,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강의할 때 아니글란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당장 그의 목소리를 녹음해 ASMR로 업로드하면 이걸 듣고 불면증도 고쳤다는 후기가 속출할 것이다.

언제나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는 궁, 점심 직후의 수업, 그리고 평온한 목소리. 낮잠을 위한 조건은 모조리 갖추었다. 급기야 에이든은 머리를 꾸벅꾸벅 떨구며 졸기 시작했고, 루이스의 눈도 반쯤 감겼다.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찬 아니글란이 책을 덮었다.

지금까지는 졸든, 멍 때리든 신경 쓰지 않고 진도만 나가더니. 다른 강사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수업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잠시 환기를 해 보죠.”

그냥 일찍 끝내 주면 좋을 텐데. 아니, 잠시 휴식이라고만 해도 좋았을 거다. 꿀 같은 휴식을 보낸 학생들은 전보다 올라간 호감도로 그를 대하겠지. 그래도 그간의 수업을 생각하면 많이 발전했다.

“그나마 제일 잘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해 논해 볼까 합니다.”

멍하게 풀어졌던 클로이의 눈이 빛났다.

“신화시대요?”

아니글란이 클로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딜런도 부스스 일어나 다시 펜을 들었다. 우습지만 나도 갑자기 흥미가 솟았다. 역사는 지루하고 따분하며, 외울 게 많은 과목이지만, 괜히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이 많은 게 아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잘 꾸민다면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아니글란이 꺼내 든 건 제국 역사에서 제일 재미있는 파트였다.

신화시대라는 건 아직 신과 용이 대륙 위에 있을 때. 초대 황제 사르바잔의 일대기를 그린 내용이었다. 건국 신화가 으레 그렇듯 허무맹랑한 과장과 극적인 러브스토리가 더해졌지만, 원래 극적일수록 사람들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긴 제국의 역사에서 언제나 첫 장을 장식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아는 한 대부분의 역사서는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죠. ‘위대한 왕 사르바잔을 기리며.’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책에도 있을 겁니다.”

살아난 클로이가 기대를 숨기지 않고 페이지를 넘겼다. 아니글란의 말대로 두꺼운 책의 앞장은 사르바잔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사르바잔은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태양신 야캅도 있었습니다. 역사학자 사브룬이 쓰고, 그 제자 시미니튼이 엮은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죠. ‘그중 태양의 신 야캅이 사르바잔을 깊이 사랑했고,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사르바잔이 마왕을 죽이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하자, 야캅은 그를 일주일간 잠들게 한 후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르바잔을 구할 방법을 찾았다.’”

발을 까딱이며 듣던 루이스는 야캅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손을 번쩍 들었다. 아니글란은 수업 중 처음으로 자진해서 손을 든 어린 제자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었다.

“황후가 된 로벨렛께서 야캅이라는 설이 진짜인가요?”

초대 황제 사르바잔과 황후 로벨렛의 사랑 이야기는 연극의 단골 소재였다. 사르바잔이 죽음 앞에서 로벨렛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용기 있는 황후가 죽음과 거래해 연인을 살려낸 이야기는 신화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인기를 구사했다.

그러나 역사서는 로벨렛의 이전 행방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때문에 초대 황후에 대해서는 온갖 가설이 난무했다. 그중 제일 유명한 설은 사실 로벨렛이 태양신 야캅이라는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인간을 너무 사랑한 신이 그를 살리기 위해 죽음에게 불멸을 헌납하고, 사르바잔과 함께 살다 인간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떨떠름했다. 확실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로맨틱하긴 하지만, 너무 한쪽만 일방적으로 희생한 사랑을 마냥 아름답다 칭송하기에는 좀.

“정사에 기록된 내용은 아닙니다만….”

아니글란이 말을 끌었다. 학자로서 정확한 역사를 언급해야 할지, 어린 귀족과 황자의 스승으로서 학생들의 흥미를 끌어 수업을 계속해 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일 테다.

“단순한 야사라기에는 유력한 설이 있기에 신화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죠. 그걸 헨-로베르 설이라고 하는데, 이 분야의 대표 학자인 세스텁은 황족 중에서도 직계에만 드물게 나타나는 붉은 금발과 적안이 태양신의 핏줄을 이은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에르켈에게 시선이 갔다. 아니글란이 말한 증거는 찾아볼 수 없는 갈색 머리.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엘리엇과 시선이 마주쳤다. 에르켈은 의연하게 앞을 보고 있었다.

황태자의 모친은 몇 년 전 지병을 앓다 사망한 데다, 그녀의 오빠인 백작은 피 터지는 정쟁에 끼어들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이렇다 할 외가 세력 없이 황위를 두고 싸우게 된 황태자지만, 1황자가 황태자가 되는 걸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글란이 말한 증거를 둘 다 충족하는 건 황제의 자식 중 페르온 아카레온이 유일했던 탓이다.

신과 용, 영웅의 시대는 끝났지만, 제국인들은 여전히 신화를 기억했다. 붉은 금발과 적안은 곧 위대한 왕의 흔적. 황후 소생의 황자가 없는 상황에서 1황자이기까지 하니 조건은 충분했다. 듣기로는 능력도 있다고 하니까.

나는 사람 같지 않은 얼굴로 싸하게 웃던 황태자를 떠올렸다. 고작 열네 살이 무슨 능력을 그렇게까지 보여 줄까 싶다가도, 그를 떠올리면 어쩐지 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사르바잔은 야캅에게 받은 물건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거였는지 밝혀진 바는 없는 건가?”

루이스에 이어 질문한 건 에르켈이었다. 얘들은 오늘 수업을 사르바잔 이야기로 마무리 지을 각오를 한 게 틀림없었다.

“예. 해당하는 문장의 표현이 모호한 데다, 전승마다 구현이 달라 무엇이 맞다 확정 짓기 힘듭니다.”

“경의 생각은 어떻지?”

“송구하지만, 전하. 여러 설에 대해 설명할 수는 있어도 개인적 견해를 덧붙이는 일은 학생에게 마치 그것이 정론인 것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기에….”

“역사란 결국 사실과 기록을 총합한 것이 아닌가. 기록이란 객관적으로 쓰려고 해도 결국 쓴 사람의 견해가 들어가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사브룬의 시점을 토대로 역사를 배우는 것인데, 그것은 괜찮은 건가?”

학자의 눈이 안경알 너머로 빛났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히 제 사견을 읊어도 괜찮겠습니까.”

“허락하지.”

“신화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용이 황가를 수호할 것을 맹약한 후 사르바잔은 야캅에게 받은 선물을 넷으로 나눕니다. ‘사르바잔이 야캅에게서 받은 물건을 넷으로 나누자 그것들은 각각 죽은 자를 살리고, 운명을 바꾸고, 진실을 비추고, 무엇이든 벨 수 있게 되었다. 지혜롭고 위대한 왕은 하나는 가장 강한 자에게, 하나는 가장 정직한 자에게, 하나는 가장 현명한 자에게, 하나는 가장 영리한 자에게 주었다.’”

“원래도 네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능력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게 합당하겠습니다. 다만, 나누어지기 전에는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지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원형이 신의 물건이니, 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더 이상 대륙에 그토록 강한 힘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넷으로 나누어 봉인하지 않았을까….”

“그럼 그 성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죠?”

꼬맹이들은 번갈아 가며 손을 들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열렬한 수업 참가에 학자의 입이 바빠졌다.

03. 사과를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의 나쁜 예

토기가 밀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한 건 오래전 일이고, 폐는 터질 것 같았다. 이미 달리는 속도는 느려져 걷는 것만 못했다.

어린애가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그만하라는 말이 나올 때도 됐지만 연무장 중앙에 서 있는 남자는 무심할 뿐이었다. 이런 광경은 익숙하다는 태도였다.

“반 바퀴 남았다.”

호의와 친절 속에서 살아온 몸은 약했다. 연무장이 제법 넓기는 했지만, 고작 일곱 바퀴를 달렸다고 이렇게 지칠 줄은 몰랐는데. 이미 몸은 지쳐 발을 이끄는 것은 한 줌 남은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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