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17)

#15

제대로 정신을 차리자 심란해졌다. 첫 외박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대충 둘러대면 형제들은 철석같이 믿어 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지만, 약 기운이었는지 일어나자마자 싹 증발했다. 아침을 먹인 에르켈은 곧바로 마차를 불렀다. 나는 소파에 늘어졌다. 이대로 몸이 붙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냥 더 있다가, 다들 출근한 후에 돌아가면 안 될까?”

“음. 그랬다간 레오가 궁으로 찾아올걸.”

너무 현실성 있는 가정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 앞에서 이렇게 가슴이 무거웠던 적이 없다.

과연 가족들이 모르고 있을까? 장남은 발이 넓고, 차남은 눈치가 빠르다. 갑자기 막내가 하룻밤을 궁에서 보내고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일단 나부터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할 것 같긴 하다.

놀랍지 않게도, 차남을 제외한 셋이 모여 있었다. 출근도 안 했는지 단번에 달려와 나를 끌어안은 장남이 이곳저곳을 살폈다. 포션을 들이부은 덕에 상처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젖은 셔츠와 더러워진 재킷도 새것으로 갈아입어 말끔했다. 에르켈이, 아니 아델로아가 제대로 입단속을 시킨 모양이지. 케일조차 사정을 모르고 있다면 다른 형제들도 모른다. 나는 일부러 당당하게 굴었다. 케일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 위에 입 맞췄다. 차남이 시작한 것은 이제 가족들의 습관이 됐다.

“갑자기 황성에서 사람이 나오기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무슨 일이 생기긴 했다. 2황자가 괴롭히려던 고양이를 들고 튀기도 하고, 황태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가 휘두른 검에 베이기도 했다.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어 부끄러운 척 웃었다.

“죄송해요. 밤이 늦어진 줄 몰랐어요. 늦게 마차를 타는 것보다는 궁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침에 출발하는 게 나을 거라고 하셔서….”

이미 에르켈과 말은 맞추고 왔다. 케일이 달려가서 에르켈에게 묻는다 해도 같은 답이 나올 것이다.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형제들은 굳이 내 거짓말을 파고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나 케일은 빠르게 표정 관리를 마친 후 아침은 먹었느냐 물었다. 허락받지 못한 외박 후 급하게 왔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느긋하고 여유롭게 호화로운 조식을 챙겨 먹고 왔다.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타이밍에 차남이 들어왔다. 얘네는 출근 안 하나? 케일과 레오의 상관이 안타까워졌다. 이름도 모르는 그들에게 짧은 사과를 전했다.

“르웰린.”

나를 덥석 안아 든 차남이 또 정수리 위로 입술을 내린다. 장남, 셋째, 아버지, 차남. 만약 뽀뽀를 할 때마다 입술의 색이 남았다면 내 머리는 이미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을 거다.

인형을 안아 들듯 가뿐하게 나를 옮기는 차남의 품에 안겨 있으려니 어제 내 품을 파고든 고양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는 황태자가 데려간 걸까. 정신이 없는 데다, 감히 그 앞에서 이건 제가 주웠다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황태자 정도 되면. 말 못하는 동물에게까지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거라는 희망적인 생각이 가슴을 채웠다. 물론, 그래. 사람한테는 검을 막 휘두르긴 했지만. 나는 목 위에 손을 얹으며 검보다 날카롭던 눈을 떠올렸다.

만약 검이 조금만 더 깊었다면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니지는 못했겠지. 정말 죽일 생각으로 검을 휘두른 황태자를 원망해야 할지, 잘 멈춰 준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놈이라면 그대로 목을 뎅겅 잘라 놓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을 거라. 일단 멈췄으니 된 거 아니냐는 천사의 목소리와 그 미친놈을 믿느냐는 악마의 목소리가 양쪽에서 싸웠다.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다.

“어제 전하를 뵌 거니?”

레오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가 움찔했다. 황태자의 호위인 그가 말하는 ‘전하’라고 하면 당연히 황태자를 뜻한다. 사실 매일 같이 얼굴을 보는 에르켈의 이야기를 굳이 꺼낼 이유도 없다. 하지만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 새침을 떨었다.

“에르켈 전하요?”

“황태자 전하.”

이른바 ‘저는 형님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두 모르겠어요.’ 작전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루이스에게 배운 스킬을 이렇게 빠르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장남과 닮은 차남도 크게 따져 묻지는 않았다.

“전하께서 네게 사과할 게 있다고 하시던데.”

아니다. 내게 묻지 않아도 증거가 있어서 그런 거였다.

다른 가족들 사이에도 파문이 일었다. 간신히 잠재운 연못에 돌을, 그것도 연못보다 지름이 넓은 바위를 던져 버린 듯한 반응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왜?”

아직 황실 마법사 타이틀을 따지 않은 마탑 소속 마법사가 의아해한다. 아벨은 황태자 캐릭터를 파악하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다.

“사과라니, 뭐에 대한….”

케일의 목소리도 심각하다. 이쪽은 황태자를 너무 잘 알아서 문제인 쪽이다. 에드윌은 정치 견해 차이로 다른 가문과 다투는 일이 잦았는데, 주로 황후의 가문인 수에닐과 치고받고 싸워댔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자연스럽게 황태자와는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노련한 정치가인 백작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 없는 재촉에 차남이 설명했다.

“네게 검술 선생을 소개해 주고 싶다 하시던데.”

“검, 술 선생이요?”

대체 뭐가 튀어나올까 상상해보며 심장을 졸이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굉장히 무난하고 그럴듯한 사과가 아닌가. 고양이를 맡아 가져가겠다고 한 점에 상식적인 범위의 사과가 더해져 점수를 주었다. 총점은 마이너스다.

“갑자기….”

내 말에 납득하고 넘어갔던 케일이 머리를 굴린다. 이러다 궁을 쥐 잡듯 잡을까 걱정돼서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케일이 마음먹고 찾아낸다면 어제의 전말을 다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황실 재무부 서기관의 능력은 언뜻 봐서 순조로워 보이는 곳에서 오류를 끄집어내는 데 특화되어 있다.

“어제 도서관 근처에서 우연히, 뵀는데…. 사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우연히’를 강조했다. 이미 한 번 ‘아무것도 몰라요’를 시전한 후라 효과는 떨어진다. 어쩔 수 없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인다. 에이든의 소극적인 태도는 가끔 속이 답답해지지만, 이런 경우 좋은 본보기가 된다. 차마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니까. 결국 모두 적당히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소개해 준다는 선생이 에드워드 스펠먼인 걸 알았으면 거절했을 것이다. 당장 달려가 황태자를 붙들고 명을 물려 주십사 매달리기라도 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열 번쯤 고민했지만 역시 이건 좀 아니다.

에르켈조차 황태자가 붙여 준 선생이 스펠먼이라는 얘기에 놀랐다.

‘걔가…, 르웰린한테 다 해 주려는 캐였던 건 맞는데. 반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둘이서 한참 머리를 쥐어뜯어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얘는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나는 ‘황태자가 열 살에게도 호감을 가지는 변태다.’ 설을 밀었고, 에르켈은 그건 아닐 거라고 기각시켰다. 싹수 없는 황태자여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잘한다는 게 원작자의 캐해석이었다.

‘에드윌이 아네트랑 친하니까, 이 기회에 견제하려는 거 아닐까?’

그나마 제일 신빙성 있는 설이다. 그래도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견제하려면 그냥 불러서 차 몇 번 마시면 되지 않나?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가 있나? 의문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답을 가진 사람이 답해 줄 생각이 없다.

사실 다른 황자조차 가르치지 않는다는 스펠먼이면 알아서 거절해 줄 거라는 기대도 있었는데, 얘기를 들은 그가 레오폴드의 동생이라는 말에 오케이 했다는 말에 절망했다.

핏줄에 뭘 기대하지 말라고. 차남이 잘난 건 그냥 개인이 잘난 건데 왜 같은 성을 쓴다는 이유로 내게도 기대를 가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긴장과 불안에 질식할 것 같던 첫날. 차남이 한 것처럼 검을 휘두르는 폼을 보여 준 뒤 따라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교본을 가져왔다. 오랜 경험과 지혜가 축적된 교과서가 있는데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에 동감했다.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하고,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지.’

둘 다 적당히는 갖춰야 인생이 고달프지 않다는 지론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청년 못지않은 몸을 가진 노기사는 교본보다 완벽한 자세를 보여 주더니 내게도 시켰다. 이전의 망신이 생각나 움츠러들었지만 그는 별 감흥 없이 ‘근력부터 키워야겠군.’ 했다.

그렇게 험난한 과정을 거쳐 연무장 뺑이를 치는 지금에 이른다.

관대하게도 황성 연무장 사용까지 허가한 황태자가 얄미웠다. 그나마 연습할 때 구경 오지 않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차양 아래에서 쉬며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을 비웃는 장면을 상상하면 반 바퀴쯤 더 뛸 힘이 났다. 스펠먼 경은 황태자가 친히 ‘재능을 갈고닦아 황실을 위해 충성을 바치는 기사가 되길 바란다.’ 했다고 전해 주었다. 이걸 떠올리면 또 반 바퀴를 뛸 수 있었다.

충성은 개뿔이다, 새끼야. 원작 벗어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지방으로 내려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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