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17)

#11

기다시피 반 바퀴를 마저 돈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지금 숨을 제대로 내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계단을 내려갔다간 구를 것 같다. 웨엑, 나올 것도 없이 헛구역질을 했지만, 몸을 비틀 힘도 남아 있지 않아 다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에드워드 스펠먼.

오랫동안 제국 황실을 수호하는 네 개 기사단의 총대장을 맡다 은퇴한 그는 황자의 검술 선생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검을 섞는 것, 아니, 그에게 자신의 검을 보이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는 살아 있는 전설을 궁에 붙들어 놓기 위해 황제가 온갖 설득과 회유를 시도했다는 것은 에르켈에게 들었다. 그는 원작에서도 황태자의 편에 서서 굳건하게 지지해 주는 스승이었다.

그런데 황제도 매달리게 만들고, 황자 중에서도 황태자만 골라 가르치는 귀한 몸이 내 앞에 서 있는 이유가 뭐냐고? 시발, 당연히 황태자 새끼 때문이다.

형님처럼 기사가 되겠다고 했지만, 레오폴드 에드윌에게 검을 배운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정식 기사가 되고, 스무 살에 부단장 임명을 받은 놈이 정상인의 범주에 들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선생을 불러 달라는 내 요청을 무시한 그는 잔뜩 흥분해서 나를 연습장에 데려갔다. 그리고는 연습용 검으로 베기, 찌르기 따위를 보여 주었다. 확실히 기사다운 기세에 감탄했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자랑하는 건가? 멀뚱히 서 있는 내게 차남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쉽지? 따라 해 볼래?’

‘네?’

자랑이 아니라 기만이었나.

하지만 그렇다기에 차남은 잔뜩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한 번 보여 준 걸로 따라 하라는 거야, 설마? 어이가 없다 못해 그가 나를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차남은 내 심정도 모르고 ‘교본 내용은 빠르게 넘어가자!’ 하고 있었다. 저 새끼는 진심이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걸 보고 한 번에 성공해내는 영재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걸 해낼 수 있는 몸이었으면 르웰린 에드윌이 그렇게 구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실 기사단에 들어갔다는 설정은 있지만, 그마저도 황태자와 자주 붙어 있을 근거에 불과했다.

‘낙하산이었지, 우리 르웰린은….’

에르켈의 아련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속으로 욕을 삼켰다. 명색이 주인공인데. 제대로 된 능력 좀 주라고. 남자 홀리는 얼굴 같은 거 말고.

나는 차남과 함께 가 제작한 가검을 들었다. 각인을 해 준다는 상술에 넘어가 추가금을 내고 구입한 가검은 제법 길었지만 가벼워 어린애가 들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가게에서 추천한 온갖 아티팩트를 다 사려는 걸 말리길 잘했다. 마법 처리로 끝이 뭉툭하지만 겉보기에는 날카로운 검날이 햇빛 아래 빛났다.

기대는 없지만, 혹시 모르지.

숨을 고르는 동안 아주 잠깐, 짧게 기대가 스쳐 지나갔다. 기대하는 눈빛에 기대 이상으로 부응하는 주인공의 모습, 그런 거. 판타지에 흔하게 나오잖아. 그러나 현실은 참담해서, 허공을 그은 회심의 일격은 어설펐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차남은 당황했다. 참고로 그 당황이 더 빡쳤다. “더 느리게 보여 줄까?”를 몇 번 반복하던 그날의 연습은 그에게는 충격을, 내게는 상처만을 남겼다. 훌륭한 기사라고 해서 훌륭한 스승인 것은 아니었다.

애한테 무슨 짓이냐고 잔뜩 구박받으며 셋째와 장남 사이에서 눈총을 받은 차남은 기가 죽었다. 아벨은 그를 보며 ‘에이잉, 쯧!’ 하고 혀를 찼다. 요즘 마탑에 다니더니 그쪽 말투가 옮아온 것 같았다.

백작은 자기가 괜찮은 선생을 알아봐 주겠다고 들떴다.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동원해서라도 선생을 찾아올 기세였다. 제임스를 보고난 후 차남의 주변인에 대한 기대를 버렸기에 그가 정신 차리기 전에 좋다고 대답했다. 그는 신나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추천 리스트까지 뽑았다. 개중 북부 디멘시온의 조슈아 브레티가 있는 걸 본 나는 당황했지만 나와 같이 당황해 줘야 할 장남은 ‘그렇죠. 브레티 경이라면….’ 하며 도리어 백작과 함께 그를 데려올 방법을 논의했다.

조슈아 브레티는 젊고 유능한 기사들 중에서도 특출난 천재였다. 유명세로 보자면 몇 년 후 나타날 세기의 마법사 세드릭 클라인 정도는 돼야 비교할 수 있을 거였다. 어린 탓인지, 북부의 폐쇄성 탓인지 후에 공작이 되어 르웰린과 읏쌰읏쌰 할 카르윈 디멘시온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들려오지 않았다.

에르켈이 넘긴 ‘스토리’에는 성인이 된 후 디멘시온 공작이 대륙 제일의 검이라는 뻑적지근한 호칭을 얻었음에도 일각에서는 조슈아 브레티가 디멘시온가에 충성을 맹세해 일부러 제 주인보다 몸을 낮추었다는 야사도 있었다. 진행에 필요 없는 설정은 왜 굳이 적어 준 건지 모르겠지만 에르켈은 그게 직업병이라고 했다.

백작은 기어코 조슈아 브레티를 포기하지 못하고 북부에 구구절절한 편지를 보냈다. 욕이나 돌아오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대공은 고려해 보겠다고 애매한 답을 내놨다. 케일이 당장 자기가 직접 디멘시온 성문을 두드려야겠다고 나서는 걸 말리느라 고생했다.

평소 제일 차분하고 이성적이면서. 핏줄은 어디 안 간다는 걸 이렇게 보여 줄 줄이야.

“그래서 진짜 브레티 경이 올 수도 있다고?”

잔뜩 흥분한 루이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국에서 이름 높은 검사는 현대의 스포츠 스타 같은 존재였다. 그중에서도 조슈아 브레티 정도면, 당대 최고의 네임드였고.

비유하자면 프리미엄 리그에서 뛰는 유명 축구 선수가 초등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오는 급이랄까. 평소에 말수가 적은 에이든과 엘리엇조차 들뜬 상태였다.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듯했다.

“언제? 언제쯤 오실까? 온다면 얼굴은 볼 수 있겠지? 응? 르웰린!”

“진정해.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니란 말이야.”

“어떻게 진정할 수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브레티 경인데. 북부의 영웅을 직접 보게 될 수도 있다니. 나는 평생 그가 수도에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 뒤로도 루이스는 만약 더 커서 검을 배운다면 자기도 디멘시온가에 가 보는 게 꿈이었다는 둥, 역시 디멘시온의 상징인 매가 새겨진 검이 제일 멋있지 않냐는 둥 떠들었다. 처음에는 나름 새초롬한 녀석이었는데. 갈수록 말이 많아진다.

“알겠으니까 얼른 움직이자고.”

결국 엘리엇이 짜증을 내자 루이스의 입술이 불퉁 튀어나왔다. 척 봐도 성격 있는 엘리엇과 슬쩍 봐선 마냥 하이텐션인 루이스는 자주 투닥거렸다. 저러면서도 크게 싸운 적 없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우리는 넓다는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황성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언젠가의 소원을 이뤄 주듯, 갑자기 아니글란에게 급한 일이 생긴 덕이다. 거기까지라면 두 손을 들고 환영했을 텐데. 그는 수업을 미루면서도 과제를 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바로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도서관에 가는 중이었다. 평소였다면 사람을 시켰겠지만, 분위기를 전환할 겸 가 보는 건 어떻겠냐는 에르켈의 제안 덕이다. 정작 본인은 일이 생겼다고 쏙 빠졌다.

이렇게 시끄럽고 말 많은 애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도 되나. 현장 학습에 애들을 데리고 가는 초등학교 교사의 심정을 절절하게 이해했다.

미리 출발한 시종을 통해 얘기를 들은 사서장이 나와 있었다. 푸근한 인상의 노인은 웃으며 우리에게 칭찬을 쏟았다. 제국 모든 책이 들어온다는 도서관 본관의 사서장답게 혀에 기름칠이 보통이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노골적인 기름칠을 제일 잘 넘기는 건 엘리엇이었다. 그는 평소의 시큰둥한 태도를 접고 느긋하고 거만하게 굴었다.

애들이 떠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자꾸 제 나이에 맞게 굴어서 잊게 되는데, 생각해 보니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점잖고 조용한 애들이었다. 애들은 황자의 놀이 친구라는 신분을 잊지 않고 사서가 주의를 주기 전에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과연 가문의 이름을 달고 궁에 들어올 만했다.

물론 외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세워진 허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럿이 책을 읽도록 회의실처럼 빼 둔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가져온 게 외국어 책일까?”

루이스의 눈 아래가 퀭했다. 짧은 시간 동안 바싹 말라버린 모양이다. 그가 펼친 책은 ‘제국을 바꾼 12가지 역사’였다. 종이 위로 벌레가 기어가듯 꼬불꼬불한 필체였지만, 일단 제국어는 맞다. ‘자본의 방식’을 읽던 엘리엇이 책을 내려놓았다.

“하나는 확실해. 이게 외국어든 제국어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떼고 남는 건 거기서 거기라는 거지.”

머리를 뜯던 루이스가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는 열심히 휘갈기던 펜을 멈추고 과제물을 끌어왔다.

“르웰린.”

“안 돼.”

“르웰리이인.”

“안 된다니까. 또 도와주면 너무 티 나잖아.”

우리 중 성적이 제일 좋은 건 당연히 에르켈이다. 어떻게 써도 만점을 줄 선생과 그보다 못한 성적을 내기 위해 노력한 놀이 친구들, 그 사이에서 열심히 한 에르켈의 합작이다. 어렵다 어렵다 해도 열 살 어린애들 사이에서 정말 학업 성취도가 떨어질 리도 없고.

하지만 황자에게 과제를 보여 달라고 매달릴 수도 없을뿐더러 이 자리에 있지도 않다. 남은 건 비교적 만만한 나다. 외동인 에이든을 빼면 모두 형제 중 막내인데, 그중에서도 제일 막내다운 건 위로 누나들만 줄줄이 있는 루이스다. 애교스럽게 말을 늘이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눈을 깜빡이는 스킬이 장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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