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황태자는 핏기가 질린 나를 보며 친절하게도, 존나 상냥하게도 ‘자연적으로 피가 멎지 않을 테니 잘 막고 있도록 해.’ 하고 알려 주었다. 황족의 검은 페스켓이라는 특수 금속으로 도금해 상처가 낫지 않는다고.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다행히 재킷이 좀 더러워지긴 했어도 색이 어두워 피 묻은 셔츠를 가려 주었고, 목까지 올라와 잠그는 형태라 상처도 바로 보이지 않았다. 4황자 궁에 접어들자 힘 빠지던 걸음도 다시 급해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사용인들과 마주치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왕이면 에르켈과 바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다행히 에르켈은 아니어도 익숙한 얼굴은 보였다. 시녀장 아델로아였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차분한 남색 드레스를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전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쿨하게 벗어나려는데 비틀거렸다. 위아래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넘어질 뻔한 걸 황태자가 붙잡았다. 팔이 붙잡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깐 까맣게 점멸됐다 돌아온 시야에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이 보였다. 옅은 하늘색이었던 손수건은 새빨갛게 물들어 원래 색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느리게, 어쩐지 그것과 가까워진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
팔을 붙잡았는데, 몸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조용한 궁에 울리기에는 충분했다. 4황자 궁의 시녀장인 멜레니크 아델로아는 기민하게 소란을 눈치챘다.
매일 상태를 점검하며 가지 하나도 신중하게 자르는 화원을 짓밟고 나온 사람이 있는 것으로도 소리를 지를 일인데, 그 정체는 더 심상치 않았다. 아델로아는 황제까지 제국에 딱 세 명 존재하는 붉은 금발을 보고 빠르게 다가갔다.
황태자가 이곳에는 또 무슨 일로. 궁의 살림을 책임지는 머리가 빠르게 굴렀다. 이전에도 예상치 못한 방문이 있었지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황태자는 동생들에게 관심을 주고 찾아올 만큼 너그럽고 인정 넘치는 형제가 아니었다.
다가가던 아델로아는 황태자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인영이 익숙하다는 걸 알아보았다. 옅은 백금발과 어린 몸. 4황자 궁에 매일같이 드나드는 소년이다.
본 것도 보지 못한 척, 듣고도 듣지 못한 척하는 건 궁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한 기본 덕목이다. 아델로아는 황태자가 여유롭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며 치마를 잡고 인사했다. 바로 앞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롭고 산뜻한 인사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에르켈은?”
“조금 전 돌아와 방에 계십니다.”
다행히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가는 결례는 범하지 않아도 되겠어. 농담 같지 않은 말을 농담처럼 하며 황태자가 붙잡고 있던 팔을 위로 끌었다. 상체가 들어 올려지며 정신 잃은 머리가 뒤로 꺾였다. 황태자의 품에 안겨 있던 고양이가 에옹 울어댔다.
아델로아는 인형처럼 덜렁거리는 몸을 대신 안아 일으켰다. 구두를 신고 무거운 책과 장식도 들고 다니는 그녀에게 어린애 하나 정도는 가뿐, 하지는 않았다. 정신을 완전히 잃은 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잠깐 심호흡 후에 엉덩이를 받치고 안아 들자 황태자가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듯 웃었다.
“눈을 피해서 가.”
“전하, 께서는. 돌아가시나요?”
“내가 머무를 필요가 있겠어?”
높은 분들의 말에는 괜히 토 달지 않는 게 편하다. 입은 무겁고, 귀는 어두운 게 아델로아가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다.
*
눈꺼풀이 무거웠다. 높은 천정과 끝을 모르게 넓은 침대, 두꺼운 커튼. 사방에 달린 야광석이 은은하게 빛나며 무드 등 역할을 했다. 낯선 침구에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누웠다. 고작 그걸 움직였다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불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몸에 힘이 없다. 몸살이 난 것처럼 살에 뭔가 닿는 것만으로 아팠다. 고작 목 좀 긁힌 것 가지고 이럴 일인가? 다시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들 것 같아 힘을 줘 부릅떠야 했다. 기어서라도 나갈 생각으로 퍼덕거리다 침대 기둥에 새겨진 4황자 궁의 상징 레브란트를 발견했다.
4황자 궁임을 확인하자 몸부림을 멈추고 다시 곧게 누웠다. 다행히 아델로아가 나를 잘 거둔 모양이다. 나는 다시 가물거리는 정신을 천천히 놓았다. 어차피 이 상태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으니 제대로 푹 쉬고 핑계든 뭐든 떠올려 볼 생각이다. 그사이는 에르켈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완전히 잠들기 전에 커튼이 걷혔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지는 않았대.”
내가 깨어 있는 걸 확인한 에르켈이 침대 옆에 앉았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상이 여러 개로 나뉘었다가 합쳐지길 반복하느라 어지러웠다.
“피를 멎게 하느라 포션 한 통을 다 썼고, 부족한 피를 보충하느라 또 한참 퍼부었어. 의원이 거의 울더라.”
“응….”
“펠?”
에르켈은 페르온을 펠이라고 불렀다. 페르온이 누구인가 하면 제국 유일의 황태자인 페르온 아카레온이다. 나는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여러 의미로 인간 같지 않은 낯이다. 그놈에게 펠이라는 깜찍한 애칭을 붙이다니. 이런 게 원작자의 능력인가 싶다. 부럽지는 않았다.
긍정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에르켈에게는 ‘펠’이 아무리 쓰레기여도 본인 손으로 만들어 애정을 준 캐릭터임을 알고 있다. 얘 성격에 분명 자기가 사과를 할 텐데, 그걸 받고 싶지도 않고 받을 이유도 없었다. 가만히 다가온 손이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애들은.”
“돌려보냈지. 너는 먼저 갔다고 했어. 루이스가 네 과제를 챙겨 뒀다고 하더라.”
“집에는….”
“둘러대기는 했는데, 그쪽은 모르겠네. 케일 눈치가 워낙 빠르잖아.”
일단 급한 불은 껐다는 말에 안심이 됐다. 그 뒷일은 둘러댈 자신이 있다.
“아델로아가…. 황태자, 새끼가 나를 데리고 왔는데. 만나서.”
“응. 아델로아가 너를 안고 왔어.”
“아무도, 안 되는데. 존나 피해 다녀서…. 억울하게.”
목소리가 늘어졌다. 생각을 하고 말하는 게 아니라 단어만 툭툭 튀어나오는데도 에르켈은 잘 알아듣고 답했다.
“들어오면서 몇 명 보긴 했겠지만, 그것도 아델로아가 잘 처리했을 거야.”
그렇구나…. 멍하게 생각하다 ‘처리’라는 단어에 돌아보았다. 이런 경우에 처리라는 건 보통, 사람을 치워 버렸다는 걸 뜻하는 거 아닌가.
“걱정마. 안 죽였어.”
“아니, 미친놈아….”
“해고도 안 했어. 주의 주고 며칠 휴가를 보내는 정도로 끝날 거야.”
에르켈은 안심하라며 토닥였다.
“조용히,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내 목표잖아. 사람이 죽어 나갔다간 이목 끈다고.”
“그렇긴 한데.”
“아무튼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넘어갈 거야. 펠도 어디 가서 떠들 이유가 없고. 뭐… 아네트는 알고 있겠지만.”
아네트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오지? 머리가 멍하니 생각이 둥둥 떠다니기만 한다. 문제에 답을 내지 못하고 기다리자 에르켈이 별거 아니라며 가볍게 말했다.
“아델로아가 아네트가 넣은 사람이잖아. 내가 뭘 먹고, 잠은 언제 자는지도 알고 있을걸.”
“…뭐?”
이번에야말로 정신이 번쩍 든다. 몸을 일으키려는 걸 에르켈이 진정하라며 눌렀다.
“장난해? 너 미친 거야? 그걸, 시발. 알고 있으면서 왜 옆에. 아니, 미친.”
“쉿. 진정해. 안정이 최우선이라고 했단 말이야.”
“안정이 문제야?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어? 야!”
멱살을 잡고 흔들 힘은 없어서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프지도 않을 텐데 “아야, 아.” 하고 반응해 주는 게 더 열 받았다.
“그치만….”
“그치만은 무슨 그치만이야. 제대로 설명 못 해?”
구박받은 에르켈이 우는 소리를 내며 설명했다. 애초에 아델로아는 아네트의 가문에서 소개장을 받고 궁에 들어왔고, 그 뒤로도 꾸준히 로웨나를 모시며 아네트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고. 원작에서 에르켈이 죽을 때 그가 황태자를 시해하려 했다는 증거를 조작한 것 역시 시녀장인 아델로아였다는 말에는 거의 숨이 넘어갈 뻔했다.
다 알고 있으면서 그걸 어떻게. 로웨나도 알고 있었지만 거부하지 못했다는 말에 이해는 했다. 로웨나가 유약한 편이긴 해도 아들을 사랑하는 건 맞다. 그런데도 한 마디 꺼내 보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아네트와의 서열 관계가 명확하다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에르켈이 아는 척해 봤자 상황이 나아질 수는 없겠지.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은 별개다. 나는 괜한 배신감까지 느꼈다. 물론 내가 알게 된다고 해서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일은 내게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막말로 내가 자주 만나는 아델로아를 신뢰해 중요한 이야기라도 던졌으면 어떻게 될 뻔했냐고.
입을 꾹 다물고 화와 억울함,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삭이고 있자 에르켈이 일어났다. 향을 켰는지 매캐하면서 단 냄새가 퍼졌다.
“미안해.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됐어.”
“해결할 수 없는데 스트레스만 받을까 봐….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꼭 상의할게. 응?”
에르켈이 연신 사과하자 오히려 내가 민망해졌다. 이러면 내가 그냥 삐진 것 같잖아. 물론 굳이 설명하자면 그 표현이 제일 어울리긴 하지만, 순순히 인정하기에는 욱하게 되는 단어다. 결국 “알겠어. 다음부터는 말해 줘.” 하고 말한 후에야 에르켈이 커튼 사이로 얼굴만 빼며 웃었다.
“더 자. 오늘 궁에서 머무를 거라고 말해 뒀어.”
너 때문에 잠이 다 깨서 못 자겠다. 하지만 몸은 정신에 반해 마법의 단어를 들은 것처럼 늘어졌다. 생각들이 멀어지며 의식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